1981년 결성 초기의 ‘송골매’.
그렇다면 금의 시대와 요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필자에게는 검열로 대표되는 창작 제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사실 그 시절에는 밴드가 ‘탈춤’ ‘불놀이야’처럼 토속적인 소재의 곡을 곧잘 불렀다. 필자는 막연히 당시 대학생 나름의 문화였으리라고 짐작했는데, 그런 ‘대학가요’가 군사독재의 엄혹한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얘기를 최근에 들었다. 하긴 ‘창법 저속’ ‘염세 조장’ ‘의미 불명’ 등 별별 꼬투리를 잡아 창작물을 무위로 만들어버리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단순한 검열 차원이 아니라 아예 권력층의 입맛에 맞지 않는 창작 자체를 봉쇄하려던 체제도 있었다. 영화 ‘레드핫’의 배경인 1959년 소련이 바로 그랬다. 개혁파 흐루쇼프가 당서기에 등극했지만 여전히 서슬 퍼런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 보수적인 음악학교에서 클래식을 전공하던 남자 주인공은 어느 날 배 타는 삼촌이 가져온 미국 레코드를 듣고 로큰롤 음악에 빠져든다. 은밀히 해적판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파는 한편, 자신도 밴드를 조직해 지하실에서 콘서트를 펼친다. 결국 주인공은 비밀경찰 KGB에 체포되고, ‘불법 작곡’이란 죄목으로 7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영화적 과장이면 좋겠지만 사실이었다. 소련에서는 모든 예술가가 자신이 속한 장르의 노동자조합 혹은 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어떤 작품을 발표할지, 어떤 메시지나 미학을 담을지에 대해 일일이 당과 동지들에게 보고한 뒤 승인받은 작품만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회상록 ‘증언’에는 그렇듯 손발을 묶인 예술가의 울분이 고스란히 담겼다. 스탈린의 철권통치 아래서 그는 ‘인민과 유리된 형식주의 예술가’라는 비판을 수없이 받아야 했고, 교향곡 4번은 34년이나 발표되지 못한 채 묻혀 있었다.
다시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여성가족부의 청소년유해매체 선정이나 방송심의가 있긴 하지만, 대중음악에서 표현의 자유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넓어진 게 사실이다. 간드러진 목소리로 ‘오늘밤은 어둠이 무서워요’라고 노래하는 ‘십센치’는 예전 같으면 ‘창법 저속’에 걸렸을 테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희화한 음반 커버에 ‘서울불바다’라는 위악적인 제목을 달아 발표한 ‘밤섬해적단’ 같은 밴드는 당장 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 감이다. 만약 이들이 금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거꾸로 배철수나 홍서범 같은 당시의 음악인이 지금 20대를 보낸다면 어떤 노래가 나왔을까. 문득 떠오른 재미난 상상이다.
*정바비는 1995년 인디밴드 ‘언니네이발관’ 원년 멤버로 데뷔한 인디 뮤지션. ‘줄리아 하트’ ‘바비빌’ 등 밴드를 거쳐 2009년 ‘브로콜리 너마저’ 출신 계피와 함께 ‘가을방학’을 결성, 2010년 1집 ‘가을방학’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