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0시 45분, 우리 국민의 시선은 지방선거 결과에 집중돼 있었다. 그 시각 평양 거리에서 한 80세 노인의 심장이 멈췄다. 6월 3일 오전 우리 국민은 지방선거 성적표를 받아든 정치인들 얼굴을 보며 한국을 이끌 차기 지도자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북한 인민은 새벽 평양 거리에서 숨을 거둔 주인공이 북한의 실력자 이제강 조직지도부 부부장임을 알았다.
그러나 북한이 이제강의 사망을 공식 발표하기 전인 3일 새벽에 이미 일본의 여러 언론인이 필자에게 e메일로 “이제강이 죽은 것 같은데 교통사고냐, 정치적 타살이냐”는 질문을 했다. 일본 기자들이 이 같은 질문을 던진 이유는 지난해 발표한 논문 때문이다. 필자는 2009년 12월 14일 한 학술세미나에서 북한 군부 내부에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으며, 투쟁 진영의 중심에 장성택과 이제강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군부 핵심인사 26인을 정치 배경과 승진 시기를 고려해 ‘장성택계’와 ‘이제강계’로 구분했다. 우연하게도 이제강이 사망한 후인 6월 7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서 장성택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며 실질적인 2인자임을 내외에 과시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정부와 집권자가 정보를 철저히 통제할 수 있는 북한체제에서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던 한 사람이 사망하고, 한 사람은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는 사실은 수많은 정치적 억측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다음 몇 가지 정황을 근거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 장성택과 이제강은 북한 권력구도에서 ‘제로섬’의 관계였는가, 아니면 ‘윈-윈 관계였는가’다. 양자는 제로섬의 관계였다. 장성택이 혹독한 정치적 시련을 겪었던 시기인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제강은 당의 조직 제1부부장으로서 시련을 준 정치세력이었다. 사망과 관련한 북측 보도에서 확인됐지만 이제강은 1982년 김정일 서기실에 발탁된 이후 지속적으로 당 조직부에서 중요한 일을 했고, 2001년 당 조직부 제1부부장이 됐다. 당 조직부는 한마디로 당·정·군의 고위 간부에 대한 인사를 담당한다. 당연히 북한 통치기구 곳곳에 자신의 측근을 배치할 수 있다. 물론 김정일이 최종적으로 승인하지만 선발, 확인, 추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제강 이전에는 장성택이 1995년 11월부터 이 일을 해왔다. 결국 두 사람은 핵심권한을 인수하고 인계하는 관계가 아니라, 박탈당하고 차지하는 관계였다.
‘제로섬 게임’의 정치적 라이벌
둘째, 교통사고 원인에 대한 의문이다. 고위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고위 인사들은 당에서 훈련시킨 비밀요원들이 운전을 대신한다. 그 운전병들은 단순히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이들을 감시해 김정일 서기실에 직접 보고한다. 운전병들이 간부를 밀착 감시하는 것이다. 운전병들이 운전한다면 교통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평소 운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직접 운전한다면 교통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다. 북한 고위 인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초대는 ‘운전기사 없이 직접 차를 몰고 참석하라는 파티’라는 이야기가 있다. 파티 대신 검열을 받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음주 후 자가운전을 하다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 1980년대 중반 당 조직부 제1부부장으로 수많은 고위 인사를 검열·숙청하는 데 관여한 김치구도 측근 파티 참석 후 귀가 중 음주운전 사고로 사망했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과 남북대화 과정에 관여해 우리 국민이 잘 아는 김용순 역시 2003년 6월 27일 의문의 교통사고로 상당 기간 치료를 위해 입원했으나 결국 사망했다. 입원한 기간에 남측 인사들의 면회는 철저히 통제됐다. 이러한 북한 고위 인사의 퇴장 과정에 등장하는 ‘교통사고 사망’을 ‘북한식 권력투쟁, 정치적 타살’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내각총리 최영림 발탁 눈여겨봐야
셋째, 이제강이 사망한 이후, 그가 발탁했거나 관리하는 북한 파워엘리트들의 운명이다. 이제강의 영향을 받던 파워엘리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발 빠르게 장성택에게 새로운 충성을 하거나, 철직(撤職·일정한 직책이나 직위에서 물러나게 함) 또는 그런 행정적 처분을 각오해야 한다. 선택의 칼자루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성택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장성택이 정치적 용도와 최고지도자의 의중을 고려할 것이다. 적어도 이제강이 제거된 상황에서 장성택과 경쟁할 수 있는 파워엘리트는 단기적으로 부상하기 힘든 구조다. 이미 이제강 실세기에 인민무력부장을 역임한 김일철은 국방위원에서 해촉됐다. 김정일 측근이 아닌 김일성 측근으로 일하면서 김정일의 권력승계 과정에 일정한 역할을 했던 최영림이 내각총리로 발탁된 것도 권력변화와 관련해 눈여겨봐야 한다. 1933년생인 김일철을 해임하면서 고령을 구실로 내세웠지만, 내각총리 최영림이 1930년생임을 고려하면 이 명분은 허구임이 드러난다.
필자는 교통사고로 이제강이 북한 권력무대에서 퇴장하고,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새로운 모자를 쓰고 권력무대 중심으로 다가서는 장성택의 모습에서 북한식 권력투쟁과 그 결말을 상상해본다. 2010년 6월 현재 분명한 것은 김일성의 사위, 로열패밀리 일원인 장성택이 북한 국내 정치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 김정일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장성택은 주연급 조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향후 역할은 여전히 연출자 김정일의 건강에 달려 있다고 본다. 2~3년 후 역사는 2010년 6월 3일을 남북한 정치지형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날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제강의 사망을 공식 발표하기 전인 3일 새벽에 이미 일본의 여러 언론인이 필자에게 e메일로 “이제강이 죽은 것 같은데 교통사고냐, 정치적 타살이냐”는 질문을 했다. 일본 기자들이 이 같은 질문을 던진 이유는 지난해 발표한 논문 때문이다. 필자는 2009년 12월 14일 한 학술세미나에서 북한 군부 내부에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으며, 투쟁 진영의 중심에 장성택과 이제강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군부 핵심인사 26인을 정치 배경과 승진 시기를 고려해 ‘장성택계’와 ‘이제강계’로 구분했다. 우연하게도 이제강이 사망한 후인 6월 7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서 장성택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며 실질적인 2인자임을 내외에 과시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정부와 집권자가 정보를 철저히 통제할 수 있는 북한체제에서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던 한 사람이 사망하고, 한 사람은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는 사실은 수많은 정치적 억측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다음 몇 가지 정황을 근거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 장성택과 이제강은 북한 권력구도에서 ‘제로섬’의 관계였는가, 아니면 ‘윈-윈 관계였는가’다. 양자는 제로섬의 관계였다. 장성택이 혹독한 정치적 시련을 겪었던 시기인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제강은 당의 조직 제1부부장으로서 시련을 준 정치세력이었다. 사망과 관련한 북측 보도에서 확인됐지만 이제강은 1982년 김정일 서기실에 발탁된 이후 지속적으로 당 조직부에서 중요한 일을 했고, 2001년 당 조직부 제1부부장이 됐다. 당 조직부는 한마디로 당·정·군의 고위 간부에 대한 인사를 담당한다. 당연히 북한 통치기구 곳곳에 자신의 측근을 배치할 수 있다. 물론 김정일이 최종적으로 승인하지만 선발, 확인, 추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제강 이전에는 장성택이 1995년 11월부터 이 일을 해왔다. 결국 두 사람은 핵심권한을 인수하고 인계하는 관계가 아니라, 박탈당하고 차지하는 관계였다.
‘제로섬 게임’의 정치적 라이벌
둘째, 교통사고 원인에 대한 의문이다. 고위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고위 인사들은 당에서 훈련시킨 비밀요원들이 운전을 대신한다. 그 운전병들은 단순히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이들을 감시해 김정일 서기실에 직접 보고한다. 운전병들이 간부를 밀착 감시하는 것이다. 운전병들이 운전한다면 교통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평소 운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직접 운전한다면 교통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다. 북한 고위 인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초대는 ‘운전기사 없이 직접 차를 몰고 참석하라는 파티’라는 이야기가 있다. 파티 대신 검열을 받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음주 후 자가운전을 하다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 1980년대 중반 당 조직부 제1부부장으로 수많은 고위 인사를 검열·숙청하는 데 관여한 김치구도 측근 파티 참석 후 귀가 중 음주운전 사고로 사망했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과 남북대화 과정에 관여해 우리 국민이 잘 아는 김용순 역시 2003년 6월 27일 의문의 교통사고로 상당 기간 치료를 위해 입원했으나 결국 사망했다. 입원한 기간에 남측 인사들의 면회는 철저히 통제됐다. 이러한 북한 고위 인사의 퇴장 과정에 등장하는 ‘교통사고 사망’을 ‘북한식 권력투쟁, 정치적 타살’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내각총리 최영림 발탁 눈여겨봐야
셋째, 이제강이 사망한 이후, 그가 발탁했거나 관리하는 북한 파워엘리트들의 운명이다. 이제강의 영향을 받던 파워엘리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발 빠르게 장성택에게 새로운 충성을 하거나, 철직(撤職·일정한 직책이나 직위에서 물러나게 함) 또는 그런 행정적 처분을 각오해야 한다. 선택의 칼자루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성택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장성택이 정치적 용도와 최고지도자의 의중을 고려할 것이다. 적어도 이제강이 제거된 상황에서 장성택과 경쟁할 수 있는 파워엘리트는 단기적으로 부상하기 힘든 구조다. 이미 이제강 실세기에 인민무력부장을 역임한 김일철은 국방위원에서 해촉됐다. 김정일 측근이 아닌 김일성 측근으로 일하면서 김정일의 권력승계 과정에 일정한 역할을 했던 최영림이 내각총리로 발탁된 것도 권력변화와 관련해 눈여겨봐야 한다. 1933년생인 김일철을 해임하면서 고령을 구실로 내세웠지만, 내각총리 최영림이 1930년생임을 고려하면 이 명분은 허구임이 드러난다.
필자는 교통사고로 이제강이 북한 권력무대에서 퇴장하고,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새로운 모자를 쓰고 권력무대 중심으로 다가서는 장성택의 모습에서 북한식 권력투쟁과 그 결말을 상상해본다. 2010년 6월 현재 분명한 것은 김일성의 사위, 로열패밀리 일원인 장성택이 북한 국내 정치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 김정일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장성택은 주연급 조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향후 역할은 여전히 연출자 김정일의 건강에 달려 있다고 본다. 2~3년 후 역사는 2010년 6월 3일을 남북한 정치지형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날로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