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는 톡톡 튀는 감성과 편집으로 남자의 실연기를 맛있게 그렸다. 마음을 적시는 배경음악과 복고풍의 LA를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
그런데 최근 이 남성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새 별이 나타났다. 바로 마크 웹 감독의 ‘500일의 썸머’. 여기서 썸머는 주인공 톰이 사귀는 여자의 이름으로, 썸머와 만난 첫째 날 벌써 운명적 사랑을 감지한 톰은 31일째 되던 날 복사기 앞에서 그녀와 키스를 했고, 109일째 되던 날 그녀의 집에 찾아가서 둘 사이의 벽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500일의 썸머’는 이런 톰의 연대기적 연애 역사를 재치 있는 편집으로 보여준다. 썸머를 만난 첫날과 헤어져가는 290일째 날이 잇닿아 있고, 109일째 되는 날 느꼈던 사랑의 기쁨도 잠시, 118일째에 톰은 어린 동생을 붙잡고 사랑의 고민을 토로한다. 로맨틱 코미디의 ‘메멘토’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대로 이 영화의 최대 매력은 스토리와 캐릭터가 아닌 사랑의 감정 자체가 주인공이라는 것.
썸머 핀은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사랑을 믿지 않는다. 반면 톰 핸슨은 사랑을 운명이라 믿으며 감사 카드의 글귀를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살아간다. 두 사람이 이케아 가구 사이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가상의 결혼생활을 꿈꾸는 장면은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연애가 현실의 결혼과 동떨어진 ‘재미있는 놀이’인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사랑에 빠졌을 때 둘은 세상 그 누구도 개의치 않는다. 공원에서 누가 더 크게 ‘페니스’를 외치는지 내기를 걸고, 건축가를 꿈꾸는 톰은 썸머의 팔에 LA의 빌딩을 그려 넣는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풍부한 음악과 촬영감독 에릭 스틸버그의 손을 통해 복원된 LA 도시 그 자체. 클래시의 ‘Train in Vain’부터 홀 앤 오츠의 ‘You make me my dreams come true’까지 발라드의 명곡들이 톰의 마음을 대신한다. 게다가 1950~60년대의 마천루로 채워진, 올드 스타일로 재탄생한 LA는 영화에 복고적인 로맨티시즘을 불어넣었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매우 지적이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영화 몇 편으로 눈요기를 하고 르네 마그리트와 링고 스타 정도는 알아야 영화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결국 썸머가 있어 ‘나는 우리를 사랑해. I LOVE US’라는 감사 카드의 문구를 쓸 수 있었던 톰은 “복사실에서 샤워하고 이케아에서 손잡고 샤워실에서 섹스한 게 친구냐?”며 썸머와 싸움을 벌인다. ‘세상은 넓고 물고기는 많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깨닫고, 여름을 지나 또 다른 가을을 맞이하는 동안 톰은 모든 남성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그렇듯 성인이 되리라. 그래서 이 영화는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이야기’라고 단정 짓지만, 결국 톰은 ‘500일의 여름’이 아닌 ‘5000일의 가을’을 향해 다시 페달을 밟아나가는 것이다.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이 20대 후반 남자 아이들의 감수성을 이제는 연애를 통해 경험하기보다 영화를 통해 복습해야 하는 나이가 한탄스러운 필자의 마지막 전언. 복사실에서 샤워하고 이케아에서 손잡고 샤워실에서 섹스한 여자가 마누라가 되지 않은 톰 그대여, 부디 이 짧은 여름을 충분히 즐기시기를.
추신 _영화는 제67회 골든글로브상 뮤지컬-코미디 부문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조셉 고든 레빗)에 노미네이트됐다. 톰 역의 조셉 고든 레빗은 죽은 ‘히스 레저’와 너무(!)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