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온 워홀러들이 주로 공부하는 호주의 대학.
호주 청년실업률은 한국의 2.5배에 이를 뿐 아니라 세계 평균보다 월등히 높다. 8월 13일자 호주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호주 청년실업률이 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어서 지구촌 젊은이들이 아예 직업 찾기를 포기하는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고자 호주로 몰려오고 있다. 그러나 호주의 청년 일자리도 ‘흥부네 이불’ 같아서 모두가 따뜻하게 덮을 수 없다. 호주 젊은이들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한국의 워홀러들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보고 있다. 워홀러는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의 한국식 표현으로 ‘일해서 돈도 벌고, 그 돈으로 영어 공부와 호주 여행도 한다’는 ‘환상적인 비자’를 지닌 사람을 뜻한다. 2009년 3만9505명이 호주로 입국했는데 이는 총 11개국으로 나가는 한국 워홀러 전체 인원 5만2956명의 74.5%다.
글로벌 취업 연수 지원사업
이런 호주 집중 현상은 한-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 발급 수(쿼터)가 무제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호주는 영어권 국가이고 10만 명 넘는 한인동포가 살고 있어 비교적 정착과 일자리 찾기가 쉬울 것이라는 기대도 한몫을 한다. 그 결과 지금 시드니 중심가는 한국 워홀러로 만원이다.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공단(이하 인력공단)은 청년실업 해결책의 일환으로 ‘글로벌 취업 연수 지원사업’ 프로그램을 운용한다. 프로그램은 “글로벌 인재 양성과 국내 미취업 청년층의 해외취업을 돕기 위해 민간 연수기관을 선정해서 영어교육 및 기술교육을 하도록 지원한다”는 취지다. 외국 젊은이가 호주 이민부로부터 단기취업 비자를 획득할 가능성은 아주 적다. 반면 직업을 갖는다는 점에서 취업 비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워홀러 비자는 쉽게 받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인력공단의 지원을 받아 호주로 오는 연수생들도 취업 비자가 아닌 워홀러 비자를 활용한다. 마치 파생상품처럼 운용되는 셈이다.
11월 초 한-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 협정 15주년을 맞아 (사)국제교류증진협회 김창수 회장과 외교통상부의 위임을 받아서 협회가 개설한 ‘워킹홀리데이 인포센터’ 이상현 호주 담당 직원 등이 현장 실태조사차 호주를 방문했다. 이들은 11월 5일 ‘워킹홀리데이 서포팅센터’에서 열린 ‘호주 워킹홀리데이 유관기관 간담회’에 참석해 ‘글로벌 취업 연수 지원사업’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청취했다. 이 자리에서 김창수 회장은 “글로벌 취업 연수 지원사업 프로그램을 운용하면서 워홀러 비자를 활용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며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이기 때문에 시스템의 투명성과 운영의 공정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호주 현실은 그와 딴판으로 드러났다.
시드니 ‘워킹홀리데이 서포팅센터’ 김석민 소장은 “인력공단의 발상부터가 잘못됐다. 워홀러 비자의 본래 취지는 상대국과의 문화교류 차원이지 직업교육이나 돈벌이가 아니다. 돈을 벌 목적이라면 당연히 취업 비자를 받아서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도 10월 15일 인력공단 국정감사에서 “지난 3년간 인력공단이 해외취업 지원사업에 쏟아부은 돈이 400억 원인 데 반해 실제로 취업한 경우는 3031명에 불과해 1인당 1200만 원이나 소요됐다”고 지적했다.
부적격 연수기관 선정도 사업 부실화의 주원인으로 꼽힌다. 2009년 해외취업률 0%를 기록한 연수기관이 84개나 돼 전체 기관의 83%를 차지했다. 이런 문제를 인식해 인력공단 관계자도 11월 4일 호주를 방문해 유학원 등 중개업체와 연수생들의 취업현장을 둘러보았다.
높은 청년실업률로 고심하는 호주이기에 워홀러의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1 청년실업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대규모 거리시위. 2 일자리를 위협받는 호주 간호사들의 파업 현장.
호주의 글로벌 취업 연수 지원사업의 큰 흐름은 이렇다. 인력공단이 연수 희망자를 모집해 공단이 선정한(1차 계약) 교육센터에서 6개월 동안 어학연수와 직업교육을 받게 한다. 인력공단은 이 수업료의 대부분을 지급한다. 연수 희망자는 워홀러 비자를 받아서 호주로 입국한다. 이는 호주에서 일하면서 공부도 한다는 측면에서 일반 워홀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력공단이 연수생의 호주 정착을 돕고 직업을 알선해주는 유학원 등 중개업자를 선정해(2차 계약) 사후관리를 위탁한다는 점이 다르다. 호주에 도착한 뒤 연수생들은 중개업자의 도움을 받아 어학연수와 직업교육을 받거나 일자리를 얻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김석민 소장은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1차 계약의 문제점과 마찬가지로 호주 현지에서 이뤄지는 2차 계약도 부적격 중개업자가 선정되는 경우가 많다. 사무실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업체가 인력공단 대행 에이전트인 것처럼 허위과장 광고를 해서 일을 따낸 뒤,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업체를 소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폭로했다. 이뿐이 아니다. 호주 현지의 중개업자들이 얼토당토않은 직업을 소개해준 대가로 취업성과급까지 챙기고 있는 것이다. 막대한 국가 예산에 해당 연수생의 연수 본인 부담액, 항공료, 체류비 등 자비 부담도 만만찮은데 상당한 수의 연수생이 일자리를 얻지 못해 다시 ‘워킹홀리데이 서포팅센터’를 찾아온다. 배관공 훈련을 받은 사람이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허송세월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주(駐)시드니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채홍호 부총영사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주 현지 직업 알선 유학원과 중개업체의 건실성 및 능력을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총영사관에 검증을 요청한 사례가 없다”고 밝혔다. 총영사관 측은 현장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업체의 말만 믿고 취업성과급을 미리 지불하는 대신, 호주 당국으로부터 임금 지불을 확인한 다음 성과급을 지불하는 ‘책임 후불제’를 실시하면 국가 예산의 낭비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최근 글로벌 취업 연수 지원사업 프로그램으로 호주에 도착한 한 청년은 한인동포신문 기고를 통해 “연수기관에서 들은 말과 호주 현지 상황이 너무 다르다. 무엇보다 시드니의 물가와 거주 비용이 엄청나게 비싼데 내게 제시되는 임금 조건은 터무니없이 낮다. 아무 근거도 없이 무지갯빛 환상만 심어준 연수기관이 원망스럽다”고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왼쪽)호주 달러의 상승으로 관광객이 줄어 한가한 시드니 달링하버. (오른쪽)워킹홀리데이 서포팅센터 김석민 소장.
‘호주한인타일협회’ 신현돈 총무도 “인력공단에서 운영하는 글로벌 취업 연수 지원사업에 참여하는 호주 유학원과 알선 중개업자의 과대과장 광고의 문제점이 크다”며 “회사의 주소조차 알리지 않고 달랑 휴대전화 번호만 밝히면서 인력공단의 이름과 로고가 들어간 광고를 내는가 하면, 검증되지 않은 일자리를 알선해 저임금 등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폭로했다. 여기에 인력공단 프로그램의 자격요건이 엄격하지 않아 기초 영어실력조차 갖추지 않은 청년들이 호주에 오는 것도 문제다. 호주에서 10주간 어학연수를 받는다고 영어실력이 크게 느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어학연수 후 직업교육을 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해들은 ‘워킹홀리데이 인포센터’ 이상현 호주 담당은 “무자격 연수기관을 꾸준히 실태조사해 워홀러들의 피해사례를 줄이고, 피해사례가 신고된 기관에는 법적 제재 등을 하는 재발 방지 노력이 필요하다”며 “6개월 정도 연수를 받고 호주에 와도 본인이 원하는 일자리를 찾거나 직업교육을 받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현실을 고려해 어학 기준을 강화하는 등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력공단이 한국의 청년실업 문제를 개선하고자 글로벌 취업 연수 지원사업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발상이다. 하지만 국가기관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편법으로 활용한다는 의혹과, 연수기관 선정과 호주의 중개업자를 선정하는 과정이 부실하다는 지적은 하루빨리 풀어야 할 대목이다. 한국에서 상처받은 청년들이 ‘먼 곳’ 호주에서 또다시 절망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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