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변호사
‘문제는 정치다.’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낳는 원인이 정치라는 것이다. 저명한 경제학자로서 전공이 아닌 분야를 근본원인으로 지목한다는 것이 마음 편하진 않았으리라. 그 또한 책에서 불가피하게 생각을 바꿨다고 고백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문제는 정치’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먼저 깨달은 쪽은 보수세력이다. 보수세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10년간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전 사회적으로 거대한 대결구도를 조성했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지금, 그들은 한국 사회를 바꾸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가히 ‘한국 사회의 권력지형 재구조화’라고 할 만하다.
‘정치 통해 한판 붙자’ 결기 느껴져
학습효과 때문인지, 위기감의 발로인지 몰라도 개혁이나 진보를 표방한 시민단체들도 이제 정치의 힘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 10월19일 정치운동을 표방한 ‘희망과 대안’이 창립대회를 가진 것이 대표적인 움직임이다.
‘희망과 대안’은 이 자리에서 좋은 정치세력 형성 지원, 정책 중심의 정치연합에 대한 담론 형성과 모색, 사회·정치 현안 같은 대국민 메시지 발표, 정치권과의 원탁회의, 지방선거를 계기로 한국 민주주의 균형 회복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협력 및 지원 등 5대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이 모임의 ‘얼굴’인 박원순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시민단체는 초정파적 활동을 해왔습니다. 공공성을 지향할 뿐이지,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늘 기계적 중립이나 탈(脫)정파에 머무르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몰락 또는 후퇴하는 걸 용납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정치를 통해 한판 붙자’는 선언으로 들어도 무방할 만한 결기가 느껴진다. 시민단체가 정치운동에 나서는 것을 생활정치라고도, 시민정치라고 할 수도 있다. 박 변호사가 추구하는 것이 생활정치라고 한다면, 일본에서 민주당을 도와 정권교체를 이뤄낸 ‘가나가와 네트’의 사례에서 자극을 받은 듯하다. 시민정치라고 한다면, 벤저민 긴스버그 교수의 진단이 참고가 된다.
긴스버그 교수는 시민정치에 대해, 시민이 주도하는 대중민주주의(popular democracy)가 사라지고 소비자나 개별자로 왜소화하는 개인민주주의(personal democracy)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분석한다. 뭐라 하든 시민단체가 정치적 구실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토인비는 “도전이 있으면 응전이 있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보수가 이들 진보 또는 개혁적 시민단체의 정치 참여를 추동한 측면도 적지 않다.
이명박 정부 들어 개혁적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을 끊고 보수단체에 대한 지원을 늘린 것도 하나의 자극이 됐다. 찬반을 떠나, 개혁적 시민단체에 대한 옥죄기 사례는 많다. 지난해에는 환경재단 최열 대표에 대한 사법처리 시도가 있었고, 최근에는 박 변호사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고소가 대표적이다. 개혁적 시민단체의 정치운동은 이처럼 전방위 공세에 대한 자위 차원의 응전인 셈이다.
‘희망과 대안’이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권의 개혁진영과 진보진영의 통합을 이뤄내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극도로 위축됐다. 따라서 지금처럼 분열된 상태에서 지방선거와 그 이후 선거를 치른다면 또 다른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게 중론이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시민단체의 조정역이나 산파역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나 숱한 전례를 보면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사실 1997년 대선 이후 개혁진영이나 진보진영이 대동단결 또는 대통합의 틀을 갖춘 적은 한 번도 없다. 김대중 정부 시절 새천년민주당이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을 기민하게 활용한 적은 있다. 그러나 이는 애초 뜻을 함께하는 연대나 통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분열은 지난 제17대 총선을 기점으로 확연해졌고, 불가역의 기정사실이 됐다. 역설적이게도 개혁세력이 원내 과반수 정당이 되고, 진보세력이 10석을 원내에 진입시키는 등 선거에서의 승리가 그 원인이었다. 그 후 자연스레 양 진영은 힘을 합치기보다 다툴 때가 더 많았다.
각 세력 대통합까지는 아직 먼 길
이런 점에 비춰보면, 비록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동안 각개약진해온 관성과 명분이 쉽게 해소될 것 같지 않다. 현재 시도되는 반(反)MB 전선 구축에도 각 세력이 이견을 표출하고 있는 것처럼, 아직 갈 길이 멀다. 각 진영이 분명한 자체 리더십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약점이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모두 고사(枯死)한다는 위기의식은 지속적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연합정치의 필요성만큼은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 요인이다. MB의 높은 지지율과 보수개혁 드라이브도 재촉 요인이다. 만일 노동을 비롯한 사회세력과 ‘희망과 대안’을 중심으로 한 시민세력이 함께 통합을 강제하고 국민여론이 적극 호응한다면, 성공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희망과 대안’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구실은 새로운 인물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초점은 방법론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했던 ‘수혈 모델’이 재현되긴 힘들다. 양김(兩金)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없는 상황이다 보니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뭔가를 보증할 수 없는 형편이다. 공천이라는 기득권에 목매는 기성세력의 반발을 제어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 경로가 있을까. 먼저 협약(pact)에 의한 길이다. 노선, 정책, 조직 등 정당의 모든 요소를 망라하는 사안들에 대해 협약을 맺고 세력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일종의 선별적 포섭(co-optation)으로, 정치권과 시민세력 간 합의가 도출되지 않았을 때의 선택이다. 마지막으로, 시민단체가 포기하고 손을 드는 것이다.
‘희망과 대안’의 처지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 친노신당, 그리고 여기에 시민세력이 함께 뭉치는 대통합이다. 통합구도를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새로운 인물도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창조한국당이 들어갈 수도 있다. 또 민주당에서 일부 이탈하거나 한나라당 또는 자유선진당의 일부가 동참할 수도 있는데, 가능성은 있지만 현실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개혁적 시민단체의 정치 선언과 관련해 주목되는 점은 박 변호사의 행보다. 그동안 꾸준히 잠재적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그다. 개혁진영이나 진보진영을 막론하고 유의미한 대권주자가 없는 사정도 있다. 따라서 자칫 다 물거품이 되고 박 변호사의 출마 여부만 덩그러니 남을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운동(movement)의 결과가 아닌, 개인의 결단 차원에서 나서는 모양새로는 성공 가능성이나 소구력이 현저히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