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후 7시30분부터 주한 영국문화원 서울교대센터에서 열리는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강좌에서 개빈 어팸 강사가 강의하고 있다.
“평사원이 외국인 임원들과 대화할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그러나 모든 보고서는 영어로 써야 해서 고생이에요.”(최영근 사원)
“보고서 쓸 때 같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게 돼요. 참 민망하죠. 더 잘 쓰면 설득력이 높아질 텐데….”(안용제 사원)
“몇 문장짜리 영어 e메일을 쓰는 데 하루 종일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창한 발음보다 정확한 문장 구사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영어가 유창한 프랑스인 임원들도 ‘아윌꼼박(I’ll come back)’이라고 하거든요.”(이정윤 과장)
홍보대행사 KPR의 PR 컨설턴트 오아나 바보이(가운데) 씨가 동료들과 영문 보고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좌충우돌 영작(英作) 에피소드도 많이 생겨났다. 호주 직원이 보낸 e메일은 ‘바이블’로 통한다. 다들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꺼내 ‘Copy · Paste(복사해 붙이기)’ 한다. 일본 출신의 노부유키 기타 CIO는 어느 날 직원들에게 “e메일에 더는 ‘I’m sorry’를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한국인 직원들은 예의 바른 표현을 위해, 그리고 상대방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 이 표현을 즐겨 썼다. 그러나 영어권 문화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했거나 금전적 배상을 해야 할 때 외에는 이 표현을 쓰지 않는다. 또 직원들은 ‘commodity explanation(상품 설명)’, ‘execute job(직무를 수행하다)’ 등을 자주 썼다. 그러나 김진선 통역사는 “commodity는 일용품을 뜻하므로 insurance product explanation으로, 명령을 수행한다는 의미의 execute 대신 perform one’s job으로 쓰는 게 맞다”고 말했다.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전나진(여·27) 씨는 두 달째 퇴근하자마자 서울 종로 YBM어학원으로 달려가 영작 강의를 듣고 있다. 그런데 그의 목표는 ‘영어로 글 잘 쓰기’가 아니라 ‘영어로 말 잘하기’. 외국인 환자와 대화를 원활하게 하고, 앞으로 국내에 외국계 병원들이 진출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전씨는 “영어회화 수업도 들어봤지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는 수준에선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래서 문법에 맞게 문장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몇 달 전 외국인 환자에게 ‘혀 밑에 알약을 넣고 있다가 3분 후 침과 함께 삼키세요’를 말해줘야 했어요. 그런데 단어 몇 개가 머릿속에서 맴돌 뿐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문법과 영작을 배우면서 차근차근 끊어서 말하면 된다는 걸 깨달았죠. ‘Keep the pill/ under your tongue/ for three minutes,/ then swallow’라고 하면 돼요.”
Writing in English. 직장인들 사이에서 영작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이 증가하는 동시에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 또한 활발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외국인들과 대면해 대화하기보다는 e메일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영문 보고서나 계약서 등을 쓸 일이 더 잦다.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도 우선 발표 내용을 글로 써서 정리해야 한다.
직장에서 speaking보다 writing 할 일이 잦아
홍보대행사 KPR의 최미현 과장은 “클라이언트들 중 외국계 기업이나 해외기업이 많아 영어 사용 비중이 높다”며 “말하기와 듣기 비중이 각각 1이라면 읽기는 3, 쓰기가 5에 해당할 정도”라고 말했다. 애덤 카이틀리 영국문화원 서울교대센터장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e메일이나 인스턴트 메시지, 게시판 등을 통해 텍스트로 의사소통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고 평가했다. 베인앤컴퍼니 서지연 마케팅 팀장은 “다국적 기업에서는 간단한 의견 교환도 e메일을 통해 한다는 특성 때문에 쓰기 비중이 높다”며 “허공에서 사라지는 대화와 달리 e메일은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선호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유학을 준비하는 수험생들 사이에서도 쓰기는 단연 ‘뜨거운 감자’다. 2008년 이후 국내에서 시행되는 토플시험이 모두 IBT(인터넷 기반 시험. 시험과목은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로 전환되면서 쓰기 과목이 주는 압박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비리그 등 미국의 명문 대학 중심으로 각 부문별 30점 만점에 25점 이상을 요구하고 있어 듣기, 읽기에만 익숙했던 한국 수험생들의 발에 불똥이 떨어진 것이다. 경영대학원(MBA) 준비학원 JCMBA 정병찬 대표는 “각 학교 입학 사정관들이 토플의 쓰기와 말하기 점수를 깐깐히 살피기 시작해 ‘토종’ 학생들이 합격하기가 여간 어려워진 게 아니다”고 덧붙였다.
EBS 온라인 서비스 ‘EBS랑’에서 ‘기초영문법’ 강의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한일 강사는 “말을 잘하고 싶다면 먼저 문법과 쓰기를 익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린이들은 들은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그대로 따라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이 능력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빠른 속도로 사라진다. 대신 논리적 사고력을 갖춘 성인들은 읽고 쓰는 능력이 우수하다. 때문에 성인은 우선 읽고 쓴 다음에 듣고 말해야 한다. 한 강사는 “손으로 쓰면 라이팅(writing)이고 입으로 쓰면 스피킹(speaking)”이라며 “결국 둘은 같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대다수 직장인들에게 영작은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다. 새해부터 영국문화원 서울교대센터에서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강의를 듣기 시작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유주현 씨(해외홍보 업무 담당)는 “좀더 강한 어조로 의사를 전달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그냥 넘어갈 때가 자주 있다”고 토로했다. 20년 넘게 한국 기업에서 근무해온 미국인 M씨는 “영어 말하기는 썩 잘하는 한국인도 e메일에서 시제, 관사, 어순 등을 자주 틀린다”며 “그래서 대충 이런 뜻이겠거니 추측하면서 이해한다”고 말했다. KPR에서 PR 컨설턴트로 일하는 루마니아 출신의 오아나 바보이 씨는 “한국어로 말할 때는 매우 공손한 사람도 e메일에서는 직설적으로 표현할 때가 있다”고 지적했다. 종로 YBM어학원에서 ‘1% 문법으로 영작문 쉽게 끝내기’를 강의하고 있는 정은순 강사는 “토익점수가 800점 이상인 수강생들도 do와 does 사용을 헷갈려하고, 주어를 무엇으로 해서 영작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영작 능력 비즈니스의 핵심
“‘어제 사무실에 불이 나갔어’를 영작하라고 하면 ‘office’를 맨 먼저 쓰는 수강생이 절반 이상이에요. ‘The light went out in my office yesterday’라고 맞게 표현하는 사람이 드물지요.”
한일 강사는 “한국어를 그대로 영어로 옮기려는 욕심 때문에 영작이 어려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주 월요일 당신이 발표한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e메일에 첨부해 보내주셨으면 합니다’라는 문장을 쓰고 싶다면, 자신의 영어 수준에 맞게 ‘한국어 문장을 정리한 뒤 영어로 옮기면 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한 강사가 제시한 ‘모범답안’은 이렇다. I liked your presentation last Monday. It was very impressive. Can I have your original presentation? Thank you.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캐나다 대학에 잠시 머문 경험 외에는 줄곧 한국에서 학업을 이어온 최미현 과장은 이러한 ‘토종’의 한계를 독학 영작으로 뛰어넘고 있다. 영어 동화책이나 영문기사 등을 여러 번 읽고 외운 뒤 써보는 것. 최 과장은 “처음에는 몇 단어 못 쓰지만, 꾸준하게 하면 외워 쓰는 문장 길이가 점차 길어진다”고 조언했다.
역시 ‘토종’ 출신인 서지연 팀장은 자기 업무 분야의 자료를 많이 읽고, 거기 나온 문장이나 단어를 따라 쓰면서 영작 실력을 늘렸다. 서 팀장은 “영작을 잘하려면 무엇을 쓸 것인지 명확하게 하는 것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논리력과 사고력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수준급 영작 실력을 인정받는 이들이지만, 자신들에게도 여전한 ‘영작’ 한계가 있다고 한다. “지금도 네이티브 스피커들에게 관사나 쉼표, 콜론의 위치가 틀렸다는 지적을 받는다.”(최미현) “원어민이 보낸 e메일 내용 사이사이의 뉘앙스를 파악하기 힘들 때가 있다.”(서지연)
때론 e메일의 한 문장이 비즈니스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런 이유에서도 직장인들에게 영작은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삼성전자, LG전자에서 약 5년간 근무한 뒤 전직해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는 김대균어학원 차형석 강사는 직장인 시절 영어
e메일 하나 잘못 쓰는 바람에 난감해진 동료 이야기를 들려줬다.
“독일의 한 고객사가 불만 사항에 관한 e메일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납품한 제품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를 상세히 정리한 메일이었는데, 동료 직원이 ‘알겠다. 엔지니어에게 고쳐놓으라고 전하겠다’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죠. 그랬더니 공식 항의 팩스가 날아왔어요. ‘당신들은 정말 프로답지 못하다. 앞으로 거래를 끊겠다’는 내용이었죠.”
차 강사는 “나중에 동료 직원의 해명을 들어보니 그 심정이 이해가 됐다”고 했다. 고객사에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영어로 써야 할지 몰라 간단한 답장을 했던 것이 성의 없다는 인상을 남긴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늘지 않는 것 같다 하더라도, 앞으로 영작은 비즈니스 영역에서 더욱더 큰 중요도를 점할 전망이다. 영작이야말로 영어 사용 능력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서 팀장은 “비즈니스의 핵심은 설득과 협상”이라며 “협상 자리에서는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발언할 내용도 사전에 써서 연습해본 뒤 말한다. 때문에 논리적이고 명료한 영작 능력이 필수”라고 말했다. 바보이 씨는 “정확한 발음보다 정확한 쓰기 능력이 우선”이라며 “비문이 섞인 사업제안서로 어떻게 상대 기업에 신뢰감을 줄 수 있겠느냐”고 조언했다. 국내 대기업에서 글로벌 전략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미국인 에미트 카푸어 씨는 “중간 통역이나 번역 없이 직접 의사소통하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게 할 뿐 아니라 좀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 한다”며 정확한 영작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If your New Year’s resolution is to improve your English, better start with your English writing(모두가 한 가지씩 새해 목표를 결심하는 요즘, 영어를 잘하고 싶은 직장인이라면 영작부터 시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