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첫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다. 중고교와 대학교 때도 별로 나지 않던 여드름이 입사 이후 야근과 마감 스트레스로 우후죽순 솟아나자, 기자 역시 피부과와 성형외과가 함께 있는 병원을 찾았다. 2000년대 초 유행하던 필링과 레이저 치료인 IPL 패키지를 받고자 처음으로 100만 원이라는 거금을, 그것도 카드 6개월 할부로 긁었다. 이후 조금조금 얼굴을 다듬기 위해 카드를 꺼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여기서 잠깐. “필링이나 IPL도 성형수술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보통 성형외과에서 이뤄지는 수술은, 실상 시술인 경우가 많다. 시술은 진료실에서 국소마취를 한 후 이뤄지는 소규모의 행위를, 수술은 수술실에서 수면마취를 한 후 이뤄지는 큰 규모의 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어 쌍꺼풀을 만들거나 광대뼈 부위를 깎는 게 수술에 속한다면, 보톡스나 필러, 필링, 칵테일 주사 등은 시술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여성 중 성형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 듯.
‘압구정 다이어리’ ‘블링블링’ ‘셀러브리티’ 등 젊고 트렌디한 ‘칙릿’ 소설로 인기를 끈 정수현(29) 작가가 최근 내놓은 신작 ‘페이스 쇼퍼’(자음과 모음)는 우리나라 대다수 여성과 함께해온 성형수술을 정면에서 다뤘다. ‘페이스 쇼퍼’, 즉 ‘얼굴을 쇼핑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처럼 주인공인 성형외과 여의사 정지은을 찾는 ‘쇼퍼’들과 성형외과 브로커, 온라인 성형카페 등을 통해 성형이라는 소재를 다각도로 접근했다. 그런데 12월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작가는 정작 성형수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수면마취와 무시무시한 피주사의 추억
“겁이 너무 많아서 성형수술은 생각도 못해봤어요. 물론 간단한 시술은 한 적이 있지만요. 사실 아주 살짝 턱을 깎고 싶은데, 소설을 준비하면서 성형수술에 대해 알아가다 보니 못하겠더라고요. 특히 뼈를 깎는 양악 수술이나 안면윤곽 수술은 정말 위험천만하거든요.”
정 작가는 이번 소설을 쓰는 동안 성형외과에 살다시피 하면서, 지인이었던 성형외과 ‘원장님들’과 ‘절친’이 됐다. 출간에 앞서 ‘절친 원장님’들의 감수를 받은 덕분에 성형수술에 대한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고 치밀하다. 초콜릿 복근 성형, 애교살 성형, 쁘띠 성형, 피주사, 피세탁, 칵테일 주사, 페이스 리프트 업, 제스너 필링, 가슴 성형 등 소설을 읽는 내내 쏟아져 나오는 각종 성형수술 및 시술법은 읽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다. 실제로 정 작가는 이런 성형수술을 받은 환자를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많았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수면마취였어요. 깨어날 때쯤 되면 횡설수설하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죠. 마치 술 취한 사람 같아요. 한 환자분은 엉엉 울면서 ‘안주 달라’고 하더군요. 피주사도 쇼킹했어요. 물론 영화 ‘카운테스’처럼 타인의 피를 주사하는 건 아니고요(‘카운테스’는 처녀를 납치, 살인해 그 피로 목욕하는 살인마 백작부인을 다룬 작품). 자신의 피를 뽑아서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려, 이 가운데 혈소판이 풍부한 층만 분리해 다시 피부에 주입하는 거죠. 그렇다고 해도 피부를 위해 피를 뽑고, 이를 다시 주사한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어요. 지금도 피주사는 동네 성형외과나 피부과에서도 시술할 정도로 인기라고 해요. 물론 이름은 ‘피주사’가 아니지만요.”
다음 작품은 조선시대 노는 젊은이들
정 작가는 “성형외과 원장과 연예인의 관계가 무척 흥미로웠다”고 털어놓았다. 또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각각의 연예인 에피소드는 그가 소설가 데뷔 전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접한,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조합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소설 중 나오는 연예인은 특정인을 모델로 한 것은 전혀 아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주요 인물인 ‘고보경’에 대해 벌써 독자들이 특정 연예인을 지목하고 있어요.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제가 보고 겪은 사례들을 적절히 녹여낸 것뿐이죠. 그런데 성형외과 원장님과 연예인 관계는 마치 헤어, 의상 디자이너와 연예인 관계 같아요. 소설에 한 가수가 발라드를 부를 때는 부드러운 인상으로, 댄스곡을 부를 때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상으로 얼굴을 조금씩 고쳐달라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거든요. 한번은 성형외과 원장님이 ‘얼굴이 머리카락이니? 풀었다가 묶었다가 하게’라고 푸념하시더군요. 어쨌든 연예인들이 미용실이나 의상실 가듯 성형외과에 오고, 원장님들과 속사정까지 털어놓을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 건 사실이에요.”
정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공상을 좋아하는 소녀였다고 한다. 여기엔 장난기 많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엄마는 지금 선녀인데, 하늘로 올라가면 안 되니 동생을 낳을 때까지 선녀 옷을 보관해야 한다”며 어린 딸을 속이곤 했다. 그는 아버지의 말처럼 열 살이 되면 아름다운 공주로 변하는 요술지팡이가 생길 줄 알았다. 또 어렸을 때는 하루 종일 만화방에서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렇게 공상과 만화를 통해 쌓은 자양분은 그가 작가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문예창작과 출신인 정 작가는 원래 순수문학 지망생이었지만 은사인 소설가 박범신 교수가 대중문학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조언을 해줬다. 이후 공모전을 통해 ‘논스톱 5’ 방송작가로 데뷔했고, 톡톡 튀는 ‘칙릿’ 소설을 주로 써왔다. 그의 아이디어 창고는 바로 친구들과의 수다. 데뷔작인 ‘압구정 다이어리’ 역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압구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설로 쓰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했고, 다음 날 바로 실천에 옮겼다.
“출판사에 기획안을 보냈죠.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내 기획안을 보지 않으면 후회할 거다’라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많은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정말 소설을 쓰게 됐죠. 이번에도 친구들과 수다 떨면서 자연스럽게 성형 이야기가 나왔고, 이를 소설로 옮겼죠. 사실 이 소설을 쓰기 전 ‘한양 다이어리’라는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거든요. 조선시대 그림을 보다가, 당시에도 있었을 ‘노는 젊은이’들의 ‘핫’한 삶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자 주인공 이름은 신청담, 남자 주인공 이름은 이태원으로 정했고요. 데이트는 별다막(茶幕)이나 콩다막에서 하죠. 조만간 이 작품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페이스 쇼퍼’는 출간 한 달여밖에 안 됐지만 각종 온·오프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또 이미 중국에 판권이 팔려 2011년 초 출간될 예정이다. 현재 최근 드라마 작업에 들어간 본인 소설 ‘셀러브리티’의 각본을 집필 중이다. 드라마 데뷔작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페이스 쇼퍼’도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비쳤다. 그렇다면 정 작가가 생각하는 성형이란 과연 뭘까.
“중독되지 않고, 남용하지 않는다면 성형은 21세기가 여성에게 준 최고의 무기가 아닐까요? 하긴 이제는 여성만은 아니지만요. 호호. 갈수록 성형수술 기술이 좋아져, 더욱 자연스럽고 부작용 없는 성형이 가능해지고 있어요. 성형 자체는 나쁜 게 아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제대로 시술, 또는 수술을 해야죠. 그래서 모두가 ‘아름다운 행복’을 가진다면 정말 좋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