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전이나 빅게임에선 감독의 역량이 절대적이다. 2002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궈낸 히딩크(왼쪽).
두려움을 다스리는 용기는 최고경영자(CEO)가 갖춰야 할 기본기 가운데 으뜸이다. 현실을 직시하되 두려움보다는 용기로 맞서는 자세가 필요하다.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이 적다거나 두려움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라, 두려움을 지배할 줄 아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다스리는 용기
한 마리 사자가 이끄는 100마리의 사슴 군대가, 한 마리 사슴이 이끄는 100마리 사자 군대보다 훨씬 용맹하다. 리더는 그래서 중요하다. 축구감독도 마찬가지다. 축구감독이 무능하면 아무리 세계 최고의 선수를 모아놓아도 모래알 조직일 뿐이다.
축구에서 골은 꽃이다. 꽃은 누가 피우는가? 그것은 감독이 피운다. 감독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수많은 밤을 지새운다. 선수들은 11개의 꽃잎일 뿐이다. 꽃잎이 아무리 화려한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감독만이 11장의 꽃잎을 엮어 꽃을 피워낸다.
한국축구가 2010 남아공월드컵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2대 0으로 이겼다. 한국인 감독의 월드컵 첫 원정 승리다. 한국축구가 월드컵에서 처음 승리한 것은 2002 월드컵에서였다. 당시 감독은 히딩크였다. 2006 독일월드컵에서 토고를 꺾었을 땐 아드보카트 감독이었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 했지만 ‘아직 한국인 감독은 안 된다’는 게 중론이었다. 심지어 “한국인 지도자는 외국인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 정도가 맞다”고까지 비하하는 사람도 있었다. 국내 감독들은 억울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을 입증하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허정무 감독이 한 방에 해결했다. 허 감독은 선수 선발, 전술뿐 아니라 팀 전체 운영에서 히딩크나 아드보카트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토종 감독이라는 장점을 살려 더욱 깔끔하게 팀을 이끌었다. 이제 한국축구는 히딩크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것은 허정무 월드컵 축구대표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사상 처음으로 ‘CEO 감독’이 됐음을 의미한다. 이제 한국은 16강 진출 여부에 관계없이 ‘한국식 된장축구’를 빚어내는 데 성공했다.
‘CEO 허정무’는 단순 축구기술자로서 선수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팀 전체를 관리 경영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역대 감독은 사실 기술자 감독에 지나지 않았다. 선수 시절 공만 잘 차면 거의 감독이 됐다. 축구 선진국에서의 축구 감독은 CEO다. 당연히 기술보다는 사람관리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굳이 비율로 따진다면 기술 20%에 사람관리 80%라고나 할까. 기술 부문은 뛰어난 코치를 데려다 쓰면 된다. 히딩크나 아드보카트 감독이 명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람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다.
한국축구에 CEO 개념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2002년 히딩크다. 먼저 목표를 제시(16강)한 뒤, 팀 빌딩(team building·젊은 피 수혈)을 단행했다. 그 다음 장기계획에 따라 차근차근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그는 평가전에서 0대 5로 대패한 뒤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았을 때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4강 신화’를 이루며 영웅이 됐다.
일본전산의 성공 신화를 만든 CEO 나가모리 시게노부는 “평상시 직원들의 경쟁력을 갖추게 해주지 않는 CEO! 이들은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 은근슬쩍 정리해고 카드나 내미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CEO 자격이 없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사람’이 움직여야 하는데, 소중하게 대우받은 직원들이야말로 어려울 때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즉, 흔들림 없는 소신도 CEO에게는 중요한 기본 자질이라는 것이다.
단기전이나 빅게임에선 감독의 역량이 절대적이다. 2002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은 한국대표팀 전력의 99%를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선수 11명의 힘을 묶어 그 총합이 11보다 큰 15~20을 만들어냈다. 선수들이 가진 각각의 능력을 150~ 200% 발휘하게 했다.
흔들림 없는 소신에 기반한 소통
2010 허정무 체제는 ‘히딩크 + 아드보카트 체제’에서 얻은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선수 선발에서부터 코칭스태프 구성까지 벤치마킹하며 차근차근 준비했다. 선수 선발 때 프로구단과의 갈등은 허 감독이 직접 대화로 풀었다. 과감한 젊은 피 수혈, 운동장에서 뭔가 보여주지 않는 선수는 아무리 유명 스타라도 발탁하지 않는다는 원칙, 이동국에 대한 끊임없는 채찍과 당근, 노장 안정환의 깜짝 발탁 등 그의 팀 빌딩 방법은 노회한 히딩크보다 조금도 뒤질 게 없었다.
히딩크는 시범 케이스를 만드는 데 명수다. 표적은 어김없이 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타 선수나 최고참 선수다. 2001년 히딩크가 한국에 부임했을 때 안정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히딩크가 이걸 모를 리 없었다. 히딩크는 갑자기 그를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했다. 팬은 물론 축구 관계자나 언론에선 왜 그를 뺐느냐며 들끓었다. 하지만 히딩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선수는 모른다는 듯 무시했다. 한술 더 떠 “그는 이탈리아 페루자 팀에서 벤치 멤버에 불과하다. 그는 대단한 선수가 아니다”라고 소금을 뿌렸다.
천하의 홍명보도 히딩크 감독 밑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히딩크는 2001년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한국축구의 리더라 할 수 있는 홍명보를 “몸이 안 돼 있다”라는 이유로 대표팀에서 뺐다. 물론 나중에 홍명보는 다시 히딩크의 부름을 받았지만, 히딩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홍명보도 그저 팀원의 일부일 뿐이다. 그도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경쟁해야 하며 잘 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면서 홍명보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이유로 주장 완장을 김태영에게 줘버렸다.
CEO는 자신의 소신과 철학 안에 꼭 진정성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만 희망의 불씨가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전해진다. 특히 CEO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성에서 우러난 솔선수범
허정무는 히딩크처럼 심리전을 하지는 않는다. 시범 케이스도 만들지 않는다. 대신 선수들과 수시로 대화를 나눈다. 굳이 그의 리더십을 말하자면 ‘형님 리더십’이다. 자연스럽게 선수들과 격의 없이 지낸다.
그리스를 이긴 뒤 허 감독의 첫마디는 “난 별로 한 게 없다. 선수들이 자랑스러울 뿐이다”였다. 과거 허 감독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이다. 허 감독의 별명은 진돗개다. 그만큼 선수들을 강하게 몰아쳤다. 하지만 ‘나를 따르라’식의 리더십이 선진축구를 맛본 해외파나 요즘 신세대에게 통할 리 없다. 아차! 허 감독은 어느 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리고 즉각 변했다. 우선 선수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선수들과 수시로 대화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그리스와의 경기 전날에도 선수들끼리 미팅을 하게 했다. 상대 팀 전력을 분석하는 데 자신은 빠지고 선수들이 자유스럽게 토론하도록 한 것이다.
훈련장에서 주장 박지성과 수십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다른 선수들과도 수시로 뭔가 얘기를 주고받는다. 과거 훈련장에서 볼 수 없던 장면이다. 훈련을 계획했다가도 주장 박지성의 휴식 건의를 두말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예다. 이것이 자율과 칭찬의 리더십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허 감독은 아르헨티나전을 앞두고 “난 작전을 거의 내지 않을 테니 너희 맘껏 신나게 뛰어봐라”고 말했다.
허 감독은 시작부터 다른 외국인 감독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그는 선수들과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을뿐더러 한국문화를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 히딩크가 아무리 언어의 마술사지만 통역을 거쳐 오는 말은 ‘어’ 다르고 ‘아’ 다름의 미묘한 차이를 헤아릴 수 없다. 리더십의 성패는 상대방의 말을 얼마나 잘 들어주느냐에 달려 있다. 보통 인간은 1분에 약 150개의 낱말을 말하지만 듣는 것은 1분에 600개 정도가 가능하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것은 일단 그 사람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논리’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에는 ‘정서의 공유, 경험의 공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직원은 파트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는 스스로 결정하기를 바란다. 그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야만 한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조직원들을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처럼 취급하고 관리’하라고 말했다.
허 감독의 귀는 열려 있다. 그는 주장 박지성 선수에게 전적으로 힘을 실어준다. “경기장에서는 네가 감독이다. 감독이 전달하지 못하는 부분은 주장이 대신 이끌고 리드해야 한다”고 격려한다. 박지성은 허정무호의 정신적 지주다. 2002년 히딩크호의 기둥은 홍명보였다. 홍명보는 어린 선수들이 말 걸기도 어려운, 무뚝뚝한 대선배였다. 하지만 박지성은 선후배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 등을 두드려준다. 허 감독의 열린 리더십과 주장 박지성의 수평적 리더십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열린 리더십의 박지성(오른쪽)은 허정무호의 정신적 지주다.
무능한 장수 한 사람이 수천수만의 병사를 죽이고, 역시 유능한 장수 한 사람이 수천수만의 병사를 살린다. 축구팀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보통 한 축구팀의 에너지는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시된다. ‘T(팀 에너지)=11×χ(감독 역량) +α(팬, 언론, 축구협회 지원 등)’. 즉 선수 11명 개개인의 힘은 감독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1보다 커져 20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작아져 5가 될 수도 있다.
빼어난 인재 용병술 발휘
축구 수준이 낮은 팀일수록 감독의 비중이 커진다. 한국 같은 축구 변방국가일수록 감독의 비중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브라질, 스페인,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잉글랜드 같은 축구 선진국은 상대적으로 감독의 비중이 작아진다. 선수들의 기술이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데다 개성까지 강하기 때문이다.
허정무는 바둑 고수다. 바둑돌 하나하나는 약하지만, 그 돌들이 서로 어깨동무로 이어지면 강한 힘을 발휘한다. 11장의 꽃잎을 어떻게 어우러지게 하느냐에 따라 ‘국화꽃’이 될 수도 있고 ‘호박꽃’이 될 수도 있다. 허 감독은 아직 한국축구가 세계 수준과 차이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개인 기량에서도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오직 팀워크와 조직력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성실하고 팀에 헌신하는 선수를 좋아한다. 허정무 축구는 끈적끈적하다. 세계 최고의 팀과 붙어도 쉽게 지지 않는다. 밀리다가도 벼락같은 역습으로 한 방 날릴 줄 안다.
작전에서도 세계 명감독들에게 전혀 꿀리지 않는다. 그리스전에선 오토 레하겔 그리스 감독을 압도했다. 1대 0으로 이기고 있을 때도 움츠러들지 않고 계속 공격적으로 나갔다. 히딩크와 닮은꼴이다. 히딩크는 이기고 있는 상황이라도 결코 수비를 강화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상대팀에게 ‘나를 공격해 주십사’ 하고 간청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 공격수가 빠지면 상대는 수비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 놓고 공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상대로부터 공격받고 싶지 않으면 그만큼 더 수비가 아닌 공격을 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런 허정무 축구는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볼 때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허정무는 더 이상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한국축구의 맏형으로서 선수들을 편안하게 해주려 애쓴다. 선수들이 ‘게임을 즐겨야’ 제 실력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래야 16강에 오를 수 있다. 그 이후엔 8강, 4강. 아무도 모른다. 허 감독이 만약 한국을 16강에 올려놓는다면, 그는 히딩크 못지않은 ‘월드컵 스타 감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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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 LG경제연구원 인사조직연구실 김현기 책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