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걸그룹 ‘쥬얼리’의 리더 자리를 내놓고 솔로로 독립한 박정아(30). 지난 10개월 동안 그는 ‘가수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온전히 배우로 살았다. KBS 일일드라마 ‘웃어라 동해야’와 단막극 ‘올레길 그 여자’에 연달아 출연하며 그 어느 때보다 연기에 깊이 빠져 있었다.
“예전에는 드라마나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했는데 이번에는 작품이 욕심났어요. 연기력을 단련하기에 일일드라마만 한 게 없을 것 같아서요.”
‘웃어라 동해야’에서는 데뷔 후 처음 악역에 도전했다. 부와 성공을 위해 사랑하는 남자를 버린 윤새와라는 아나운서 역이었다. 윤새와는 자신의 과거를 감추려고 온갖 거짓말로 동해(지창욱 분)를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 8개월 가까이 윤새와로 사는 동안 처음에는 연기력 때문에 시청자의 질타를 받았으나 나중에는 호평이 이어졌다.
“아무런 스킬도 없이 일일드라마를 하면서 나름의 연기 철학이 생겼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연기를 하려면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드라마를 하는 동안 새와처럼 생각하려 했고, 새와가 아프면 저도 아팠어요. 신경쇠약으로 죽을 것만 같았죠. 한동안 위궤양에 걸려 위가 심하게 아팠어요. 그러더니 또 자꾸 쓰러지는 거예요. 그런데 작가도 이 정도면 사람이 죽을 지경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새와가 쓰러지는 장면을 넣어준 거예요. 그래서 정말 행복했어요. 아주 재밌게 촬영했고 끝나고 나서도 기분 좋은 성취감을 느꼈어요. 실로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에 성취감을 맛봤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2001년 쥬얼리로 가요계에 데뷔하자마자 단숨에 스타로 등극했고, ‘슈퍼스타’ ‘원 모어 타임’ 등 여러 히트곡을 낸 그가 아니던가.
“10년 동안 가수 생활하면서 단 한 번도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성취감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그게 제일 안타까워요. 1년 365일 중 메이크업을 안 한 날이 5일 정도밖에 되지 않을 만큼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힘들기만 했어요. 지금 같으면 기회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지혜롭지 못했죠. 절 가두고 있는 알을 깨부수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데뷔 후 활동 영역을 가요 무대로 제한하지 않고 라디오와 예능 프로그램, 영화, 드라마를 넘나든 박정아. 마냥 승승장구할 것 같던 인기 상승세를 가로막은 건 2004년 처음 주연을 맡은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다. 시청률이 저조하자 비난의 화살이 그에게 꽂혔다.
“시청자가 주는 당근만 먹다가 갑자기 채찍을 맞으니 너무 아파서 움츠러들었어요. 기획사 사장님도 채찍질을 하시더라고요. 필요한 건 당근이었는데…. 그때부터 사장님과 3년 동안 말도 안 했어요. 보면 인사만 하고 도망쳤거든요. 날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원망했어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대상이 없는 원망이었어요. 무엇 하나 즐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죠.”
가수 생활 10년 동안 체험한 희로애락 연기로 표현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대인기피증으로 이어졌지만 일을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대인기피증은 오래가지 않은 대신 연예인 생활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방황은 2006년부터 3년 동안 계속됐다. 그러다 2009년 3월 에티오피아에 봉사를 다녀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해맑고 꿋꿋하게 사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갖게 했다.
“아이들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반성했어요. 저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욕심이라는 게 덧없이 느껴졌어요.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저는 참 대범한 아이였더라고요. 이렇게 되짚어 생각하면서 자존감도 생기고 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배웠어요. 힘들게 왔으니 끝을 보자, 이 직업을 가지면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니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부터 ‘정신 개조’를 시작했다. 힘들 때도 간혹 있었지만 스트레스를 오래 끌어안진 않았다. ‘가두고 있던 알을 깨기 위한 일’도 행동으로 옮겼다. 그건 바로 연기다. 2010년 3월 SBS 드라마 ‘검사 프린세스’에서 조연을 맡은 것도 초심으로 돌아가 새롭게 발판을 다지려는 심기일전의 발로였다.
“예전에는 살기 바빴어요. 남 쳐다볼 여유가 없었죠. 비난받기 싫으니까 남을 측정하지도 못했고요. 약간 겁쟁이예요. 근데 남에게 관심을 갖다 보니 아쉬운 점과 배울 점이 보이고, 그들의 열정도 느껴졌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삶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배우게 되더라고요. 앞만 보고 살아서 고통이 오면 고통 속으로 직진하던 제가 희망이 존재한다는 걸 본 거죠. 급할수록 돌아가는 여유도 생겼어요.”
가수 생활 10년 동안 체험한 희로애락은 연기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7월 17일 방송한 단막극 ‘올레길 그 여자’는 ‘웃어라 동해야’에서의 호연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 작품에서 박정아는 금지된 사랑을 나누던 남자에게 배신당한 후 올레길 여행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피아니스트 김영주로 등장했다. 까칠하지만 가슴의 상처와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인물. 악녀 이미지를 벗고 김영주의 섬세한 감정선을 넘나든 그에게 다시금 찬사가 쏟아졌다.
“아픔을 모르는 사람보다 아픔을 아는 사람이 아픈 감정을 표현하기 수월한 것 같아요. 김영주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그런 생각이 도움이 되더군요. 집안이 무너져본 사람은 무너졌을 때 충격을 알고, 주변에 쓰러진 사람이 있으면 그게 어떤 느낌인지 쉽게 감 잡을 수 있잖아요.”
▼ 연기가 만족스러운가요.
“즐겁게 했어요. 많은 분이 좋았다고 말씀해주셔서 힘이 났어요. 예전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서워 모니터를 해달라는 말도 못했어요. 이번에는 지인들에게 꼭 보고 얘기해달라고 했죠. 정확한 얘기를 듣고 싶었거든요. 괜찮았다고 하는 친구도 있었고 조언해준 친구도 있었어요. 모두 저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라 가슴에 새겼어요. 자신을 가두었던 알을 조금씩 깨부수는 것 같아 좋아요.”
▼ 완벽주의자인가요.
“그건 아니고, 잘하려고 하다 보니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어설픈 연기자가 아니라 프로페셔널 배우가 되고 싶다고나 할까요. 일일극을 한 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낼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서예요. 싸움에서 지면 연예인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갈 생각이었어요. 이왕 마음먹은 것, 신경쇠약에 걸려 죽든, 이겨내든 둘 중 하나라는 필사의 각오로 임했죠. 그래서인지 촬영하는 내내 행복했어요. 또 이겨내는 제 모습이 대견했고, 연기에 재미도 느꼈어요.”
고교시절 그는 악기를 다루는 친구들과 카피(copy) 밴드를 결성했을 만큼 록음악에 심취했다. 포지션은 보컬. 드러머 출신인 아버지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은 삶의 일부였지만 가수가 된 건 우연이다.
“고2 때인가, 아무로 나미에라는 일본 댄스가수가 프로젝트 그룹을 만든다는 기사를 보고 오디션을 봤어요. 결과는 낙방이었죠. 그러고 1년 뒤 오디션에서 절 눈여겨본 소속사 사장님이 함께 일해보자고 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섰어요. 처음에는 멤버가 저 혼자여서 다른 멤버를 영입할 때까지 혼자 연습했어요. 그렇게 1년 반을 보낸 뒤 쥬얼리로 세상에 나왔죠.”
정애리 선생님이 롤모델…일에 열정 쏟을 것
쥬얼리에 몸담은 동안엔 리더라는 무게감 탓에 자유롭지 못했다. 누가 강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 짊어진 총대였다. 솔로가수로 독립했지만 이름 앞에는 여전히 ‘쥬얼리 출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쥬얼리를 채운 새로운 후배들이 더 멋진 그룹으로 키워나갈 거라 믿어요. 솔로로 뛰는 만큼 후배에게 귀감이 되는 길을 가고 싶어요. 가수 겸 배우라는 이름으로요. 음반을 언제 낼지는 기약할 수 없고, 당분간 연기에 매진하려고 해요.”
▼ 액션배우를 준비한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아직 나올 얘기가 아니에요. 액션스쿨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더니 그런 기사가 났어요. 액션배우가 되고 싶긴 해요. 앞구르기, 낙법. 기막히게 해요. 안 한지 10년 됐지만. 집에 퍼질러 있는 게 싫어서 스포츠댄스도 배우고, 액션스쿨에 다니면서 몸 쓰는 것도 연습해요.”
▼ 롤모델이 있나요.
“정애리 선생님이요. 이름만으로도 힘이 되는 분이세요. 촬영장에서 참 따뜻하게 챙겨주셨어요. 연기자로서의 열정이라든지 갖춰야 할 자질, 자세를 일러주셨죠. 언젠가 세월이 흘렀을 때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 후배들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제가 선생님을 보는 눈빛이길 바라는 거예요.”
서른 즈음에 박정아는 나이 먹는 게 끔찍이 싫었다고 한다.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후배들이 걸그룹을 만들어 등장하니 내몰리는 느낌이었다고. 서른이 된 지금, 그는 어느 때보다 넉넉하다.
“20대에는 버거운 일이 많았어요. 서른이 넘으니 여유가 생겨요. 발뒤꿈치 주름도 예뻐 보일 만큼 저를 사랑해요. 일에 대한 열정도 더 커졌고…. 그래서 정말 좋아요.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앞으로 더 잘 될 거라 믿어요. 일 욕심도 생겼고, 힘든 시간을 보내선지 매 순간이 더 소중하고, 더 즐겁고, 어떤 상황이 닥쳐도 즐길 것 같아요.”
“예전에는 드라마나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했는데 이번에는 작품이 욕심났어요. 연기력을 단련하기에 일일드라마만 한 게 없을 것 같아서요.”
‘웃어라 동해야’에서는 데뷔 후 처음 악역에 도전했다. 부와 성공을 위해 사랑하는 남자를 버린 윤새와라는 아나운서 역이었다. 윤새와는 자신의 과거를 감추려고 온갖 거짓말로 동해(지창욱 분)를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 8개월 가까이 윤새와로 사는 동안 처음에는 연기력 때문에 시청자의 질타를 받았으나 나중에는 호평이 이어졌다.
“아무런 스킬도 없이 일일드라마를 하면서 나름의 연기 철학이 생겼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연기를 하려면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드라마를 하는 동안 새와처럼 생각하려 했고, 새와가 아프면 저도 아팠어요. 신경쇠약으로 죽을 것만 같았죠. 한동안 위궤양에 걸려 위가 심하게 아팠어요. 그러더니 또 자꾸 쓰러지는 거예요. 그런데 작가도 이 정도면 사람이 죽을 지경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새와가 쓰러지는 장면을 넣어준 거예요. 그래서 정말 행복했어요. 아주 재밌게 촬영했고 끝나고 나서도 기분 좋은 성취감을 느꼈어요. 실로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에 성취감을 맛봤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2001년 쥬얼리로 가요계에 데뷔하자마자 단숨에 스타로 등극했고, ‘슈퍼스타’ ‘원 모어 타임’ 등 여러 히트곡을 낸 그가 아니던가.
“10년 동안 가수 생활하면서 단 한 번도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성취감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그게 제일 안타까워요. 1년 365일 중 메이크업을 안 한 날이 5일 정도밖에 되지 않을 만큼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힘들기만 했어요. 지금 같으면 기회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지혜롭지 못했죠. 절 가두고 있는 알을 깨부수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데뷔 후 활동 영역을 가요 무대로 제한하지 않고 라디오와 예능 프로그램, 영화, 드라마를 넘나든 박정아. 마냥 승승장구할 것 같던 인기 상승세를 가로막은 건 2004년 처음 주연을 맡은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다. 시청률이 저조하자 비난의 화살이 그에게 꽂혔다.
“시청자가 주는 당근만 먹다가 갑자기 채찍을 맞으니 너무 아파서 움츠러들었어요. 기획사 사장님도 채찍질을 하시더라고요. 필요한 건 당근이었는데…. 그때부터 사장님과 3년 동안 말도 안 했어요. 보면 인사만 하고 도망쳤거든요. 날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원망했어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대상이 없는 원망이었어요. 무엇 하나 즐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죠.”
가수 생활 10년 동안 체험한 희로애락 연기로 표현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대인기피증으로 이어졌지만 일을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대인기피증은 오래가지 않은 대신 연예인 생활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방황은 2006년부터 3년 동안 계속됐다. 그러다 2009년 3월 에티오피아에 봉사를 다녀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해맑고 꿋꿋하게 사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갖게 했다.
“아이들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반성했어요. 저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욕심이라는 게 덧없이 느껴졌어요.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저는 참 대범한 아이였더라고요. 이렇게 되짚어 생각하면서 자존감도 생기고 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배웠어요. 힘들게 왔으니 끝을 보자, 이 직업을 가지면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니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부터 ‘정신 개조’를 시작했다. 힘들 때도 간혹 있었지만 스트레스를 오래 끌어안진 않았다. ‘가두고 있던 알을 깨기 위한 일’도 행동으로 옮겼다. 그건 바로 연기다. 2010년 3월 SBS 드라마 ‘검사 프린세스’에서 조연을 맡은 것도 초심으로 돌아가 새롭게 발판을 다지려는 심기일전의 발로였다.
“예전에는 살기 바빴어요. 남 쳐다볼 여유가 없었죠. 비난받기 싫으니까 남을 측정하지도 못했고요. 약간 겁쟁이예요. 근데 남에게 관심을 갖다 보니 아쉬운 점과 배울 점이 보이고, 그들의 열정도 느껴졌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삶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배우게 되더라고요. 앞만 보고 살아서 고통이 오면 고통 속으로 직진하던 제가 희망이 존재한다는 걸 본 거죠. 급할수록 돌아가는 여유도 생겼어요.”
가수 생활 10년 동안 체험한 희로애락은 연기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7월 17일 방송한 단막극 ‘올레길 그 여자’는 ‘웃어라 동해야’에서의 호연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 작품에서 박정아는 금지된 사랑을 나누던 남자에게 배신당한 후 올레길 여행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피아니스트 김영주로 등장했다. 까칠하지만 가슴의 상처와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인물. 악녀 이미지를 벗고 김영주의 섬세한 감정선을 넘나든 그에게 다시금 찬사가 쏟아졌다.
“아픔을 모르는 사람보다 아픔을 아는 사람이 아픈 감정을 표현하기 수월한 것 같아요. 김영주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그런 생각이 도움이 되더군요. 집안이 무너져본 사람은 무너졌을 때 충격을 알고, 주변에 쓰러진 사람이 있으면 그게 어떤 느낌인지 쉽게 감 잡을 수 있잖아요.”
▼ 연기가 만족스러운가요.
“즐겁게 했어요. 많은 분이 좋았다고 말씀해주셔서 힘이 났어요. 예전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서워 모니터를 해달라는 말도 못했어요. 이번에는 지인들에게 꼭 보고 얘기해달라고 했죠. 정확한 얘기를 듣고 싶었거든요. 괜찮았다고 하는 친구도 있었고 조언해준 친구도 있었어요. 모두 저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라 가슴에 새겼어요. 자신을 가두었던 알을 조금씩 깨부수는 것 같아 좋아요.”
▼ 완벽주의자인가요.
“그건 아니고, 잘하려고 하다 보니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어설픈 연기자가 아니라 프로페셔널 배우가 되고 싶다고나 할까요. 일일극을 한 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낼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서예요. 싸움에서 지면 연예인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갈 생각이었어요. 이왕 마음먹은 것, 신경쇠약에 걸려 죽든, 이겨내든 둘 중 하나라는 필사의 각오로 임했죠. 그래서인지 촬영하는 내내 행복했어요. 또 이겨내는 제 모습이 대견했고, 연기에 재미도 느꼈어요.”
고교시절 그는 악기를 다루는 친구들과 카피(copy) 밴드를 결성했을 만큼 록음악에 심취했다. 포지션은 보컬. 드러머 출신인 아버지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은 삶의 일부였지만 가수가 된 건 우연이다.
“고2 때인가, 아무로 나미에라는 일본 댄스가수가 프로젝트 그룹을 만든다는 기사를 보고 오디션을 봤어요. 결과는 낙방이었죠. 그러고 1년 뒤 오디션에서 절 눈여겨본 소속사 사장님이 함께 일해보자고 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섰어요. 처음에는 멤버가 저 혼자여서 다른 멤버를 영입할 때까지 혼자 연습했어요. 그렇게 1년 반을 보낸 뒤 쥬얼리로 세상에 나왔죠.”
정애리 선생님이 롤모델…일에 열정 쏟을 것
쥬얼리에 몸담은 동안엔 리더라는 무게감 탓에 자유롭지 못했다. 누가 강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 짊어진 총대였다. 솔로가수로 독립했지만 이름 앞에는 여전히 ‘쥬얼리 출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쥬얼리를 채운 새로운 후배들이 더 멋진 그룹으로 키워나갈 거라 믿어요. 솔로로 뛰는 만큼 후배에게 귀감이 되는 길을 가고 싶어요. 가수 겸 배우라는 이름으로요. 음반을 언제 낼지는 기약할 수 없고, 당분간 연기에 매진하려고 해요.”
▼ 액션배우를 준비한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아직 나올 얘기가 아니에요. 액션스쿨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더니 그런 기사가 났어요. 액션배우가 되고 싶긴 해요. 앞구르기, 낙법. 기막히게 해요. 안 한지 10년 됐지만. 집에 퍼질러 있는 게 싫어서 스포츠댄스도 배우고, 액션스쿨에 다니면서 몸 쓰는 것도 연습해요.”
▼ 롤모델이 있나요.
“정애리 선생님이요. 이름만으로도 힘이 되는 분이세요. 촬영장에서 참 따뜻하게 챙겨주셨어요. 연기자로서의 열정이라든지 갖춰야 할 자질, 자세를 일러주셨죠. 언젠가 세월이 흘렀을 때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 후배들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제가 선생님을 보는 눈빛이길 바라는 거예요.”
서른 즈음에 박정아는 나이 먹는 게 끔찍이 싫었다고 한다.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후배들이 걸그룹을 만들어 등장하니 내몰리는 느낌이었다고. 서른이 된 지금, 그는 어느 때보다 넉넉하다.
“20대에는 버거운 일이 많았어요. 서른이 넘으니 여유가 생겨요. 발뒤꿈치 주름도 예뻐 보일 만큼 저를 사랑해요. 일에 대한 열정도 더 커졌고…. 그래서 정말 좋아요.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앞으로 더 잘 될 거라 믿어요. 일 욕심도 생겼고, 힘든 시간을 보내선지 매 순간이 더 소중하고, 더 즐겁고, 어떤 상황이 닥쳐도 즐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