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마술사에, 피에로에, 서커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제는 나이 들고 예전만큼의 명성을 얻지 못하는 그는 마술사다. 지금도 여전히 입에서 꺼낸 글라스에 와인을 채우고 모자에서 토끼를 끄집어내며 손가락을 튕겨 동전을 잡아내지만, 관객 반응은 썰렁하기만 하다. 극장에 관객이 드는 이유는 시끌벅적 몸을 흔들며 요란한 노래를 불러대는 록밴드가 있기 때문이지, 한순간 눈을 속여 환상을 심어주는 마술사 때문이 아니다.
게다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쇼를 보러 극장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예전처럼 대도시에서 공연하기가 어려워지자 그는 유럽 이곳저곳을 떠돌며 공연했고,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까지 흘러 들어간다. 아직은 마술쇼에 박수를 보내는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 사람들. 하지만 그들도 이제 주크박스를 들여놓고 록밴드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마술쇼를 끝낸 뒤 홀로 방에 들어앉아 뛰어다니는 토끼를 잡아 놓고, 얼굴 분장을 지우는 쇠락한 마술사의 손놀림을 눈여겨보는 소녀가 있다. 마술사의 손가락 끝에서 생겨나는 동전에 관심을 보이는 소녀가 있다. 답답할 정도로 작은 마을, 노인만 남은 작은 마을을 떠나 여러 곳을 여행하는 마술사의 삶에 호기심을 느끼는 소녀가 있다.
그래서 소녀는 마술사가 마을을 떠나던 날 아무도 몰래 그의 뒤를 따라 배에 탔고, 그렇게 두 사람의 동행이 시작됐다. 아버지와 딸처럼 소녀는 그에게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고, 이것도 먹고 싶고 여기도 들어가 보고 싶다며 졸라댄다. 소녀가 그럴 때마다 그는 슬쩍 남은 돈을 세어보곤 한다. 그리고 소녀에게 외투를, 구두를, 장신구를 사준다.
그 돈을 벌려고 그는 소녀가 잠든 사이 이곳저곳에서 자투리 일을 하지만 그마저도 이리저리 떼이고 쫓겨나기 일쑤다. 이런 사정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또 알 리도 없는 소녀는 쇼윈도를 기웃거리고 남자를 사귀며 점점 더 도시의 소녀가 돼간다.
무성영화 시절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과 어깨를 겨루던 프랑스 코미디언이 있다. 그의 이름은 자크 타티. 스포츠로 단련된 몸을 이용할 줄 알았던 그는 스포츠 팬터마임으로 뮤직홀에서 이름을 날린 스타였다. 특히 음향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일상의 소리를 영화에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다. 또한 대중적 슬랩스틱에 모더니즘을 가미한 새로운 코미디를 선보였다. 그는 상당히 뛰어난 재능으로 침묵과 중단이라는 대담한 코미디를 도입했고, 내면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지와 틈의 유머를 만들어냈다.
실뱅 쇼메 감독의 ‘일루셔니스트’는 바로 그 자크 타티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이제는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그 시절, 애잔함을 남기는 뒷모습에 대한 향수에 다름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오랜 전통에 빛나는 고몽영화사에서 트릭 전문기사로 일하던 에밀 콜은 무성영화에 다양한 실험적 요소를 대입하며 애니메이트 기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최초로 1분 18초짜리 애니메이션 ‘팡스스마고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애니메이션의 시초다. 콜의 뒤를 이어 프랑스에서는 훌륭한 애니메이터와 작품이 연달아 나왔다. ‘왕과 새’ ‘작은 병사’의 폴 그리모, ‘미개의 행성’ ‘강다하’의 르네 랄루, ‘프린스 앤 프린세스’ ‘키리투와 마녀’의 미셸 오슬로 등 내로라하는 애니메이터가 프랑스 애니메이션을 이어왔다.
그리고 쇼메가 있다. 1980년대부터 애니메이터로 일해온 그지만, 사실 장편 애니메이션 연출작은 많지 않다. 그의 작품 근간은 타티에 닿아 있는데, 대표작인 ‘벨빌의 세쌍둥이’가 그렇고 ‘일루셔니스트’ 또한 그렇다. 타티가 딸에게 보낸 편지를 바탕으로 만든 ‘벨빌의 세쌍둥이’에서 이미 그는 타티의 분신처럼 느껴진다. ‘일루셔니스트’는 타티의 원작 그대로 만든 작품인데 곳곳에 타티와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풀어놓음으로써 관객의 마음 한구석을 자극해 스스로 타티의 적자임을 대변한다. 타티가 ‘일루셔니스트’를 찍지 못한 이유는 주인공이 자신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라는 일설이 있다. 어쩌면 타티의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었던 사람은 쇼메가 아니었을까 싶다.
일루셔니스트. 그는 소녀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루셔니스트인 셈이다. 동전이 필요하다며 손을 내밀면 손가락을 튕겨 동전을 쥐어주는 마술사. 예쁜 코트가 탐나 진열장에 코를 대고 들여다보면 그 마음을 헤아려 코트를 사서 마술처럼 입혀주는 마술사. 어쩌면 소녀는 그가 진짜 마술로 이 모든 것을 충당한다고 착각했으리라. 그래서 소녀는 아무 부담 없이 마술사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 아닐까. 소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도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거리낌 없이 부모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받아내면서 그 어떤 심경의 헤아림도 없지 않았던가. 부모니까 마땅히 해줘야 한다는 듯. 소녀의 행동이 얄밉지만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그런 철없는 행동이 곧 우리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일루셔니스트’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영상에 애틋하고 쓸쓸한 마술사의 지난 시절을 보여준다. 걱정 가득한 기색이나 우울함 없이 담담하게 매일을, 일상을, 현재를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관객에게 애잔하게 다가든다.
이제는 나이 들고 예전만큼의 명성을 얻지 못하는 그는 마술사다. 지금도 여전히 입에서 꺼낸 글라스에 와인을 채우고 모자에서 토끼를 끄집어내며 손가락을 튕겨 동전을 잡아내지만, 관객 반응은 썰렁하기만 하다. 극장에 관객이 드는 이유는 시끌벅적 몸을 흔들며 요란한 노래를 불러대는 록밴드가 있기 때문이지, 한순간 눈을 속여 환상을 심어주는 마술사 때문이 아니다.
게다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쇼를 보러 극장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예전처럼 대도시에서 공연하기가 어려워지자 그는 유럽 이곳저곳을 떠돌며 공연했고,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까지 흘러 들어간다. 아직은 마술쇼에 박수를 보내는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 사람들. 하지만 그들도 이제 주크박스를 들여놓고 록밴드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마술쇼를 끝낸 뒤 홀로 방에 들어앉아 뛰어다니는 토끼를 잡아 놓고, 얼굴 분장을 지우는 쇠락한 마술사의 손놀림을 눈여겨보는 소녀가 있다. 마술사의 손가락 끝에서 생겨나는 동전에 관심을 보이는 소녀가 있다. 답답할 정도로 작은 마을, 노인만 남은 작은 마을을 떠나 여러 곳을 여행하는 마술사의 삶에 호기심을 느끼는 소녀가 있다.
그래서 소녀는 마술사가 마을을 떠나던 날 아무도 몰래 그의 뒤를 따라 배에 탔고, 그렇게 두 사람의 동행이 시작됐다. 아버지와 딸처럼 소녀는 그에게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고, 이것도 먹고 싶고 여기도 들어가 보고 싶다며 졸라댄다. 소녀가 그럴 때마다 그는 슬쩍 남은 돈을 세어보곤 한다. 그리고 소녀에게 외투를, 구두를, 장신구를 사준다.
그 돈을 벌려고 그는 소녀가 잠든 사이 이곳저곳에서 자투리 일을 하지만 그마저도 이리저리 떼이고 쫓겨나기 일쑤다. 이런 사정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또 알 리도 없는 소녀는 쇼윈도를 기웃거리고 남자를 사귀며 점점 더 도시의 소녀가 돼간다.
무성영화 시절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과 어깨를 겨루던 프랑스 코미디언이 있다. 그의 이름은 자크 타티. 스포츠로 단련된 몸을 이용할 줄 알았던 그는 스포츠 팬터마임으로 뮤직홀에서 이름을 날린 스타였다. 특히 음향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일상의 소리를 영화에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다. 또한 대중적 슬랩스틱에 모더니즘을 가미한 새로운 코미디를 선보였다. 그는 상당히 뛰어난 재능으로 침묵과 중단이라는 대담한 코미디를 도입했고, 내면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지와 틈의 유머를 만들어냈다.
실뱅 쇼메 감독의 ‘일루셔니스트’는 바로 그 자크 타티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이제는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그 시절, 애잔함을 남기는 뒷모습에 대한 향수에 다름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오랜 전통에 빛나는 고몽영화사에서 트릭 전문기사로 일하던 에밀 콜은 무성영화에 다양한 실험적 요소를 대입하며 애니메이트 기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최초로 1분 18초짜리 애니메이션 ‘팡스스마고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애니메이션의 시초다. 콜의 뒤를 이어 프랑스에서는 훌륭한 애니메이터와 작품이 연달아 나왔다. ‘왕과 새’ ‘작은 병사’의 폴 그리모, ‘미개의 행성’ ‘강다하’의 르네 랄루, ‘프린스 앤 프린세스’ ‘키리투와 마녀’의 미셸 오슬로 등 내로라하는 애니메이터가 프랑스 애니메이션을 이어왔다.
그리고 쇼메가 있다. 1980년대부터 애니메이터로 일해온 그지만, 사실 장편 애니메이션 연출작은 많지 않다. 그의 작품 근간은 타티에 닿아 있는데, 대표작인 ‘벨빌의 세쌍둥이’가 그렇고 ‘일루셔니스트’ 또한 그렇다. 타티가 딸에게 보낸 편지를 바탕으로 만든 ‘벨빌의 세쌍둥이’에서 이미 그는 타티의 분신처럼 느껴진다. ‘일루셔니스트’는 타티의 원작 그대로 만든 작품인데 곳곳에 타티와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풀어놓음으로써 관객의 마음 한구석을 자극해 스스로 타티의 적자임을 대변한다. 타티가 ‘일루셔니스트’를 찍지 못한 이유는 주인공이 자신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라는 일설이 있다. 어쩌면 타티의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었던 사람은 쇼메가 아니었을까 싶다.
일루셔니스트. 그는 소녀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루셔니스트인 셈이다. 동전이 필요하다며 손을 내밀면 손가락을 튕겨 동전을 쥐어주는 마술사. 예쁜 코트가 탐나 진열장에 코를 대고 들여다보면 그 마음을 헤아려 코트를 사서 마술처럼 입혀주는 마술사. 어쩌면 소녀는 그가 진짜 마술로 이 모든 것을 충당한다고 착각했으리라. 그래서 소녀는 아무 부담 없이 마술사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 아닐까. 소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도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거리낌 없이 부모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받아내면서 그 어떤 심경의 헤아림도 없지 않았던가. 부모니까 마땅히 해줘야 한다는 듯. 소녀의 행동이 얄밉지만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그런 철없는 행동이 곧 우리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일루셔니스트’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영상에 애틋하고 쓸쓸한 마술사의 지난 시절을 보여준다. 걱정 가득한 기색이나 우울함 없이 담담하게 매일을, 일상을, 현재를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관객에게 애잔하게 다가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