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 기자 동생이 ‘우울증’ 증세를 호소한 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들.
A신경정신과 의원. 정신과 의사가 동생을 진료한 시간은 단 5분. 거짓 우울증 증세를 털어놓는 동생의 말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렇지, 그랬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만 연발했다. 그러고는 우울증 진단과 상관없을 것 같은 질문을 계속 던졌다. “여기는(정신과는) 와봤니” “약 먹어봤니” “잠은 잘 자니” “왜 못 자니” “친구랑은 잘 지내니” “친구는 집에 데리고 오니” “아빠와 엄마 중 누구와 더 친하니” “부모님과 자주 얘기하니” “잠은 얼마나 못 자니” “우울하니” “자신감은 있니”…. 금세 진단을 끝낸 의사는 보호자인 기자에게 말했다.
단 5분 진료 후 “우울증 증세”
“우울증 증세가 있고 잠을 잘 못 자네요. 잠 잘 오는 약과 안정 취하는 약을 일주일치 처방했으니 잘 먹이세요. 약 먹어도 이상 증세는 전혀 없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요즘 나오는 약 가운데 부작용 있는 약은 없습니다.”
일주일치 약값을 포함한 진료비는 5만 원에 달했다. 그것도 카드는 받지 않고 현금으로 내라고 했다. 정신과 진료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건강보험 급여대상 약품을 비보험으로 처리해주기도 했다. 사실상 이것도 불법인 셈. 기가 찬 대목은 의원 내에서 약을 처방해주면서, 그것도 10대 청소년이 먹어야 하는 약인데도 자세한 복약지도를 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한약사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의약품 정보’를 검색해보니 처방약은 다음과 같았다. 아침에 먹으라고 한 약은 항우울제(마약류 향정신성의약품)와 소화제 한 알이었고, 저녁 약에는 항우울제가 2개나 들어 있었다. 다시 의약품 정보를 확인해보니, 아침 약은 ‘청소년에 대한 안전성 및 유효성이 확립되지 않았으므로 이 약을 투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설명이 나온다. 저녁 약은 ‘18세 이하 소아에 대한 안전성 및 유효성이 확립돼 있지 않다’고 적혀 있다.
같은 날 찾은 B신경정신과 의원. 이 의원에서는 그래도 20분쯤 상담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우울증’ 진단과 함께 일주일치 약을 처방받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 기록에 남기지 않는 대가로 지불한 진료비는 3만9000원. 같은 환자, 같은 증상인데 진료비가 달랐다. 대신 이 의원은 환자가 집에서 MMPI(다면적 인성검사), SCT(문장완성 검사), BDI(우울증 척도검사)를 해오는 것에 2만5000원의 별도 비용을 청구했다. 약부터 주고 나중에 검사를 하는 의원 측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다른 신경정신과 의원에서 검사받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검사를 안 해도 괜찮다”며 물러섰다. 기존 검사 결과를 제출하라는 요구도 없었다.
우울증 환자의 그림. 우울증 환자는 약물치료를 하는 것이 효과적이긴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향정신성의약품에 부작용이 없다?
동생에게 처방된 항우울제는 마약류 향정신성의약품. 향정신성의약품은 중추신경(뇌세포)계에 작용해 정신 기능에 영향을 주는 약물로, 계속 복용하면 약효가 줄고 의존성이 생기기(중독되기) 쉬우며 습관성이 있는 게 특징이다. 오·남용할 경우 인체에 현저한 위험이 있다고 인정되는 약물. 중추신경을 억제해 불안감, 우울감을 사라지게 하는 중독성 항불안제는 자살이나 타살 충동을 불러오기도 한다. 킹스칼리지 런던대 연구팀이 ‘BMC 메디슨(Medicine)’ 저널에 밝힌 결과에 따르면, 일부 우울증 약물은 치료 중 자살충동과 자살행동이 높아질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약물 투입을 중단하면 오한, 발열, 손떨림, 무기력증, 헛소리, 경련, 혈압저하 증 등 금단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의존성 약물이 어른뿐 아니라 청소년에게도 무분별하게 처방되는 현실이다. 기자가 만난 의사들은 약품 설명서에 ‘청소년에 대한 안전성 및 유효성이 확립되지 않았으므로 이 약을 투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적시된 약품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처방했다. 게다가 간단히 상담만 한 뒤 “약을 먹으면 좋아질 것”이라며 “다시 또 약을 받으러 오라”는 말을 반복했다. 의사, 간호사 누구도 이 아이가 먹을 약이 향정신성의약품이며 중독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고를 하지 않았다. 오심, 구토, 발열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을 고지하지도 않았다. 환자의 병력을 묻고 복약 시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곳도 없었다.
정말 심각한 점은 우울증 판별을 위한 기초 진단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울증의 인지적, 정신적, 동기적, 신체적 증상을 확인하려면 우울증 선별검사를 해야 하지만 이것을 요구하는 의원은 없었다. 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우리나라 의료계 현실에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 상담치료를 하지 못하고 간단히 진료한 뒤 약물 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어 환자에게 들이는 노력이 크지 않다”는 한계를 지적하며 “진단을 잘못할 가능성이 있긴 하다”고 귀띔했다.
개원 신경정신과 전문의들은 우울증 치료에 향정신성의약품인 항우울제밖에 대안이 없다고 입을 모으지만, 실제로 우울증 환자라고 모두 약물 처방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세대 의대 정신과 이홍식 교수는 “우울증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으므로 가벼운 우울증은 약물치료 대신 정신치료로 심리적 방어기제를 도와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우울증이 나타난 것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증상이기 때문에 건강한 방어기제를 활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당뇨병 경증 환자들이 인슐린 주사(약물치료) 대신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호전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성인은 1분 진찰 후 “6개월 약물 복용”
청소년이 이처럼 간단히 향정신성의약품을 접할 수 있다면, 성인은 어떨까. 이번에는 기자가 직접 정신과를 찾았다. 역시 처방은 초스피드로 이뤄졌다. ‘우울증 환자’처럼 연기를 해야 하나 고민할 새도 없이 의사는 우울증 진단을 내렸다. 우울증이 마치 흔히 앓는 감기처럼 느껴졌다.
“우울한가요. 기운 없죠. 잠도 못 자지요. 자신감 없죠. 우울증이네. 약은 6개월 정도 먹어야 하니 2주마다 오세요. 부작용은 전혀 없어요.”
의사와의 면담시간은 단 1분. 2주일치 우울증 약을 처방하면서 병력이나 임신 여부도 묻지 않았다.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오며 간호사에게 “치료가 너무 빨리 끝난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하자 “저희 병원은 약물치료를 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처방전을 낸 의원에서도, 약을 지어준 약국에서도 향정신성의약품에 대한 복약지도를 들을 수 없었다. 처방받은 약에는 1회 분량에 향정신성의약품인 항우울제가 3개나 들어 있었다.
진료를 마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른 정신과에 문을 두드렸다. “언제부터 잠을 잘 못 잤나요” “힘들었나요” “요즘 고민은 무엇인가요” “어떤 일을 하나요” “자신감이 없는 편인가요” “가족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친한 친구는 몇 명이 있나요”…. 비교적 상세히 진행된 20분간의 진료. 하지만 그 밖의 검사는 없었다. 의사에게 “당분간 병원에 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하자 한 달치 항우울제를 처방해줬다. ‘거짓말만 잘하면 향정신성의약품 장사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 치료약물인 향정신성의약품의 부작용을 설명해주는 의사와 약사는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부작용의 가능성을 부인했다. 제약회사는 약품 정보를 통해 여러 부작용을 경고하는데 의사와 약사들이 이를 외면하는 현실이 놀라웠다. ‘만들어진 우울증’의 저자인 정신약물학자 크리스토퍼 레인은 이렇게 지적했다.
“틀림없이 과열된 분위기와 선의에 의해 부추겨졌을 약의 대량 소비는 근본적으로 우리 몸으로선 엄청난 경험이다. 우리 중 일부는 좋은 반응을 나타내고, 어떤 이들은 영구적인 뇌 또는 신체 손상에 시달리게 되는 위험한, 그리고 많은 이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도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