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덧 ‘촛불’은 반정부의 상징이 됐다. 경찰은 ‘법치’를 내세워 촛불을 끈다. 그러자 ‘독재’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정부는 중도 깃발을 들었다.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누가 보수이고, 누가 진보인지 구분도 희미해졌지만,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더욱 극렬해지는 양상이다. 도대체 왜? 대표 논객 4명에게 2009년 대한민국 정체성 혼란의 원인과 이념갈등의 현주소를 물었다.
“따뜻한 밥 먹여주는 진보, 평화주의 바탕으로 합리적 정책 펴는 보수 필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면 진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보수인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북 지원에 찬성하면 좌파, 반대하면 우파라면 대북 지원을 가장 많이 하는 현대그룹은 좌파 재벌인가?
모든 사안을 보수와 진보, 둘로 쪼개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보수 아니면 진보를 강요하는 풍토가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우리의 보수-진보 구분법은 특수한 이념적 지형 아래 놓였다. 선진국들은 대개 경제 정책에서의 시각 차이, 즉 친(親)자본이냐 친서민이냐에 따라 보수-진보가 갈린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에게 딱지 붙이는 용도로 보수-진보를 애용한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를 ‘좌파’라고 말하는 것은 ‘빨갱이 아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나는 참여정부에 대해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측으로 갔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참여정부는 진보인 듯 행동했지만 실제 정책에서는 한나라당과 큰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오래도록 보수-진보 논쟁을 벌였지만 지나칠 정도의 이념 대결이 있었을 뿐, 아직 제대로 된 보수나 진보가 형성돼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보수와 진보가 제대로, 건강하게 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보수와 건강한 진보란 각자의 정책으로 정정당당하게 대결하는 세력이다. 국민이 보수와 진보가 내놓은 정책들을 비교하며 사안별로 지지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추상적 이념을 가지고 어느 편인지 구분하는 것보다 정책으로 승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느 쪽이든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설 자리가 없는 지금의 풍토는 위험하다.
진보신당이 추구하는 진보의 가치는 평등, 생태, 평화, 연대다.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고, 통일보다 평화가 중요하며, 다양한 세력의 네트워크로 사회를 발전시킨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러한 가치를 공유한다면 보수라고 해서 적으로만 간주하진 않는다.
괜찮은 진보가 있어야 괜찮은 보수도 있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보수세력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제대로 된 보수정책을 펼치길 바란다. 물론 전쟁을 추구하는 보수세력은 우리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평화주의 원칙 위에서 합리적 정책 대결을 펼치는 보수세력이라면 기꺼이 페어플레이 해보고 싶다.
참여정부 때 양극화가 더욱 심해졌고, 경제민주주의가 손상됐다. 그래서 국민은 ‘진보는 국민을 못 먹여 살린다’며 등을 돌렸다. ‘보수가 먹여 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국민이 이명박 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므로 진보세력은 앞으로 국민을 먹여 살리는, 경제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따뜻한 밥을 먹여주는 진보’가 돼야 한다. 이제 진보도 경제를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보수우익 정치인 출신도 아니고, 대선 때만 해도 ‘실용’을 강조했다. 그러나 대단히 이념적으로 흐르고 있어 걱정이다. 정부 출범 이후 이념적 대립을 부추기고 상대를 몰아쳤다. 10년간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는 것인데, 그건 고려하지 않고 전 정권이 임명한 인사들을 모두 내쳤다. 그로써 자기 사람 임명할 자리를 만든 것 외에 무슨 덕을 봤는지 묻고 싶다. 그게 밥을 만들었나? 일자리를 만들었나? 매우 실용적이지 못하다.
이명박 정부가 최근 내놓은 중도강화론이 포장에 그칠까 우려된다. 그린 정책을 말하면서 원자력발전소를 짓겠다 하고, 강을 파헤치기 위해 색깔만 녹색인 삽을 들고 있다. ‘서민 프렌들리’ 정책도 립서비스에 그칠 공산이 크다. 제발 내 예상이 틀리길 바란다.
정리·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외환위기 충격 속 보수-진보 세분화 … 의견 차이 커 사회통합 어려워”
우리나라의 국민 의식은 정말 간단치 않다. 2007년 대선 투표율은 62%였고, 지난해 4월 총선 투표율은 46%였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무당파층이 평균 50% 이상이다. 이런 지표들은 국민의 탈정치화 경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지난해 촛불집회 때는 전국적으로 100만명이 모였다. 올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는 5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참여했다. 집회와 영결식에 참여하는 것 역시 정치의식의 표출이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탈정치화’와 ‘재정치화’라는 양면성이 공존한다. 이 개념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 ‘천의 고원’에 등장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같은 양면성은 한 개인에게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지난해 총선에서 투표는 하지 않았지만 촛불집회엔 참석한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할까? 촛불집회는 정치적 함의가 큰 행위이고 투표보다 수고로운 행위다. 이게 바로 이중적인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지난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끈 것은 사회운동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은 금융실명제와 소액주주운동, 호주제 철폐운동, 동강 살리기 등 실제 우리 사회 민주화에 기여한 이슈들을 이끌었다.
정당이 먼저 제기해야 할 이슈들을 시민사회단체가 들고 나선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정당정치가 제도화하지 못했고, 취약하다는 증거다.
한편 우리 국민은 ‘운동의 정치’를 신뢰하는 경향이 강하다. 2000년 국회의원 낙천낙선운동, 2002년 한미주둔군지휘협정(SOFA) 개정운동,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집회, 그리고 지난해 촛불집회와 올해 노 전 대통령 추모 노제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기존의 정당정치에 실망과 환멸을 느낀 국민이 시민운동의 정치에는 신뢰를 보내면서 우리 사회에 탈정치화와 재정치화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이다.
2004년에는 이른바 뉴라이트라는 보수적 시민사회도 능동화됐다. 시민사회단체도 과거처럼 진보적 단체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적 단체들이 등장하면서 대립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운동의 정치는 오히려 활성화됐다.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정치적으로 민주화하면서 보수 대 진보의 구도는 자연스럽게 정립된다. 그 사회가 고도화하면 탈이념화가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수준에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87년 이후 2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진보세력들이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본다.
김영삼 정권에 이어 김대중 정권까지 진보세력은 보수세력과 연대해서 정권을 잡았다. 진보세력이 자립해 보수세력과 정면대결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커진 시기가 바로 노무현 정권 때다. 진보와 보수의 일대 격돌은 불가피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절반 이상을 확보하면서 정치적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진보세력은 사회적 소수였다. 노무현 정부가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 판도는 완전히 역전됐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등 보수세력이 정치적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40%를 넘지 못하는 이명박 정부나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보면 사회적으로는 소수로 전락했다. 사회적 다수와 정치적 다수가 일치해야 제대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데, 사회적 여론의 중심은 반대편에 가 있는 것이다. 사회적 저항도 강하고, 정책도 제대로 추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치열하다. 보수와 진보라는 사회 이념이 해방과 분단, 전쟁과 냉전체제 등 불행한 역사적 경험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우리 국민은 30%는 보수, 40%는 중도, 30%는 진보라고 답한다. 하지만 성장과 복지 등 경제사회 정책과 북한 문제 같은 외교안보 정책에 대해서는 보수 대 중도 대 진보의 견해가 각각 40%, 20%, 40%로 나타난다.
전체 성향은 ‘단봉낙타형’ 그래프를 그리는데, 개별 사안에선 ‘쌍봉낙타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 합의가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통합이 쉽지 않은 이유다.
여기에 1997년 외환위기는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충돌을 가져오면서 보수와 진보의 새로운 구별기준을 만들었다. 보수는 개발독재론을 지지하는 민족주의적 보수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계주의적 보수로 나뉘었다. 진보도 민족주의적 진보와 세계주의적 진보로 세분화했다. 민족주의적 진보는 민족해방파 그룹이고, 세계주의적 진보는 반전평화운동을 주도하는 그룹이다. 포스트모더니즘 경향도 새롭게 나타났다.
세계화에 따른 외적 강제로 나타난 이런 분화는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과제를 안겨줬다. 보수세력에게는 국민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진보세력에게는 경제위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과거와는 다른 현실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라는 과제다. 양측 모두 이 과제를 푸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의 불통정치에 국민 상당수가 불만을 갖고 있고, 그렇다고 진보세력이 매력적인 대안도 아닌 것을 보면 말이다. 이게 정확한 우리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다.
정리·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보수-진보는 없다, 애국자-반역자만 있을 뿐”
진보는 역사적 발전을 추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소위 진보라고 하는 사람 중에서 진짜 진보가 있는가? 불행히도 진정한 진보라고 불릴 만한 세력이 현재 대한민국에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로 나누려고 해도 나눌 수가 없다. 현재의 대립구도를 보수와 진보의 패러다임을 대입해 바라봐서는 안 된다. 언론 역시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보도하는 태도는 국민을 속이는 짓이다.
진보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김정일 독재를 옹호하면서 어떻게 진보라고 부를 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국어사전에서 ‘진보’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꿔야 한다. 인간 발전의 기회를 말살하고, 후퇴를 가져온다는 측면에서 ‘진보’가 아니라 ‘퇴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이들을 진보로 부르기를 거부한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느냐, 헌법에 대해 찬성하느냐,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존중하느냐에 따라 애국자와 반역자만이 있을 뿐이다. 애국자와 반역자, 우파와 좌파 이것이 정확한 구분이다.
한국의 우파세력은 헌법수호 세력으로 근대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룩했다. 우파와 좌파 간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한미 FTA와 노 전 대통령의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우파는 노 전 대통령이 싫었지만 노 전 대통령이 체결한 한미 FTA는 지지했다. 그 행위가 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파는 한미 FTA 체결이 자기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노 전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 우파는 사실을 기초로 해 판단하지만 좌파는 자기 신념에 따라 판단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10년 만에 보수정권이 출범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지난해 ‘촛불난동’(조갑제 대표는 ‘촛불시위’가 아니라 ‘촛불난동’이라고 표현해달라고 분명하게 요구했다) 이후 국가 정체성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위기에 봉착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한국이 자유통일 일류국가를 이룰 수 있을지 걱정된다.
한국의 여론은 선동방송에 의해 비정상적인 측면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지난해 촛불난동의 주도세력은 분명히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친북좌파 세력이었다. 그들을 따라 광장으로 나온 대중은 ‘PD수첩’을 비롯한 MBC, KBS 등 조작, 선동방송에 속은 사람들이었다. 무조건적으로 이들 여론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제대로 된 검증이 필요하다.
검증을 통해 비정상적인 여론으로 판단된다면 과감히 배척해야 한다. 거짓에 속은 대중을 철저하게 관리하면 두 번 다시 촛불난동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사실에 따라 여론을 검증하고, 법으로 판단해 명백히 잘못된 여론은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다.
젊은 세대가 경제적인 부분은 실리적으로 판단하는 반면, 좌에 가까운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는 것은 자기모순적 위선이다. 현재 10만명이 넘는 학생이 미국에 유학을 가 있다. 미국 문화를 거리낌 없이 즐기면서도 입으로는 반미를 외친다. 정신분열증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양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전교조 등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교육을 주입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교육을 바로잡는 노력이 시급하다.
정리·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전원책 변호사
“MB정부 중도실용, 정체성 혼란 부추겨 … 이념 바탕 없는 중도는 위험”
지난해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한 보수 인사는 ‘보수는 마지막으로 패배하고 있다’고 비관적인 글을 썼다. 그 예측은 빗나갔다.
1년이 지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촉발된 조문 정국 때, 보수진영은 회복 불능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엄격히 말해 이 두 사건은 모두 이념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언론을 비롯한 우리 사회는 이념으로 재단하고 있다.
명백히 진보적 사고를 하는 이가 자신은 보수라고 우기고, 보수적 주장을 하면서도 스스로는 진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감세정책과 정부 역할 축소를 지지하면서도 자신을 진보라 믿고, 그 반대의 생각을 하면서 보수라고 여기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된 데는 출신지역 탓도 있을 것이고, 지지하는 정당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정치인부터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누는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다. 상당수 민주당 의원은 생각이 보수주의에 가깝다. 그런데도 대북 햇볕정책에 동조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도 진보파가 돼 있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정책토론을 하다 보면 몇몇 의원은 진보적 성향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대북 포용정책에 반대하기에 보수파로 불린다. 대북 포용정책에 동조하느냐 여부가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잣대가 된 것이다.
청년층은 당연히 진보에 우호적이다. 청년들은 변화에 능동적인 데다, 청년 시절에는 누구나 휴머니즘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과 대화해보면 의외로 보수주의적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
청년층 역시 출신지역과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에 따라 특정 이념에 기운다.
결국 이런 정체성의 혼란은 일천한 민주주의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역주의에 바탕을 둔 3김 정치의 후유증도 빼놓을 수 없다. 이념과 정책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뭉치다 보니 우리 정당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한나라당, 민주당 할 것 없이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혼재돼 있다. 우리 정당 중에 서민과 중산층을 위하지 않는 정당은 없다. 색채가 뚜렷한 정당은 좌파의 정강정책을 내걸고 있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뿐이다.
자유선진당이 당명에 ‘자유’를 넣고도 보수적 색채를 뚜렷이 하지 못하는 건 한나라당과 다를 바 없다. 대북정책에서 한나라당보다 강경한 ‘원칙주의’를 강조한 나머지 보수정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 열린우리당은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 실패한 경우다. 권력이 만든 정당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나라당도 여당이 되면서 과거보다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졌다.
정체성의 혼란을 부추긴 것은 또 있다. 대통령부터 취임사에서 이념을 넘어 실용으로 간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아닌 중도주의를 내세웠다. 몇몇 언론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이념적 바탕이 없는 실용은 없으며, 산술적 중도도 있을 수 없다.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반대파 달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대통령 스스로 이념적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은 데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 둘 다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 가장 염려되는 것은 북한이 핵과 선군정치를 포기하지 않는데도 화해를 위해 상호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말은 잘못된 대북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국민의 정체성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라는 점이다.
전원책 변호사 junwt@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