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한 김나지움에서 진행되는 역사 수업. 독일 전통의 중등교욱 시스템은 독일 학력 저하에 원인을 제공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피사 테스트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00년부터 회원국가들을 대상으로 만 15세 청소년의 독해, 수학, 과학 등의 학력을 평가하는 시험. 3년마다 지금까지 세 번 실시된 이 테스트에서 한국과 일본, 핀란드 청소년들이 매번 상위권을 차지해왔다. 특히 핀란드는 2차와 3차 테스트에서 종합 1위를 했으며, 별다른 사교육 없이 공교육만으로 성취한 결과라는 점에서 다른 국가들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사고 있다.
독일은 1970년대 이래 국제학력비교평가에 참여하지 않다가, 2000년 1차 피사 테스트에서 ‘31개국 중 21등’이라는 성적을 통보받고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힌 바 있다. 학문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깊고,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노벨상을 휩쓸다시피 했기에 독일인들에게 이 성적은 굴욕과도 같았다.
피사 테스트는 국가 사이 비교만 가능할 뿐, 특정 국가 내 지역별 성적 비교는 불가능한 한계가 있다. 특히 독일은 각 주(州) 정부가 독자적인 교육 주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피사 테스트만으로는 교육 현실을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독일은 피사 테스트를 치를 때 국내용 피사-E(Erg‥anzung·보완) 테스트를 병행한다. 사회 여건과 교육시스템이 각기 다른 16개 주 청소년들의 학력을 비교해 향후 교육정책에 참고하려는 의도다.
실업률 20%, 살기 힘든 지역에서 최고 우등생
다른 나라들도 그렇겠지만, 독일에서도 잘사는 지역 학생들이 못사는 지역 학생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는 곧 ‘남부 격차’로 나타난다.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 남부의 2개 주, 즉 바이에른과 바덴뷔르템베르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월18일 발표된 제3차 피사-E 테스트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결과가 나와 독일 사회가 깜짝 놀랐다. 옛 동독의 작센 주가 ‘만년 1등’ 바이에른 주를 제치고 독해, 수리, 자연과학 등 전 분야에서 1등을 한 것이다. 역시 옛 동독에 속하는 튀링겐이 바덴뷔르템베르크를 4위로 밀어내며 종합 3위의 영광을 안았다. 특히 작센의 자연과학 점수는 세계 1위 핀란드를 위협할 정도였다.
독일이 통일된 지 벌써 20년 가까이 됐지만, 옛 동독 지역과 서독 지역의 경제적 격차는 아직도 크다. 옛 동독 도심에는 불 꺼진 집들이 허다하고, 시내 외곽에는 버려진 공장이 즐비하다. 20%에 이르는 실업률을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는 게 바로 옛 동독에 속한 5개 주의 현실이다. 그런데 옛 동독 청소년들이 독일 최고의 우등생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작센과 튀링겐의 승리는 경제력과 학력의 비례관계를 깨는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가지고 크게 흥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독일 교육학자 클라우스 클렘은 경계한다. 그는 “부모의 경제력과 자녀의 학업성취도 사이의 정비례 관계는 여전히 변함이 없으며, 다만 작센 주는 외국인 이민자 비율이 적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라고 분석했다.
피사-E는 테스트에 참가한 5만여 학생의 부모 및 교우 관계 등을 조사했는데, 실제로 단순노무직에 종사하는 부모를 둔 학생이나 부모 둘 다 외국 출신인 학생의 학력은 평균 이하로 나타났다. 작센 주의 이민자 비율이 3.5%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다.
클렘의 가설대로 이민자 가정의 학생들이 전체 성적을 끌어내리는 구실을 한다면, 이번에 종합 4위를 차지한 전통의 강호 바덴뷔르템베르크(이민자 비율 24.8%)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민자 자녀 수가 적은 것은 분명 작센에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작센 승리’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먼저 3차 피사 테스트가 자연과학에 중점을 두고 이 분야에서 전체 문제의 절반 이상을 출제한 것은 작센을 비롯한 옛 동독 지역들에게 행운이었다(1차는 독해, 2차는 수학이 중점). 자연과학은 공산주의 시절부터 옛 동독의 중등교육에서 특히 강조된 과목들이기 때문이다. 작센의 증등학교에서는 5학년부터 10학년까지 주당 평균 25시간의 자연과학 수업이 이뤄진다. 반면 서독 지역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는 주당 20시간에 불과하다. 아비투어(대학수능시험)에서도 작센의 학생들은 물리, 화학, 생물 과목의 시험을 모두 치러야 한다.
학교 제도 개혁이 이미 완료됐다는 점도 성공의 한 원인이다. 작센의 중등교육은 90년 이후로 김나지움과 미테슐레, 2체제로 진행되고 있다. 김나지움은 우리의 인문계 중고등학교, 미테슐레는 실업계 중고등학교에 해당한다.
학교와 교사 권위 아직도 살아 있어
독일의 전통적인 중등교육 시스템은 김나지움, 레알슐레, 하우프트슐레 등 3체제다. 대학에 진학할 학생은 김나지움으로, 기술에 소질 있는 학생은 레알슐레로, 이도 저도 아닌 학생은 기본적 시민의 소양을 익히고 졸업하는 하우프트슐레로 간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어린이는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런데 3체제 중등교육은 그간 여러 비판에 직면해 흔들리고 있다.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인생길을 결정하는 것도, 너무 일찍부터 사람을 차별하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 하우프트슐레는 학생들을 잔반(殘飯) 취급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래서 일부 지역에서는 전체 학교(게잠트슐레)로 중등교육을 단일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작센 주는 일찌감치 문젯거리인 하우프트슐레를 없애 청소년들에게 분명한 인생 지향점을 갖게 했다. 바로 이 점이 작센을 독일 최고의 우등생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작센에서 꼴찌인 학생일지라도 다른 지역 꼴찌보다는 훨씬 뛰어나서 전체 평균에 기여한 바가 높기 때문이다.
또 학교와 교사의 권위가 아직 살아 있다는 점도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예컨대 김나지움은 원래 소수 엘리트만 진학하는 곳이었다. 과거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학생이 뛰어난 학습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교사는 가차 없이 레알슐레나 하우프트슐레로의 진학을 권하고, 학부모는 이에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부모의 소망이 교사의 판단보다 우선시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어느덧 서독 지역 김나지움으로의 진학률이 70%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작센은 서독식 ‘쓰다듬기’ 교육을 허락하지 않았다. 작센에서는 아이를 김나지움에 보내고 싶다면 부모가 의지를 피력할 게 아니라, 수학과 국어에서 ‘우’ 이상을 받은 자녀 성적표를 보여줘야 한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바로 ‘헝그리 정신’이다. 통일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역사의 패배자가 돼버린 옛 동독의 학생들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을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치열한 의욕을 가지고 학업에 임한다. 오랜 공산체제의 경험, 통일 이후 실업 대란, 인구의 대량 유출 등을 겪어오면서 옛 동독인들은 이를 악물고 목표를 달성하는 법을 익혀왔다.
시사주간지 ‘차이트’는 서독에서 작센으로 이주한 그륀아이젠 씨를 소개한다. 그는 처음엔 학교가 자녀에게 과도한 수업 부담을 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곧 작센 학생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매우 잘 참는다. 삶이 가혹하다는 것을, 학교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터득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