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김덕진 지음/ 푸른역사 펴냄/ 352쪽/ 1만6000원
그는 두 시간 가까이 장례식장에 머물면서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눴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힘이 넘쳤다.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인간 의지의 원천은 무엇일까? 지금 한국 상황에는 바로 이런 의지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한국 경제가 그야말로 말기암 환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에서는 이런 ‘대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마침 맞춤한 책이 나왔다. 소장 역사학자 김덕진이 내놓은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가 그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경신대기근은 현종 재위기인 1670년과 1671년 두 해 동안 조선을 덮쳐 100만명의 사상자를 낸 최악의 기근이었다. 당시 위기 원인으로 지구 전체를 덮친 ‘소빙기’라는 이상 저온 현상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상황을 간단하게 요약해보자. 봄에 우박과 눈비가 함께 내리더니 한여름에도 우박이 쏟아졌다. 게다가 1670년 내내 전국 곳곳에서 끊임없이 지진이 발생했다. 봄 가뭄과 여름 냉해, 수해에 풍해, 충해까지 5대 자연재해가 종합선물세트처럼 안겨지니 작물이 제대로 자랄 리 없었다. 그로 인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곧이어 전염병과 가축병이 겹쳐 조선 전역을 휩쓸었다. 사상 초유의 식량 고갈에다 유례없는 전염병마저 창궐하자 조선 땅 곳곳에서 백성들은 재해, 염병, 부역 등 3대 악재에 시달리며 한계상황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전염병이 도성까지 덮치자 정승 판서도 입궐을 기피하고 많은 중견 관리들이 서울을 떠나기 위해 사직했다. 어설픈 진휼로 국가재정이 탕진돼 진휼정책이 난관에 봉착하자 많은 사람이 떠돌고, 도둑질을 하고, 살상을 하고, 때로는 변란을 꿈꿨다. 부자들은 기근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해 한 톨의 쌀이라도 아끼려고 자가 소유 노비들의 굶주림을 외면한 채 밖으로 내쫓았다.
책에서는 이런 대위기에 국가와 국민, 왕권과 신권, 집권세력과 재야세력,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서로 얽혀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이 리얼하게 전개된다. 공동 집권세력인 남인과 서인 세력은 확실한 정책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참상 부풀리기나 축소에 몰두한다. 이 모습은 이명박계와 박근혜계가 물밑전쟁을 벌이는 지금의 행태와 자연스럽게 겹친다.
진휼의 폐단 또한 ‘유류 환급’의 폐해와 쌍둥이 꼴이다.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서류상 미비로 외면받는 것마저 어쩌면 그렇게 판박이인지…. 진휼의 파행상을 조사하기 위한 암행어사 파견, 토지세와 균역의 감면, 재원 조달을 위해 신분과 관직을 파는 납속(納粟)의 활용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바닥난 국가재정과 굶주리는 민생 사이에서 고민하는 위정자들의 딜레마는 지금 어설픈 환율정책으로 비난받는 ‘리만브러더스’의 딜레마처럼 느껴진다.
이 책은 이처럼 ‘역사는 늘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면서 반복된다 ’는 깨우침을 주는 데다 마치 소설처럼 쉽게 읽히는 장점도 있다. 다만 아쉽다면 ‘주인공’과 ‘조연’들의 캐릭터가 확실하게 살아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적지 않다. 조선 역사에서 18세기 르네상스 시기는 과도할 정도로 조명받았지만 17세기와 19세기는 공백 상태였다. 저자는 새로운 ‘화법’으로 17세기의 공백을 확실하게 메워주는 성과물을 내놓은 셈이다. ‘소빙기’라는 세계사적 현상으로 조선을 부각한 것이나, 정치사의 한계를 뛰어넘어 17세기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는 것도 대단한 미덕이다.
최근 인문서 출판기획의 큰 흐름 중 하나는 한정적인 시간이나 공간, 또는 한 인물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트리밍함으로써 종합적인 해석과 전망을 내놓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기법을 제대로 보여준 한 전범(典範)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