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초등학교 앞 문구점. 다량의 색소가 함유된 불량식품이 눈에 띈다.
옛날 아이들은 텃밭에서 오이 하나 쓱 뽑아 허기를 달랬지만 요즘은 집 앞 구멍가게에만 나가도 온갖 색소와 조미료로 치장하고 유혹하는 간식거리가 쌓여 있다. 풍요의 시대임은 틀림없는데 왜 아이들은 아토피 피부염을 달고 살며, 넘치는 오락거리 속에서 오히려 놀 곳, 놀 시간이 없어 방황할까.
색소 가득한 음식, 화학섬유 옷 …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사는 주부 박지연(43) 씨는 10년 가까이 외식과 담을 쌓고 지낸다. 아토피를 안고 태어난 둘째딸 소이(11) 때문이다. 아이가 크면서 유기농 식재료만 쓰며 철저히 식단 관리를 했지만, 집 밖으로만 나가면 온갖 과자의 유혹이 넘실거렸다.
괴로워하는 아이를 보다 못한 박씨는 2002년 큰 결심을 했다. 다섯 살짜리 딸아이를 데리고 유혹 가득한 도시를 탈출, 맑은 공기와 자연으로 둘러싸인 경기도 포천의 한 농가로 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꼭 1년 만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진물이 흐르던 아이의 피부가 말짱해지고, 입에 달고 살던 “가렵다”는 호소가 쑥 들어갔다.
6개월이 더 지난 뒤 아이는 아토피 완치 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민영(가명·38) 씨는 신축 아파트 공사현장을 지날 때면 아직도 옛 기억을 떠올리며 아찔해한다. 2000년대 초반 이씨 가족은 경기도의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고급 자재로 단장한 신평면 아파트인 데다 전세금도 싸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만족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갓 두 돌을 넘긴 아이의 온몸이 불긋불긋해지면서 밤마다 가려움증이 단잠을 앗아갔다.
병원에서는 새 집의 독성에 노출된 데 따른 아토피 같다는 진단을 내놨다. 결국 이씨는 입주 6개월 만에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요즘 아이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는 것 중 하나는 ‘아토피’로 대표되는 ‘환경병’이다. 산업화의 어느 지점에 불쑥 나타난 아토피는 변변한 치료법을 못 찾고 있는 사이 순식간에 증식해 수많은 아이를 습격하고 있다. 2007년 연세대 의대 연구팀이 전국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표본조사한 데 따르면 요즘 아이 10명 가운데 3명꼴로 아토피를 앓고 있다.
첫 조사 때인 1995년엔 20명 중 3명이 조금 넘었는데, 10여 년 만에 2배가 됐다. 환경운동연구소 ‘생태지평’의 김미현 아토피제로팀장은 “아이들은 식품첨가물 등 화학물질을 체내에서 배출하는 속도가 늦다. 건축자재 가공에 쓰는 맹독성 포름알데히드에도 취약하다. 그런데 마트에 가보면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식품을 찾기 어렵고, 옷은 죄다 화학섬유다. 또 곳곳에 짓는 새 아파트, 학교는 맹독성 물질로 ‘칠갑’을 하고 있다”며 혀를 내두른다.
즉 의·식·주 환경 모두가 아이들을 환경질환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두 집 걸러 한 집꼴로 아토피를 앓는 아이가 사는 세상이다 보니 많은 부모가 생활환경 바꾸기에 나서고 있다. 부모들의 노력은 어느 정도 결실을 보기도 했다. 화학비료나 식품첨가물로부터 안전한 유기농 식자재만을 취급하는 매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학교 급식 식자재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환경이 깨끗한 농촌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 아토피를 앓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 쉼터, 프로그램 개발에 한창이다.
골목길까지 장악한 자동차들로 인해 아이들은 늘 교통사고의 위험에 처해 있다. 왼쪽 사진은 어린이 교통사고 예방 교육에 참여한 아이들.
양 원장은 “미세먼지는 아토피 환자의 피부 손상 부위로 침투해 질환을 더욱 악화시킨다”며 “아토피를 앓는 도시 아이들이 공기가 맑은 시골로 내려가면 대부분 증세가 완화되는 것만 봐도 대기환경이 아토피 유발과 얼마나 상관관계가 높은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염된 대기와 ‘전쟁’을 치르겠다는 사회적 각오 없이는 환경의 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아이들을 지켜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골목 사라져 PC방, 게임방 전전
서울 마포구에 사는 김은숙(가명·41) 씨는 얼마 전 오랫동안 살던 다세대 주택가를 떠났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들 때문이다. 임대료가 싼 주택가에는 길 하나 건너면 하나꼴로 PC방이 난립해 있다. 맞벌이를 하는 김씨가 집을 비운 사이 아들은 친구들과 PC방으로 우르르 몰려가 서너 시간씩 게임에 빠져 살기 일쑤였다.
퇴근하고 나서 동네 PC방으로 ‘아들 찾아 3만 리’를 하다 보면 탁한 공기, 매캐한 담배 냄새, 불량해 보이는 아이들 때문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참다못한 김씨는 임대료가 비싸 PC방이 마구잡이로 들어서기 어려운 이웃 아파트촌으로 전세자금 대출까지 받아 이사했다. 서울 성산동에서 놀이학교를 운영하는 정영화(42) 씨는 요즘 골목길을 지나노라면 숨이 가빠온다. 10년 전 정씨는 이 지역의 한 어린이집 교사였다.
당시만 해도 골목길은 사방치기를 할 수 있을 만큼 널찍했다. 지금은 아이 손잡고 시장 한번 다녀오기도 조심스럽다. 길 양편으로 빽빽이 주차한 차들 틈을 또 다른 차가 5분이 멀다 하고 곡예를 하듯 밀고 들어온다. 아이들이 놀 곳이 사라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놀이터 기능을 해온 골목과 공터는 차들에게 자리를 내준 지 오래. 아파트 역시 가장 넓은 공간은 주차장 몫이다. 놀이터마저 자동차들이 차지했다.
아이들이 인라인 스케이트라도 탈라치면 수시로 차와 부딪힐 위험에 맞닥뜨린다. 도시는 모든 욕구를 기능에 따라 분절하고 구획한다. 옛날 아이들은 공터에 모여 떠들고 노래하고 놀이하고 구경했다. 그곳에서 모든 놀이가 가능했다. 요즘엔 수다를 떨고 싶으면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으로, 노래를 하고 싶으면 노래방으로, 게임을 하고 싶으면 PC방이나 게임방으로 달려가야 한다. 다 함께 어울려 놀던 골목길에서 밀려난 요즘 아이들은 이렇듯 탁한 실내의 개별 공간 속으로 숨어든다.
방과 후에도 뛰어놀지 못하고 학원에 가야 하는 아이들. 지나친 학습은 어린이들의 건강을 뺏을 수 있다.
차량통행이 비교적 적은 학교 앞 골목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놀이판을 펼쳤다. 고무줄, 비석치기, 공기놀이, 제기차기 같은 전래 놀거리를 보고 대다수 아이가 흥미로워했다. 하지만 정씨가 자랄 때처럼 책가방 던져놓고 나와 해가 꼴딱 넘어갈 때까지 놀다 가는 아이는 드물었다고 한다.
수면·운동 부족, 영양만 과잉
지난 7월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우리나라 학생들의 평일 학습시간이 8시간에 육박한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에 비해 영국 아이들은 4시간, 독일 미국 일본은 5시간 남짓에 불과하다. 초등학교부터 학원을 전전하며 공부에 ‘올인’하는 우리 아이들은 공터를 만들어놓은들 놀 시간이 없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김기현 연구위원은 “놀 시간이 없다 보니 놀이공간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수요가 줄다 보니 놀이공간은 더욱 조성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안타까워했다.
정씨는 “아이들에게 놀이란 공기 같고 생혈 같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놀이를 빼앗긴 요즘 아이들이 극심한 호흡부족으로 창백해지는데도 경쟁의 논리에 빠진 어른들은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정씨는 “더 늦기 전에 어른들이 나서서 아이들을 놓아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어느 순간 무더기로 고사(枯死)해버릴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뛰어놀지 못하는 아이들은 덩치만 컸지 실속은 없는 ‘약골’이 돼가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2008년 학교건강검사 결과에 따르면 초등학교 6학년 남녀 학생의 키는 10년 전보다 각각 2.9cm, 2.2cm 자랐다. 몸무게는 4.9kg, 3.1kg 늘었다. 반면 같은 해 학생신체능력검사에서 1∼2등급을 받은 학생의 비율은 2000년 41%에서 33%로 8%나 줄었다. 최하등급인 4∼5등급은 31%에서 42%로 늘었다.
이렇게 된 사정은 앞에서 봤듯 요즘 아이들의 일상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 의자를 벗어나지 못한 채 칼로리 높은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운다. 제대로 뛰어놀지도 못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김기혁 교수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수면, 영양, 운동의 3박자가 갖춰져야 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수면은 부족하고, 운동은 거의 하지 않는데 영양만 넘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시간을 쪼개 운동하라”고 충고하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중학생 오충훈(가명·14) 군의 하루는 직장 다니는 아버지보다 더 일찍 시작하고 더 늦게 끝난다. 월·수·금요일엔 학교에서 돌아와 간식을 먹자마자 종합학원행 셔틀버스에 오른다. 학원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는다. 화요일에는 2시간짜리 학력평가를 받으러 학원에 간다. 목요일 하루 겨우 쉬지만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진 오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고 한다.
그래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음악이나 들으며 방 안에서 뒹군다. 반 아이들은 이런 충훈이를 “학원 적게 다닌다”고 부러워한다. 얼마 전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위원회는 학과목 수를 줄이는 대신 과목별 이수시간의 20% 안에서 학교별로 수업시간을 증감할 수 있게 해주자는 ‘미래형 교육과정 구상안’을 내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렇게 되면 입시 과목에 밀려 체육, 음악, 미술 같은 과목은 지금보다 더 ‘찬밥’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김기혁 교수는 “국가 백년지대계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아이들의 건강을 염려한다면 기본적인 학교 체육이라도 강화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