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2세대 이동통신 방식인 CDMA가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이후, 이통사의 양대 축인 KT와 SK텔레콤은 해외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국내 이동통신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를 것에 대비한 전략이었다. 국내 시장에서 휴대전화 단말기를 공짜로 뿌리고 가입자 뺏어오기 혈투가 치열해질수록 해외 진출에 대한 이통사들의 목마름은 더욱 심해졌다. 해외 진출 대상국은 미국 러시아 말레이시아 우즈베키스탄 중국 베트남 등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지 않았다.
국내 이통사들이 해외 무선전화 시장에 진출한 지 14년이 지난 지금, 글로벌 성적표는 과연 어떨까. 각 이통사 측은 “실적이라고 내세울 것이 딱히 없다. 너무 초라해 부끄럽다”고 고백한다. 국내 이통사 중 실질적으로 해외시장 진출의 첫 테이프를 끊은 곳은 KT(옛 KTF)였다. 1997년 KT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소규모 이통사였던 NTC의 지분 80%를 사들여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이후 NTC는 KT의 기술력과 서비스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제1의 이동통신사업자로 올라섰다.
당시 KT의 NTC 인수는 국내 이통사가 남의 주파수를 빌려 쓰는 ‘가상 이동통신사업(MVNO)’이 아닌 ‘직접 이동통신사업(MNO)’을 최초로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비록 무선 주파수 배당은 러시아 국적의 회사가 받았지만 제공되는 기술과 서비스의 내용은 KT의 것이었고, 가입자에게서 들어오는 통화요금 등 수입은 우리의 수출실적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10여 년이 흐른 2008년 현재 NTC의 매출액은 1억2800만 달러, 영업이익은 3900만 달러에 이른다. 이후 KT는 러시아 극동지역에서만 2개 법인을 새로 인수했다.
중국, 미국에서 쓴잔 마신 SK텔레콤
하지만 무선으로 통화하고 문자를 주고받는 등 순수 이동통신사업의 해외 진출 성공의 역사는 여기까지가 전부다. 현지 이통사의 지분을 일부 인수하면서 MVNO 방식으로 해외 이동통신 시장에 진출했던 SK텔레콤과 KT는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지분을 매각하고 빠져나왔거나 올해 안으로 사업을 접을 예정이다. 남은 것은 통화연결음(컬러링)과 와이브로 같은 이동통신 연관 사업과 관련된 수출실적으로, 그마저도 투자액이나 수입 면에서 극히 미미하다.
2005년 “글로벌 사업의 중심을 중국으로 하겠다”고 선언한 SK텔레콤은 지난해 11월 정작 오랜 사업 파트너였던 차이나유니콤 보유 지분 3.8%(1조5000억원)를 매각하고 손을 털었다. 차이나유니콤은 SK텔레콤으로부터 CDMA 관련 기술을 전수받고 전략적 제휴 협정까지 맺은 중국 제2의 이동통신사업자로, 중국 진출의 전략적 교두보 기능을 해왔다.
이에 앞서 지난해 4월 SK텔레콤은 미국시장 진출의 주춧돌 노릇을 한 힐리오(Helio)에서도 손을 뗐다. 힐리오는 2006년 현지 이통사의 주파수를 빌려 쓰는 MVNO로 출발했지만, 2008년 6월 가입자 확보 부진에 실적 악화까지 겹쳐 미국의 ISP 사업자인 버진 모바일에 인수됐다. 이에 SK텔레콤은 힐리오 주식 지분을 매각하지 않고 오히려 2500만 달러를 추가해 버진 모바일의 지분 17%를 확보했다. 사업 간접참여를 선택한 것. 하지만 버진 모바일조차 미국의 초대형 이통사인 스프린트에 인수되면서 회사가 인수한 버진 모바일의 17% 지분은 경영상 어떤 조언도 할 수 없는 종잇조각이 돼버렸다(전체 지분의 1% 미만). 결국 SK텔레콤은 미국시장 투자비용 4000억원 이상을 투자했지만 스프린트의 한 해 실적에 따라 배당금만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말레이시아에서 고배 마신 KT
SK텔레콤이 2000년 합작회사 형태로 베트남에 설립한 SLD텔레콤의 경우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2009년 11월 현재 700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2005년에는 2억8000만 달러를 투자했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이통사의 견제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SK텔레콤은 2010년 연말까지 SLD텔레콤을 정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이들 사례를 ‘투자 실패’라거나 철수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적어도 금전적으로 손해를 본 경우는 한 번도 없는 데다 사업 전환 준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전 투자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깜짝 신화’를 만든 KT의 ‘실패담’도 SK텔레콤에 못지않다. KT는 지난해 4월 말레이시아 3세대(3G) 이동통신사업자인 U모바일에 투자한 지분 16.5%를 매각했다. 2007년 9월 시장 진출 이후 CEO(최고경영자), CSO(최고전략책임자), CTO(최고기술책임자) 등 주요 임원을 파견하며 “3년 내 가입자 200만명을 확보하고 수익을 낸다”는 계획을 세우고 의욕적으로 일했지만, 결국 1년6개월여 만에 철수를 결정한 것. 업계에선 KT의 전격적인 말레이시아 철수 결정과 관련해, KTF와의 합병이 계기가 됐다는 분석과 함께 수백억원의 손실을 입었다는 소문이 났다. 하지만 KT 측은 “손실을 입지 않았다. 오히려 환율차액이 생겨 조금 이익을 봤다. 철수 배경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순수 이동통신사업의 해외 진출과 관련해 KT는 SK텔레콤과 달리 진출 사례 자체가 적기 때문에 내상을 그만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과연 ‘모바일 최강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이통사가 외국에서 이처럼 맥없이 무너진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이통사들은 너나없이 해당 국가 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첫 번째 이유로 든다. 무선통신망이 국가기간산업인 만큼 특정 외국 업체에 무선 주파수를 할당해주지 않는 데다, 해당 국가 기업이 할당받은 주파수를 빌려 쓰는 MVNO 방식도 지분 참여 외국기업에게 기술만 전수받은 뒤 갖은 규제와 간섭을 통해 결국 그 나라를 떠나게 만든다는 것.
2009년 10월 “통신시장 성장 정체의 대안이 IPE(산업 생산성 증대)”라고 말하는 SK텔레콤 정만원 사장(왼쪽). KT가 2008년 9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제공하기 시작한 와이브로.
여기에 인접국이나 역사적으로 연관된 나라의 이동통신 업체를 선호하는 문화적 경향도 우리 업체의 해외 진출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내수시장 포화로 해외 진출을 노리는 선진국 업체가 많다 보니 후발국 이동통신사업자의 몸값이 날이 갈수록 뛰는 것도 부담이다. 즉 MNO 방식이든, MVNO 방식이든 정부의 견제를 줄이려면 해당 국가의 기업을 인수하거나 지분을 사야 하는데,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인수합병(M·A) 비용이 그만큼 많아지고, 투자비용이 많아지면 시장 크기가 작은 후발국 이동통신사업자는 수익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하지만 국내 이통사의 이 같은 해명은 외국의 사례를 보면 변명에 지나지 않음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2008년 기준으로 SK텔레콤의 전체 매출은 11조7000억원 수준이며, 그중 해외 매출액은 58억원에 불과했다. 매출 중 해외의 비중을 %로 계산하기도 민망한 수준. 하지만 보다폰, T-모바일, 오렌지 등 유럽의 대표 이통사들은 이미 2003년 이후 해외 매출액이 50% 이상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해외 진출을 시작한 싱가포르 싱텔의 경우, 1998년 이후 200억 싱가포르달러(약 14조원) 규모의 해외 투자를 통해 매출의 88%, 수익의 41%를 해외에서 얻고 있다. 싱텔은 2001년 해외시장 교두보로 정치적, 경제적 리스크가 다른 지역보다 적고 통신시장 규제도 가장 개방적인 호주를 선택해 대박을 터뜨렸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이들 국내 이통사가 순수 이동통신 사업, 즉 MNO 방식 또는 MVNO 방식의 해외 투자에서 고배를 마시는 과정에서도 와이브로, 통화연결음 등 이동통신 연관사업과 기술, 마케팅 수출에서 꾸준히 실적을 내고 있으며, 국내에 축적된 최첨단 정보통신기술(ICT)력을 바탕으로 모바일, 금융, 유통이 융합된(컨버전스) 상품을 개발해 대대적인 해외 진출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KT는 2007년 우즈베키스탄의 무선 초고속 인터넷(WiMAX) 업체 슈퍼아이맥스의 지분 60%를 인수해 2008년 9월부터 수도 타슈켄트를 중심으로 와이브로(무선 휴대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올 상반기 중에는 유명 탁구선수 출신 자오즈민이 대표로 있는 중국의 모바일 콘텐츠 사업자 옴니텔차이나의 지분 25%를 인수할 계획이다. 옴니텔차이나는 통화연결음을 비롯한 이동통신 부가서비스를 주 수익원으로 하는 회사로, 중국 내에 1200만명의 통화연결음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이통사 PT 모바일-8에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3년간 이동통신 전 분야에 대한 토털 컨설팅을 제공하고, 그 수익으로 회사 지분 2%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더불어 KT는 인도네시아에 통화연결음, 통화배경음, 발신자정보전달서비스 등 부가서비스와 유·무선 토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프리콤스)를 설립하기도 했다. KT 관계자는 “KTF와 합병 이후 보강된 무선 사업 역량을 기반으로, 상대적으로 고성장하고 있는 이머징 마켓에 적극 진출할 계획이다. 유·무선 사업은 물론, 유·무선 컨버전스 분야까지 포함해 전 방위적인 해외 투자사업을 적극 검토 중이며 주요 시장은 CIS(독립국가연합), 아프리카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4월 SK텔레콤은 상하이 모터쇼에서 자동차와 이동통신 기술의 결합물인 ‘모바일 텔레매틱스 서비스(MIV)’를 선보였다. MIV는 길 안내는 물론 휴대전화를 통해 자동차 원격 진단 및 제어도 가능하다.
2003년 이후 동남아시아와 중동지역을 대상으로 와이브로, 통화연결음, 무선 인터넷 플랫폼을 집중적으로 수출해온 SK텔레콤은 해외 진출에 대한 마인드 자체를 혁신했다. ICT(정보통신기술)를 기반으로 이동통신 분야보다는 유통, 인터넷, 금융이 융합된 모바일 컨버전스 산업으로 관심 영역을 확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한 것. 이미 회사 측은 2008년 이후 TR뮤직(음악), Cyworld(SNS), E-eye 까오신(텔레매틱스), 치앤쉰(쇼핑) 및 U-City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분 인수, 사업제휴 등을 통해 중국 진출을 적극적으로 진행해왔다.
이와 관련 SK텔레콤은 지난해 4월 상하이 모터쇼에 참가해 자동차와 이동통신 기술의 결합물인 ‘모바일 텔레매틱스 서비스(MIV)’를 선보였다. 기존의 텔레매틱스 서비스가 단순히 자동차와 이동통신망을 결합해 길 안내, 위치 정보, 데이터 통신 등을 제공했다면, MIV는 길 안내와 위치 정보는 물론, 휴대전화를 통해 자동차 원격 진단 및 제어와 함께 각종 모바일 연동 엔터테인먼트 서비스까지 즐길 수 있다. 이 서비스는 올 상반기 중 중국 업체 E-eye 까오신을 통해 세계 최초로 상용화할 예정.
SK텔레콤 정만원 사장은 지난해 10월 기자 간담회를 통해 “IPE(산업 생산성 증대) 전략을 통해 2020년에 매출 목표 20조원을 달성하고, 해외 매출 비중을 50% 이상으로 올린다는 계획이다. MNO와 관련된 기회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컨버전스 비즈니스 기회는 지속 발굴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