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터니 곰리, ‘One and Other’, 2009.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평범한 남성 ‘조각’의 모습. 전쟁 영웅인 넬슨 기념비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영국의 제해권을 공고히 한 이 전쟁의 이름을 따서 만든 트래펄가 광장(Trafalgar Square)은 런던 한가운데 있는데, 대중 집회의 주요 장소이자 주변에 내셔널갤러리를 비롯한 각종 미술관이 밀집해 전 세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광장 정면에는 해전의 영웅인 넬슨 제독 기념비가 위용을 과시하고 있고, 광장의 4개 대좌(동상 받침대) 중 3개는 조지 4세를 비롯한 남성 영웅들로 채워졌습니다. 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나머지 1개 대좌는 거의 180년 동안이나 비어 있었죠. 이곳에 무엇을 세울 것인지는 그동안 많은 사람의 관심사였는데요.
런던 시는 4번째 대좌 프로젝트(The Forth Plinth Project)를 통해 복제양 돌리, 다이애나 비, 넬슨 만델라 등 무려 275개의 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프로젝트 추진위원회는 “영국이 기념해야 할 대상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고 선언하면서 영국의 현대미술 작품들을 전시하기로 결정했죠.
이 결정에 따라 1999년 마크 윌링어의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를 시작으로 몇 년에 한 번씩 대좌 위에 전시된 작품이 바뀝니다. 이때마다 영국은 물론 전 세계가 떠들썩해지는데요. 특히 마크 퀸의 ‘임신한 앨리슨 래퍼’(2005)는 선천적으로 팔이 없고 다리가 짧아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사진작가 앨리슨 래퍼의 임신 8개월째 모습을 조각한 작품으로 장애, 여성, 임신이라는 반(反)영웅적 요소를 담아 큰 이목을 끌었죠.
그런데 몇 년 만에 또 한 번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지금 전시 중입니다. 앤터니 곰리(Anthony Gormley)의 ‘One and Other’(2009)가 그 주인공이죠. 곰리는 조각상 대신 100일 동안 2400명이 한 시간씩 대좌에 올라가 조각상이 되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는데요. 살아 있는 조각상 1호는 35세의 주부 레이첼 워델로 “학대받는 아이들에 대한 시민의 주위를 환기시키고 싶었다”며 아동보호단체 문구가 적힌 풍선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특별한 이슈를 들고 대좌에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목격한 ‘조각’은 대좌 귀퉁이에 화분을 놓고 의자를 편 뒤 잡지를 읽는 것으로 자신의 퍼포먼스를 마무리한 평범한 남성이었죠. 곰리는 “영웅만이 오를 수 있는 대좌에 일반인들을 올림으로써, 이상화한 영웅과 특권을 가진 지배계급의 광장을 민주화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살아 있는 조각상들은 무작위로 선발됐기 때문에 작가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술에 취한 참가자가 대좌 위에서 술주정한 적도 있어요. 100일 동안 지속될 곰리의 프로젝트는 조각과 영웅의 기존 의미를 전복하는 것은 물론 현재 가장 뜨거운 이슈부터 일상적 모습까지 영국의 오늘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예술을 감상만 하던 이들에게 스스로 예술이 될 기회를 준, 참 영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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