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6년 12월 아랍에미리트(UAE)의 아부다비. 아시안컵 8강 경기 직전 선수들이 모였다. “더는 무너지면 안 된다. 그라운드에서 쓰러진다는 생각으로 뛰자.” 조별리그 성적은 1승 1무 1패.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간신히 8강에 올랐기에 태극전사들에겐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서정원, 고정운, 유상철, 홍명보 등 호화 멤버를 출격시키고도 중동의 축구강국 이란에 2대 6으로 대패했다. 이 경기는 한동안 ‘아부다비 쇼크’로 회자됐고, 4강 티켓을 얻는 데 실패한 박종환 감독은 귀국 직후 경질됐다.
#2. 2004년 7월 중국의 지난(濟南). ‘아부다비 쇼크’ 때와 같은 대회, 같은 시점에 같은 상대를 만났다. 아시안컵 8강에서 운명의 장난처럼 이란과 맞붙었다. 당시 우리 대표팀을 이끈 요하네스 본프레러 감독은 경기 직전 “1996년 대회 결과를 잘 안다. 이번엔 결과가 반대로 나올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태극전사들은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3골을 넣었지만 이란의 간판 알리 카리미에게 해트트릭을 내주며 3대 4로 무릎을 꿇었다. 이어 벌어진 동아시아 대회에서도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 본프레러 감독은 그대로 지휘봉을 내려놨다.
아시아 최강을 자부하는 한국 축구지만 숨기고 싶은 추억이 있다. 하나는 아시아경기대회. 1986년 서울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이후 금맥이 뚝 끊겼다. 최근 광저우 대회 준결승에서도 UAE에 앞선 경기를 펼치다 종료 직전 불의의 일격을 허용해 0대 1로 패했다. 하지만 아시안게임을 뛰어넘는 ‘잊고 싶은 추억’이 있다. 바로 아시안컵. 1956년 홍콩에서 열린 1회 대회와 1960년 한국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한 뒤 한 번도 우승컵을 들지 못했다. 2011년 1월 카타르 아시안컵은 51년 만에 우승컵에 도전하는 무대다.
1990년 이후 두 차례 3위에 그쳐
아시안컵 역사는 그야말로 시련의 세월이다.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한국이지만 아시안컵에선 3차례(1968년, 1976년, 1992년 대회)나 본선에도 오르지 못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엔 2차례 3위를 차지한 게 최고 성적. 월드컵 4강 신화의 후광을 업고 자신만만하게 나선 2003년 아시안컵 예선에선 약체 베트남과 오만에 각각 0대 1, 1대 3으로 무릎을 꿇으며 ‘오만 쇼크’란 말이 생겼다. 라이벌 일본이 1990년대 이후 3차례 정상을 밟은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이 무관으로 고개를 숙이는 동안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각각 3차례 우승컵을 들었다. 한국은 아시안컵 본선 첫 경기 징크스도 갖고 있다. 본선에 10번 올랐으나 첫 경기 성적이 2승 7무 1패로 부진하다.
이번엔 다행히 분위기는 좋다. 한준희 KBS해설위원은 “과거 아시안컵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은 준비 부족이었다. 아시아 무대를 만만히 봤기 때문에 늘 대표팀 내 긴장감이 떨어졌다”고 했다. 이번엔 다르다는 평가다. 진작부터 아시안컵을 대비했다. 조광래 대표팀 감독은 “선수 구성, 전략 모두 준비를 마쳤다. 약간의 모자람도 없이 준비해 최상의 전력으로 대회에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선수들의 의지도 남다르다. 박지성(29·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은 “이제 아시안컵 정상에 오를 때가 됐다. 우승만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특히 신구 조화가 잘된 이번 조광래호(號)는 역대 아시안컵 대표팀 중 최상의 전력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동안 한국은 아시안컵에서 번번이 ‘중동 징크스’에 울었다. 1996년 대회 이후 늘 중동 팀에 발목을 잡혀 탈락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는 4차례 맞붙어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고, 이란에도 고비마다 발목을 잡혔다. 게다가 이번 대회 개최지는 중동인 카타르.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대회가 중동 징크스를 탈출할 최적의 기회”라고 입을 모은다. 박문성 SBS해설위원은 “지난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중동 팀들이 모두 예선에서 떨어졌다. 최근 20년 동안 지금만큼 중동 팀의 기세가 떨어졌던 시점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서형욱 MBC해설위원도 “최근 월드컵 대회 예선 등을 거치면서 태극전사들의 중동 원정 징크스가 없어졌다”며 “이영표(33·알 힐랄), 이정수(30·알 사드), 조용형(27·알 라이안) 등 대표팀 주축 선수들이 중동에서 뛴다는 점도 중동 축구 적응력을 높이는 데 호재”라고 전했다. 또 “카타르와 유럽의 시차는 2시간에 불과하다. 유럽파가 많은 한국 축구에 좋다”는 시각도 내놓았다. 당근도 충분하다. 대한축구협회는 진작 “아시안컵에서 우승할 경우 아시안컵 사상 최고액의 포상금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협회는 물론 프로 구단들도 이번 대회를 앞두고 이례적으로 대표팀에 전권을 위임한 상태다.
아시안컵은 한국 대표팀 감독들의 무덤으로 불린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대 대표팀 감독 가운데 아시안컵을 무사히 넘긴 이를 찾기 힘들다. 이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조 감독이다. 그는 “아시안컵에 대한 부담감이 상상 이상이다. 아시안컵 징크스도 부담스럽지만 잘하면 본전이란 시선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조 감독이 믿을 구석은 태극전사들밖에 없다. 그가 일찌감치 대표팀을 소집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옥석 고르기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키플레이어는 역시 박지성
그렇다면 아시안컵 최종엔트리(23명)에 뽑힌 선수 중 최고의 ‘믿을 맨’은 누구일까. 프로축구 감독 8명을 상대로 대표팀 키플레이어가 누군지 물어봤다. 감독마다 1~3위까지 3명을 선택해 1위에 3점, 2위에 2점, 3위에 1점을 부여해 점수를 합산한 결과, 최고 ‘믿을 맨’은 역시 16점을 얻은 ‘캡틴’ 박지성. 허정무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은 “공수의 핵인 지성이는 어떤 전략을 쓰더라도 대표팀의 무게중심”이라며 “그가 뛴다는 것만으로 다른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정해성 전남 드래곤즈 감독은 “이번 아시안컵이 지성이에겐 대표팀에서 뛰는 마지막 무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동기부여가 확실한 만큼 필요할 때 꼭 해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2위는 11점을 얻은 스트라이커 박주영(25·AS 모나코). 박경훈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은 “경험, 기술, 폭발력 등을 종합할 때 대표팀에서 박주영보다 나은 공격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 “아시안컵 같은 무대는 선제골이 언제 터지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핵심 스트라이커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측면공격수 이청용(22·볼턴)은 8점으로 3위에 올랐다. 윤성효 수원 삼성 감독은 “현재 대표팀에서 가장 기복이 없는 선수가 이청용”이라며 “아시아권에선 그의 측면 돌파를 막을 수비수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양박쌍용’의 나머지 한 축인 기성용(21·셀틱)은 5점으로 4위. 김호곤 울산 현대 감독은 “중원 점유율을 중요시하는 조 감독의 전술상 중앙에서 공수를 조율하는 기성용의 어깨가 무겁다. 최근 소속팀에서도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있는 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앙수비수 이정수는 4점으로 5위에 올랐다. 신태용 성남 일화 감독은 “공격과 수비의 경계를 허문 조광래식 ‘토털 축구’에서 공격수 출신의 ‘골 넣는 수비수’ 이정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고 이유를 들었다. 이 밖에 ‘투톱’ 공격수 체제로 갈 경우 박주영의 파트너로 낙점될 가능성이 높은 공격수 지동원(19·전남)과 든든한 수문장 정성룡(25·성남)은 각각 2표로 공동 6위를 차지했다. 기회를 등에 업은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이 다시 한 번 포효할 수 있을까.
#2. 2004년 7월 중국의 지난(濟南). ‘아부다비 쇼크’ 때와 같은 대회, 같은 시점에 같은 상대를 만났다. 아시안컵 8강에서 운명의 장난처럼 이란과 맞붙었다. 당시 우리 대표팀을 이끈 요하네스 본프레러 감독은 경기 직전 “1996년 대회 결과를 잘 안다. 이번엔 결과가 반대로 나올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태극전사들은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3골을 넣었지만 이란의 간판 알리 카리미에게 해트트릭을 내주며 3대 4로 무릎을 꿇었다. 이어 벌어진 동아시아 대회에서도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 본프레러 감독은 그대로 지휘봉을 내려놨다.
아시아 최강을 자부하는 한국 축구지만 숨기고 싶은 추억이 있다. 하나는 아시아경기대회. 1986년 서울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이후 금맥이 뚝 끊겼다. 최근 광저우 대회 준결승에서도 UAE에 앞선 경기를 펼치다 종료 직전 불의의 일격을 허용해 0대 1로 패했다. 하지만 아시안게임을 뛰어넘는 ‘잊고 싶은 추억’이 있다. 바로 아시안컵. 1956년 홍콩에서 열린 1회 대회와 1960년 한국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한 뒤 한 번도 우승컵을 들지 못했다. 2011년 1월 카타르 아시안컵은 51년 만에 우승컵에 도전하는 무대다.
1990년 이후 두 차례 3위에 그쳐
아시안컵 역사는 그야말로 시련의 세월이다.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한국이지만 아시안컵에선 3차례(1968년, 1976년, 1992년 대회)나 본선에도 오르지 못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엔 2차례 3위를 차지한 게 최고 성적. 월드컵 4강 신화의 후광을 업고 자신만만하게 나선 2003년 아시안컵 예선에선 약체 베트남과 오만에 각각 0대 1, 1대 3으로 무릎을 꿇으며 ‘오만 쇼크’란 말이 생겼다. 라이벌 일본이 1990년대 이후 3차례 정상을 밟은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이 무관으로 고개를 숙이는 동안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각각 3차례 우승컵을 들었다. 한국은 아시안컵 본선 첫 경기 징크스도 갖고 있다. 본선에 10번 올랐으나 첫 경기 성적이 2승 7무 1패로 부진하다.
이번엔 다행히 분위기는 좋다. 한준희 KBS해설위원은 “과거 아시안컵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은 준비 부족이었다. 아시아 무대를 만만히 봤기 때문에 늘 대표팀 내 긴장감이 떨어졌다”고 했다. 이번엔 다르다는 평가다. 진작부터 아시안컵을 대비했다. 조광래 대표팀 감독은 “선수 구성, 전략 모두 준비를 마쳤다. 약간의 모자람도 없이 준비해 최상의 전력으로 대회에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선수들의 의지도 남다르다. 박지성(29·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은 “이제 아시안컵 정상에 오를 때가 됐다. 우승만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특히 신구 조화가 잘된 이번 조광래호(號)는 역대 아시안컵 대표팀 중 최상의 전력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동안 한국은 아시안컵에서 번번이 ‘중동 징크스’에 울었다. 1996년 대회 이후 늘 중동 팀에 발목을 잡혀 탈락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는 4차례 맞붙어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고, 이란에도 고비마다 발목을 잡혔다. 게다가 이번 대회 개최지는 중동인 카타르.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대회가 중동 징크스를 탈출할 최적의 기회”라고 입을 모은다. 박문성 SBS해설위원은 “지난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중동 팀들이 모두 예선에서 떨어졌다. 최근 20년 동안 지금만큼 중동 팀의 기세가 떨어졌던 시점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란은 아시안컵에서도 번번이 한국의 발목을 잡았다. 2007 아시안컵 예선리그 B조 3차전 한국과 이란 경기에서 후반 동점골이 터지자 환호하는 이란 감독과 선수들.
아시안컵은 한국 대표팀 감독들의 무덤으로 불린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대 대표팀 감독 가운데 아시안컵을 무사히 넘긴 이를 찾기 힘들다. 이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조 감독이다. 그는 “아시안컵에 대한 부담감이 상상 이상이다. 아시안컵 징크스도 부담스럽지만 잘하면 본전이란 시선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조 감독이 믿을 구석은 태극전사들밖에 없다. 그가 일찌감치 대표팀을 소집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옥석 고르기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키플레이어는 역시 박지성
그렇다면 아시안컵 최종엔트리(23명)에 뽑힌 선수 중 최고의 ‘믿을 맨’은 누구일까. 프로축구 감독 8명을 상대로 대표팀 키플레이어가 누군지 물어봤다. 감독마다 1~3위까지 3명을 선택해 1위에 3점, 2위에 2점, 3위에 1점을 부여해 점수를 합산한 결과, 최고 ‘믿을 맨’은 역시 16점을 얻은 ‘캡틴’ 박지성. 허정무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은 “공수의 핵인 지성이는 어떤 전략을 쓰더라도 대표팀의 무게중심”이라며 “그가 뛴다는 것만으로 다른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정해성 전남 드래곤즈 감독은 “이번 아시안컵이 지성이에겐 대표팀에서 뛰는 마지막 무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동기부여가 확실한 만큼 필요할 때 꼭 해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2위는 11점을 얻은 스트라이커 박주영(25·AS 모나코). 박경훈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은 “경험, 기술, 폭발력 등을 종합할 때 대표팀에서 박주영보다 나은 공격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 “아시안컵 같은 무대는 선제골이 언제 터지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핵심 스트라이커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측면공격수 이청용(22·볼턴)은 8점으로 3위에 올랐다. 윤성효 수원 삼성 감독은 “현재 대표팀에서 가장 기복이 없는 선수가 이청용”이라며 “아시아권에선 그의 측면 돌파를 막을 수비수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양박쌍용’의 나머지 한 축인 기성용(21·셀틱)은 5점으로 4위. 김호곤 울산 현대 감독은 “중원 점유율을 중요시하는 조 감독의 전술상 중앙에서 공수를 조율하는 기성용의 어깨가 무겁다. 최근 소속팀에서도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있는 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앙수비수 이정수는 4점으로 5위에 올랐다. 신태용 성남 일화 감독은 “공격과 수비의 경계를 허문 조광래식 ‘토털 축구’에서 공격수 출신의 ‘골 넣는 수비수’ 이정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고 이유를 들었다. 이 밖에 ‘투톱’ 공격수 체제로 갈 경우 박주영의 파트너로 낙점될 가능성이 높은 공격수 지동원(19·전남)과 든든한 수문장 정성룡(25·성남)은 각각 2표로 공동 6위를 차지했다. 기회를 등에 업은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이 다시 한 번 포효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