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감염 절도 피의자가 주로 활동했던 제천 청전동 유흥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에 대한 선정적 관심은 잦아들었지만, 제천은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다. 보건소에는 ‘혹시나’ 하고 에이즈 감염 검사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이어지고, 감염자 관리를 어떻게 했느냐는 지역민의 항의도 빗발친다. 택시업과 유흥업소 등이 큰 타격을 입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 지역 경찰은 “범인을 잡았다고 자랑할 처지가 아니다”라고 한다.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 역시 범인의 추가 혐의를 수사하고 공개할 경우 또다시 찾아들 후폭풍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경찰 “에이즈 환자 노려 잡은 게 아니다”
현재 6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에이즈 감염자는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제천뿐 아니라 서울에도 있고 부산에도 있다. 또한 관계기관의 지속적인 홍보로 에이즈 보균자는 정상인과 다를 바 없고, 성관계로 감염될 확률도 0.1~0.3%에 그친다는 사실이 상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고장 이미지에 큰 자부심을 가진 제천 시민들은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 자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에이즈 감염자가 제천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얘기도 나온다. 물론 에이즈 환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절도사건을 선정적으로 보도한 언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있다.
3월24일 제천 시외버스 터미널 앞.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손님들이 탔다 하면 그 얘기만 물어보네. 사건이 크긴 컸어.” “참 성실한 친구인데 이해가 안 가. 어쨌든 조용히 사그라져야 할 텐데….”
이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이 일본에 석패한 것도 대화의 소재가 되지 못했다. 제천 시민들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천경찰서를 찾았다. 경찰은 3월11일 절도 용의자로 검거한 J(26)씨의 에이즈 감염 사실이 크게 알려지는 바람에 일부 지역주민과 에이즈 관련 단체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에이즈 감염자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경찰이 기름을 부은 격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제천서의 한 관계자는 기자를 보자마자 “혹시 택시기사 사건 때문에 왔냐”며 “그렇다면 이제 말할 게 없다”고 손사래부터 쳤다. 상습 절도 용의자를 잡고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처지라고 했다. 그는 사건 수사 과정에서 용의자의 에이즈 감염 사실이 새나가 경찰이 매우 난처해진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저희는 청전동 인근 원룸촌에서 여자들의 속옷과 귀금속, 현금 등이 자주 없어진다는 첩보를 추적해 절도 용의자를 확인하고 검거했을 뿐입니다. 용의자 집을 압수 수색하다가 약통이 나와 ‘무슨 약이냐’고 물었더니 ‘에이즈 치료제’라고 답해서 그때 알게 된 겁니다. 물론 에이즈 감염자가 무분별하게 성접촉을 가진 것은 비도덕적 행위지만…. 만약 당시 용의자가 다른 약이라고 둘러댔다면 보도도 안 됐고, 파장이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겠죠.”
경찰은 J씨가 에이즈 감염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철저하게 보안 유지를 하며 수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검거 당일엔 단순 절도범으로 지역 방송에 단신으로만 보도될 정도였다고. 그런데 다음 날 오후 사건 정보가 외부로 새나갔고, 급기야 그날 자정에 ‘에이즈 감염자’가 제목으로 들어간 첫 보도가 나가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는 것이다.
“제천이 아닌 청주발로 첫 기사가 보도됐습니다. 새벽 5시13분에 지방 방송에서 보도가 나가자 기자들이 몰려들었어요. 더 숨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오전 10시에 브리핑을 했는데, 마치 경찰이 계속 사건 관련 브리핑을 한 것처럼 보였는지 여러 군데에서 항의 전화가 오고 있어요. 곤란한 정도가 아닙니다.”
J씨가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점에 대해 일각에서는 보복심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보복심에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경찰 조사에서 피의자는 콘돔을 안 쓴 이유에 대해 ‘묵묵부답’이었다”고 선을 그었다. 검찰도 이번 사건을 부담스러워해 김모 담당검사는 ‘조사 중’이라며 기자를 만나주지 않았다.
제천 보건당국도 홍역을 치렀다. 김혜련 제천시 보건소장은 이번 사건으로 제천이 언론에 더는 부각되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김 소장은 무엇보다 이 사건으로 에이즈 감염자들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더 커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분(J씨)도 평소 감염치료를 잘 받았어요. 2월4일에도 치료를 받았습니다. 성실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했다고 하는데 왜 그랬는지, 저희도 안타깝죠. 이번 일로 다른 감염자들이 자책할 것 같아 곤혹스럽습니다. 절도죄보다는 에이즈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아요.”
옆에 있던 이국환 보건위생과장도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J씨를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는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합니다. J씨는 꾸준히 치료를 받았고, 4월에도 진료 예약이 돼 있습니다. 대부분의 감염자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편견 없이 봐주셨으면 해요. 요즘엔 식당을 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도 수군거려요. 관리체계가 부실하다며 에이즈 감염자가 누군지 구체적으로 말하라는데, 제가 ‘제천엔 저하고 사건 피의자 딱 두 사람’이라고 말한 적까지 있어요. 숨기는 게 아닙니다. 감염자가 몇 명인지를 따지기보다 에이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는 게 순서라는 거지요.”
사건 이후 J씨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조사된 여성을 포함한 100여 명 정도가 제천보건소를 찾아 에이즈 감염 여부 검사를 받았다. 보건소 측은 이들이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보건소 관계자는 3월25일부터 에이즈 캠페인과 접객업소 위생교육을 실시해 대(對)시민 홍보에 힘을 쏟을 것이라며 신중한 보도를 당부했다.
유흥업소 여성들 사이에 떠돈 소문
J씨는 주로 청전동 원룸촌에 거주하는 유흥업소 종사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었다. J씨도 이곳에 거주했다. 이곳은 인근에 대학이 소재해 유흥업소와 술집이 밀집해 있는데, 흥청거리던 분위기가 사건 이후 싸늘해졌다. 배회하는 취객조차 눈에 띄지 않을 정도. 노래방과 유흥주점 등은 영업에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A유흥주점 사장은 “가뜩이나 경기도 안 좋은데, 사건 이후 손님이 크게 줄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래방 도우미나 유흥업 종사 여성들 사이에선 J씨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다. ‘누구누구가 피의자와 만났다더라’는 얘기가 대부분. B노래주점에서 만난 도우미 여성은 “이쪽에서 일하는 동생이 범인과 만났다는 얘기가 있어 알아보니, 사건이 터지고 나서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더라”고 전했다.
제천의 신(新)번화가인 청전동의 네온사인은 여전히 밤새 돌고 있었지만, 가라앉은 도시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겠지만 편견의 상처는 깊이 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