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음악계는 조앤 서덜랜드의 빈자리를 조수미가 메울 것이라고 믿는 분위기다.
10월 10일 호주의 ‘인간문화재’라 할 수 있는 서덜랜드가 83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이날 이후 호주 국민들은 큰 상실감에 빠졌다. 줄리아 길라드 총리가 나서서 “조앤은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호주 국민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말로 국민을 위로했다. 11월 9일 오페라하우스에서는 연방총독과 연방총리가 참석한 국장이 열렸다. 1990년 11월 서덜랜드는 바로 이 장소에서 은퇴 공연을 한 바 있다. 필자 또한 이 공연을 관람했는데, 마지막 앙코르곡으로 ‘Home sweet home’을 부를 때 많은 청중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경쟁 상대는 카나리아
지금 호주 음악계는 상중(喪中)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서덜랜드의 장례식은 그의 일생을 정리하는 음악회 형식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서덜랜드를 이어갈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고민은 1990년 그가 은퇴한 순간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디바(음악의 여신)는 매뉴팩처(manufacture·공장제 수공업) 되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 서덜랜드 은퇴 후부터 호주 음악계가 조수미에게 눈길을 주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수미는 엄연한 ‘코리안 디바’다. 그동안 호주에서 조수미 독창회가 자주 열렸다. 조수미가 타이틀 롤을 맡은 도니체티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지난 9월 퍼스에서 조수미 독창회가 열렸고 머지않아 멜버른에서 독창회가 열릴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호주에 조수미의 팬이 유난히 많기도 하지만 그가 서덜랜드의 대를 잇기를 바라는 호주 음악계의 뜻일 가능성도 있다.
서덜랜드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소프라노 유령’이라고 불렸다. 그가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광란의 아리아’를 부를 때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목소리를 냈기 때문. 서덜랜드는 목소리를 마치 악기처럼 자유자재로 컨트롤한다고 소문났다. 화려한 음색과 현란한 기교로 인간 내면세계에 웅크리고 있는 광기를 불러내 청중을 비탄에 젖게 한다는 원망을 듣기도 했다. 그는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하는 다른 소프라노에겐 공포와 저주의 대상이었다. 유령을 뛰어넘는 실존은 없는 것일까? 내로라하는 소프라노들이 ‘소프라노 유령’ 앞에서 처절한 패배감을 맛보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레 주눅이 들어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덜랜드의 경쟁 상대는 다른 소프라노가 아닌 ‘노래하는 새’ 카나리아였고, 금속성 고음으로 섬세한 떨림을 표현하는 ‘금관악기의 소프라노’ 플루트였다. 그는 “새도 저렇게 아름다운 트릴(떨림)을 하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라고 말하는가 하면 “사람이 최고의 악기라는 걸 오케스트라 앞에서 증명해 보이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서덜랜드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여섯 살 생일날,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인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집안에는 늘 음악이 흘렀다. 서덜랜드의 어머니는 아마추어 메조소프라노였다. 어린 서덜랜드는 어머니의 노래를 흉내 내면서 음계를 익혔고 노래하는 즐거움을 깨쳤다. 피아노도 어머니한테서 배웠다. 가난 때문에 16세에 학업을 중단한 서덜랜드가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었던 것도 음악 덕분이었다. 유럽 진출을 모색하면서 여행 경비를 모으던 중 콩쿠르에 우승해 장학금을 받았다. 같은 시기에 런던엔 시드니 태생의 젊은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서덜랜드의 생애와 성악가로서의 운명을 바꿔준 지휘자 겸 오페라 감독 리처드 보닝이 바로 그였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서 서덜랜드에게 새로운 음악 세계가 열렸다. 보닝은 다이내믹 소프라노를 목표로 바그너 오페라에 도전하던 서덜랜드에게 19세기 벨칸토 오페라를 권유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나중에 보닝은 “선생들은 하나같이 다이내믹 소프라노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더 크게 부르는 것만 강조하다가 어렵사리 정상에 오른 뒤 더는 소리를 낼 수 없어 은퇴하는 소프라노가 부지기수였다. 나는 그런 식으로 매뉴팩처가 되는 소프라노를 원치 않았다. 타고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게 훨씬 좋았다”고 회상했다.
고음 영역 자유자재로 구사
조앤 서덜랜드와 지휘자 리처드 보닝 부부. 전성기인 1970년대 찍은 사진이다.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이 엄청난 소프라노를 발견했다며 나를 오페라극장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육군 상사처럼 덩치가 큰 여성이 억센 호주 영어 발음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했는데, 몇 소절 부르지 않아 나는 음악의 여신을 만났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마이 갓, 마리아 칼라스한테 큰 어려움이 생기겠다’고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제피렐리의 소개로 서덜랜드 노래를 들은 칼라스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존중해주면서 벨칸토 오페라의 중흥을 위해 협력했다.”
루치아 역으로 런던에서 각광을 받던 서덜랜드는 보닝의 권유로 1960년에 벨칸토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로 갔다. 그곳에서의 데뷔 무대는 베니스 오페라극장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칼라스 은퇴 이후 벨칸토 오페라를 공연해줄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학수고대했다. 서덜랜드의 노래를 처음 들어본 이탈리아 청중은 “경이로운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탄생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이탈리아 데뷔 무대를 취재한 영국 ‘가디언’의 노엘 굿윈 기자는 청중 사이로 들려온 ‘경이로운 사람(La Stupenda)’이라는 단어를 기사 제목으로 삼았다. 서덜랜드의 별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얻은 또 다른 소득은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만난 것이다. 그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파바로티는 서덜랜드의 상대역을 맡아 스타로 발돋움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하이 C의 황제’와 ‘하이 F샤프의 여왕’의 전성시대를 여는 전조였다. 서덜랜드가 ‘하이 F샤프’를 뽑아냈기 때문이다.
‘소프라노의 유령’은 30년 동안 건재했다. 그러나 2003년 1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2003년 오페라 시즌 개막 공연 탓이기도 했지만 세계적으로 성가를 높이던 조수미가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주인공 루치아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 배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서덜랜드의 고향 무대에 조수미가 섰다.
9일간의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청중의 뜨거운 반응은 물론 호주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조수미는 기품이 넘치는 모습으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완벽한 테크닉을 선보였다. 호주의 우상인 서덜랜드와 견줄 만한 충분한 자격을 지녔다”고 보도했으며 ‘데일리 텔레그래프’도 “광란의 장면에서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는 평을 게재했다. ‘디 오스트레일리안’은 “그는 루치아의 악명 높은 광란의 장면 마지막에서 ‘하이 E플랫’까지 올라갔다”고 소개하며 “그가 과연 우리의 서덜랜드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다음 “한국의 디바 조수미한테는 ‘예스’라고 말하고 싶다”고 썼다.
2003년 조수미 공연에 열광
서덜랜드가 오페라하우스에서 한 수많은 공연 가운데 1980년에 맡은 루치아 역은 지금도 많은 오페라 팬의 입에 오르내린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이 신들린 듯 광란의 장면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공연을 보다 실신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한편 서덜랜드의 남편 보닝과 조수미의 인연은 꽤나 깊다. 조수미의 첫 솔로 앨범 ‘카르나발’을 녹음할 때 보닝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역시 최초의 실황 앨범인 미국 카네기홀 공연도 보닝의 지휘였다. 그뿐이 아니다. 아당의 오페라 ‘투우사’와 오베르의 오페라 ‘검은 망토’를 비롯해 마이어베어의 ‘디노라’ 전곡도 보닝의 지휘로 녹음했다.
서덜랜드의 타계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호주 음악계에서는 조수미가 서덜랜드의 대를 이어갈 것이라고 믿는 분위기다. 최근 오페라극장 명칭을 ‘조앤 서덜랜드 극장’으로 바꾼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머지않아 ‘조앤 서덜랜드 극장’에서 조수미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