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15억원을 들인 영화 ‘과속 스캔들’은 저예산물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멕시코 어느 마을에서 떠돌이 악사(마리아치)가 악당과 인상착의가 같다는 이유로 쫓긴다는 아주 간단한 줄거리다. 하지만 돈 안 들인 티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시종 긴박감이 넘친다.
당시 신인 감독이던 로베르트 로드리게즈가 이 영화를 찍는 데 든 돈은 단 7000달러. 물론 모든 스태프 일을 혼자 처리하고 출연진은 가족, 친지 등이 무보수로 봉사해 가능한 일이었다. 지인들의 출연료 등 무형의 비용까지 합하면 제작비는 더 올라갔겠지만 아무튼 초저예산이었던 건 분명하다. (당연히) 직접 시나리오를 쓴 감독은 제작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스쿨버스 한 대, 개 한 마리, 술집 두 군데와 목장 한 곳을 염두에 두고 싸게 찍을 수 있는 시나리오를 썼다.”
‘엘 마리아치’는 모든 영화인의 꿈이겠지만 요즘 한국 영화계에 특히 필요한 기적일 듯하다. 2008년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손해를 보지 않은 영화는 7편 중 1편뿐이라고 한다. 편당 30억원으로 치솟은 제작비 상승 속도와는 정반대로 수익률은 내리막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제작비 거품을 빼자는 움직임이 일면서 저예산 영화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요즘은 10억원 정도면 저예산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제작비 15억원을 들인 ‘영화는 영화다’나 최근 ‘과속 스캔들’의 흥행이 저예산물의 새로운 성공 사례를 쓰고 있다.
자본력 싸움이 벌어지는 영화계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저예산물은 분명 신선한 수혈 작용을 한다. 다만 그것이 유일한 대안이 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저예산물에는 저예산물의 장점이 있는 만큼 대작물에는 또 그 나름의 강점과 문법이 있다. 작가주의적 저예산 영화와 문화이자 산업인 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살린 대작물이 공존하는 다양성도 필요하다.
다양성 공존해야 발전
로드리게즈 감독은 데뷔작의 깜짝 성공에 힘입어 할리우드에 픽업돼 속편 ‘데스페라도’ 등 많은 영화를 찍었다. 할리우드로부터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엘 마리아치’의 속편 ‘데스페라도’에 이은 3부작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를 찍을 때 든 커피 값만 ‘엘 마리아치’ 제작비와 같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7000달러로 세상을 놀라게 한 그가 돈을 마음껏 쓰면서 영화를 만들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내놓을까,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그러나 그의 후속작들이 그런 기대를 충족시켰는지는 의문이다.
저예산 영화로 시작해 할리우드 자본과 만난 이후 줄곧 뛰어난 작품을 내놓은 스필버그는 그래서 돋보인다. 스필버그는 초창기에 독특한 상상력을 살린 저예산 영화로 톡톡히 재미를 봤다. 거의 모든 장면을 차 두 대만으로 찍은 것과 다름없는 ‘결투’라는 TV 영화에서 보여준 솜씨는 ‘우주전쟁’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대작물에서도 여전했다. 우리 영화계에 야문 맛을 보여주는 ‘작은 고추’들과 함께, 덩치 크면서 탄탄한 대작물도 많이 나왔으면 한다. 그래야 영화계에서 일자리 창출도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