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중고차시장에서 구입한 중고차.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남미에서 활동한 두 달 전으로 돌아가자. 미국을 떠나면서 협찬받았던 자동차와 작별해야 했던 우리는 그동안 차에 싣고 다녔던 짐을 어깨에 짊어지면서 앞으로 닥칠 고난을 예감했다. 도로 사정이 불안정한 남미에서는 부득이하게 대중교통으로 이동해야 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허리를 휘청하게 만드는 엄청난 무게에 분실 위험까지 있는 짐을 메고 다녀야 했다. 게다가 버스나 비행기 편이 있는 대도시 또는 수도 위주로 들를 수밖에 없어 운신의 폭도 좁았다.
우리끼리 자동차 여행 의기 투합
남미를 떠나 유럽을 횡단하는 동안에도 버스시간을 맞추느라 허둥지둥, 헐레벌떡 뛰어다니는 일이 예사였다. “마드리드행 버스가 출발까지 2분 남았어!” “3분 뒤 출발인데 왜 다들 안 오지?” 버스와 기차에 빌붙는 아슬아슬한 유랑생활은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이어졌다. 파리, 셉튀르, 디종을 쉴 새 없이 오가며 공연하랴, 교민 만나랴, 아름다운 정경을 눈에 담으랴 정신없던 프랑스 일정이 끝난 날에도 유로라인 버스가 떠나기 직전 간신히 잡아탔다. 그리고 밤새 달려 새벽에 도착하자마자 프랑크푸르트 지역의 11개 한인교회가 연합한 야외 예배 행사에 참가했다가 숙소에 도착하니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럼에도 마냥 쉴 수만은 없었다. 남미에서부터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교통수단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풀리지 않는 숙제’를 끝내기 위해서 또다시 기나긴 회의가 이어졌다. 애당초 유럽에 오기 전에는 일명 ‘뚝뚝’이라 부르는 모토택시를 구해 타고 다니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막상 스페인에 도착해 알아보니 배기량 125cc 이상은 원동기 자격증이 있어야 탈 수 있었다. 게다가 차선책으로 거론하던 스쿠터도 매물 부족으로 어려웠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짐을 이고 지고 매번 버스를 타야 할까. 아니면 미국을 동서로 달렸던 것처럼 자동차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야 할까.
이미 신물이 나도록 버스를 탔지만, 차를 사는 것 역시 만만한 선택은 아니었다. 먼저 비용 문제. 최소 5000유로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등록비와 보험료도 붙는다. 하루 평균 300km를 차로 이동하는 데 따르는 체력 소모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곧 닥쳐올 중앙아시아 일정에서는 국경을 통과해야 하는데, 경비병들의 텃세와 ‘뒷돈’ 요구가 상당한 데다, 초원 한가운데서 타이어에 구멍이라도 나면 도움을 청할 곳도 없다. 상식에 따른다면 저렴하고 안전한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옳다. 결국 이 모든 고민은 한 가지 문제로 귀결됐다. 안전하지만 단조로운 대중교통에 의지할 것인가, 위험과 금전적 부담이 따르지만 모험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자동차를 이용할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우리끼리 자동차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보는 거야!” 어차피 열정과 도전이라는 기치 아래 여행을 시작한 우리 아닌가. 세계일주 일정에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것도 다른 사람은 가지 않는, 한국과 독도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 때문 아닌가.
마침 우리가 머물던 곳은 ‘자동차 왕국’ 독일이었다. 시장 규모와 가격에 있어 근처의 어느 나라보다도 중고차를 구매하기에 유리한 곳으로 우리가 머물던 프랑크푸르트만 해도 외곽으로 나가면 중고차 매장이 30곳가량 모여 있었다.
아우토반 달리며 소도시 만나
중고차를 사겠다고 어렵사리 결정했다고 해서 입맛에 맞는 차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닐 터. 남은 일정을 생각하면 허락된 시간은 길어야 일주일이었다. 며칠 동안 검색을 계속한 끝에 처음으로 찾아낸 자동차는 계약 직전 주인이 갑자기 보험료만 1700유로를 요구해 구입이 취소됐다. 암담했지만 실의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여러 사이트를 뒤지던 중 사진도 없이 ‘4000유로, 빨간색 카니발’이라고는 정보만 올라온 매물을 발견하고 바로 달려갔다. 세상에나, 역시나 값싼 이유가 있었다. 범퍼는 부서졌고 긁힌 자국만 여덟 줄이다. 딱 봐도 예전 주인이 운전을 험하게 한 티가 났다. 보닛을 열어보니 윤활유와 냉각수마저 부족한 상태. 게다가 ‘흥엥흥엥’거리는 수상쩍은 시동 소리까지…. 외양만 보면 실격이지만, 사실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험난한 여행에 ‘반반한’ 새 차는 필요 없지 않은가. 잘만 수리하면 오히려 가격과 성능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협상이 시작됐다. “차체에 흠집이 많네요” “시동이 잘 안 걸리는군요”…. 워낙 문제가 많은 차라 주인 처지에서는 골칫덩어리였을 뿐 아니라 기술검사가 한 달밖에 안 남았으니 가지고 있기 부담스러운 물건일 것이 뻔했다. 이리저리 흠을 잡다 가격을 더 깎는 대신 고장 난 곳을 수리하고, 번호판은 물론 차량등록증 등 경찰 검문에 대비한 모든 서류도 철저히 준비해달라는 쪽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잔뜩 긴장하던 주인은 보험료까지 합쳐 4500유로를 부르는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중앙아시아로 갈 예정이라 에어컨이 필요하다니까 자기 돈을 들여서라도 말끔히 수리해놓겠다 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애마’를 손에 넣었다. 이제 이 차로 남은 50여 일 동안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중국까지 당도한 다음, 거기서 배를 타면 넉 달 전 떠난 한국에 닿는다. 차를 사기까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대원들도 내부를 정성스레 닦으랴, 카메라로 이곳저곳 찍으랴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여섯 명이 달려들어 쓸고 닦으니 꽤 봐줄 만했다. 누군가가 “차를 어떻게 꾸밀까?”라며 화제를 던지자 “스티커를 붙이자”는 아이디어에서부터 “보닛에 콩나물을 심어 길러 먹자”는 기상천외한 발상까지 등장해 오랜만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유창한 독일어로 현지인과 협상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새로 산 차에 오른 우리는 300km를 달려 뉘른베르크에 도착했다. 당초 목적지인 프라하로 갈 때보다 적게 이동한 셈이지만, 우리가 또 언제 이렇게 아우토반을 달리며 소도시를 들러볼 수 있겠는가. 저녁 늦게 도착한 뉘른베르크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건물이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야경을 자랑했다. 자동차 여행의 묘미를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이렇게 동유럽과 터키를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차를 달려 끝없이 동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걱정은 자동차 대륙횡단을 결정하는 그 순간 프랑크푸르트에 버려두고 왔으니까.
* 독도레이서 팀은 6개월간 전 세계를 여행하며 아름다운 섬 ‘독도’를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