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조부모와 인사를 나누는 김연아(왼쪽). 아버지 김현석 씨, 어머니 박미희 씨와 함께.
2010년 2월 ‘피겨 여제’로 성장한 수줍은 ‘군포 소녀’에게 세계의 눈이 쏠렸다. 김연아(20) 선수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피겨 스케이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끈기와 오기로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 그는 이날 좀처럼 보이지 않던 눈물을 흘리며 가족에게 감사를 전했다. 멀찍이 떨어져 딸을 지켜보던 아버지 김현석(53) 씨와 어머니 박미희(51) 씨의 어깨도 나지막이 들썩였다.
‘집기러기’ 10년차 아버지의 꿈
“올림픽이라서 처음으로 동행했어요. 연아가 끝까지 차분하게 잘해줘 장하고 기쁩니다. 이제 네 식구가 모여 살 날이 머지않았네요.”
김 선수의 경기 다음 날 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출국 전 똥이 넘치는 꿈을 꿨는데 그것이 길몽이었다”는 그의 목소리에서 기쁨과 흥분이 묻어났다. 늘 딸과 함께하는 어머니와 달리, 김씨는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연아 일은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기고, 본인은 후방만 지원하면 된다는 생각에서다.
‘스포츠 스타’의 부모지만 김씨 부부는 늘 겸손하다. 필요한 부분 외에는 극도로 말을 아끼고 언론 노출도 자제한다. 다만 올곧은 성격의 박씨는 원칙에 철저한 반면, 김씨는 기자들의 우는 소리에 약한 편이다. 지난해 김씨가 운영하는 인천공장을 불쑥 방문했을 때도 그랬다. “아이가 잘한 건데 부모가 나설 일이 있느냐”면서도 성심껏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양대를 졸업한 그는 15년 넘게 도금 관련 사업을 하면서 재정적 지원을 해왔다. 1년에 평균 아홉 달 이상 집을 비우는 아내와 딸을 대신해 큰딸과 집을 지켰다. “재능 있는 딸을 둔 아버지의 외로운 운명”에 종종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김씨의 키는 180cm. 하늘하늘한 몸과 긴 팔다리, 작은 두상 덕에 더욱 우아해 보이는 김 선수의 자태는 아버지의 유전자다.
김 선수의 별명은 ‘강심장 김슨생(김선생)’. 큰 무대에서도 떨지 않는 대범함에 누리꾼들이 붙인 별명이다. 하지만 김씨에 따르면, 김 선수는 낯선 이와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고 한다. 데이비드 오서 코치, 데이비드 윌슨 안무가 등 마음 맞는 사람들과 대회를 준비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
“조용하다 못해 심하게 수줍음을 타던 아이가 카메라 앞에서 CF를 찍는 모습을 보면 신기해요.(웃음) 연아는 어릴 때부터 아이답지 않게 절제력이 뛰어났어요. 밥 한 공기를 줘도 반을 덜어내는 모습을 보고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죠.”
김씨의 꿈은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족이 뭉치는 것. 너무 오랫동안 각자의 생활에 충실한 ‘각개전투 가족’으로 살았다. 김 선수의 시즌이 끝나면 여의도에 마련한 새 전셋집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울고 웃으며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
동생에게 ‘올인’한 엄마 대신해 의젓한 큰딸
2월26일 서울 여의도의 한 종합병원. 의사, 간호사, 환자 등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10층 병동에 출동했다. 김 선수가 프리스케이팅에서도 최고점을 받으며 금메달을 따자, 이 병원에 근무하는 언니 애라(23) 씨에게도 관심이 쏠렸다. 병원 교수들도 전화를 걸어 인사를 건넸다는 후문이다.
3월3일 병원을 방문한 시각, 애라 씨는 비번이었다. 병동 한쪽 벽면에 붙은 간호사 소개 코너를 보니,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애라 씨의 사진이 눈에 띈다. 동생보다 엄마를 더 닮은 모습이다. 그와 함께 근무하는 직원에 따르면, 애라 씨도 김 선수처럼 성격이 사근사근하다고 한다. “며칠 전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관심으로 많이 부담스러워했다”고도 전했다.
애라 씨는 어려서부터 혼자인 시간이 많았다. 동생을 돌보느라 바쁜 어머니 대신 숙제도, 공부도, 입시 준비도 혼자 척척 해냈다. 박씨는 저서 ‘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폴라북스 펴냄)에서 “큰딸 애라에게 항상 미안하지만, 특히 미안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애라 씨의 재능을 키워주지 못한 일이다.
“애라는 실용음악과에 가고 싶어 했지만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요즘 노래 잘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일축했고, 애라는 의기소침하다 포기했다. 그런데 몇 달 후 애라와 모처럼 노래방에 갔다가 울음을 삼키고 말았다. 연아처럼 일찍 알아보았더라면….”(‘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 중)
어린 시절 손녀에 도움 준 외조부
동계올림픽 선수단이 귀국한 3월2일. 인천국제공항은 환영 인파와 경찰이 뒤섞여 종일 들썩였다. 혼란 속에서도 입국장 앞쪽 벤치를 조용히 지키는 일행이 있었다. 김 선수가 나고 들 때마다 공항을 찾는 외가식구들이다. 2남2녀 중 셋째인 박씨는 대학에서 패션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많이 울고, 그만하라고 말리기도 했어. 다른 형제들은 골프 치러 다니는데 연아 엄마는 고생만 하고 남편이랑 떨어져 살고…. 이제는 금메달 땄으니 편히 지냈으면 좋겠어.”
김 선수의 외할머니 김수제(78) 씨가 기쁨과 시원함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 됐지만 김 선수에게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전지훈련비 1500만원을 감당하기 힘들어 빚을 낸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외가에서 도움을 줬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집도 살 만하다. 별로 도와준 거 없다”며 ‘금전적 지원’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렸다.
박씨는 올곧은 성격으로 유명하다. 코치를 정할 때도, CF를 할 때도 김 선수에게 무리가 간다 싶으면 인정보다 합리성을 택한다. 김 할머니의 언니에 따르면, 그런 성격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김 선수의 외할아버지 박기병(82) 씨는 부천에서 PVC 관련 사업체를 운영하다 은퇴했다. 김씨는 “지금 목동 실버타운에 사는데, 경기 때마다 노인네들이 굉장히 좋아한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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