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브랜드에서 어젠더는 판매 순위 1, 2위에 오르는 아이템입니다. 남녀 모두 늘 갖고 다니는 데다, ‘시간’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선물로도 인기가 있거든요. 사진의 어젠더들은 모두 에르메스 제품으로, 홍보담당자는 2009년 에르메스의 ‘테마’를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설명합니다.
1월에 산 다이어리는 역시 신선도가 떨어져 부쳐버린 ‘굴전’ 같아요. 신선하고 또랑또랑한 다이어리를 사려면 12월에 사야죠. 한동안은 신상 PDA를 들고 다니는 맛에 다이어리를 쓰지 않았어요. 엄청나게 불편했어요. PDA를 펜이나 손톱으로 두드릴 때 나는 인공적이고 테크놀로지스런 소리는 멋졌어요. 음, 그게 다였죠. 속으론 한 장씩 넘기면 일주일 동안의 일과 약속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날로그 다이어리가 얼마나 그리웠는지요.
그러다 한 후배가 커피 15잔을 마시면 ‘공짜’ 다이어리를 준다며 열심히 드나드는 ‘별다방’에 함께 가느라 저도 못 이기는 척 다이어리파로 돌아왔답니다. 하지만 그 다이어리, 결국 또 다른 후배에게 주고 말았어요. 늘 보는 다이어리만큼 나와 잘 맞아야 하는 물건도 없더라고요. ‘별다방’ 다이어리의 과도한 선과 이모티콘과 깜찍한 타이포를 볼 때마다, 15개 스탬프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사먹은 달고 느끼한 땅콩 커피맛이 기억났고, 펼친 면이 자꾸 접히는 제본 기술은 제 성질을 건드렸죠.
다이어리는 내가 갖지 못한 면을 갖고 있어서 나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구실을 해야 해요. 기억력이 떨어지고 하루에 두 건 이상 마무리할 일이 있고, 꼭 정해진 시간에 ‘마감’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버티컬’ 레이아웃이 가장 편리해요. 즉 다이어리를 펼치면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세로 한 칸을 차지하는 하루 시간에 점선이 쳐 있는 디자인이죠. 그리고 구석에 3개월치 달력이 있어요.
뭐 대단한가 싶지만, 이렇게 시간 ‘짜는’ 아이디어를 1952년에 처음 선보인 프랑스의 ‘쿠오바디스(QUO VADIS)’는 ‘버티컬’의 선두주자로서 지금도 다이어리의 명품으로 꼽힌답니다. 또 19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수첩 ‘몰레스킨(MOLESKIN)’은 일종의 ‘로망’이죠. 몰레스킨은 ‘아멜리’ 등 수많은 유럽 영화에 등장하니 ‘다이어리계의 샤넬’이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샤넬을 100m 밖에서도 알아보게 하는 것이 ‘더블C’ 로고라면, 몰레스킨을 특징짓는 건 표지 밖과 안을 잡아주는 야무진 고무밴드예요(맞아요, 짝퉁 많아요). 최근엔 유럽이나 미국에서 한 교양 한다는 사람들은 일본 장인들이 만든 다이어리를 ‘들어줘야’ 한답니다.
에르메스, 루이비통 등 여행과 함께 발전한 럭셔리 브랜드의 다이어리는 굉장히 인기 있는 아이템이라 매년 ‘매진’을 기록합니다. 에르메스의 경우 2009년 브랜드의 테마가 속지에 프린트된 다이어리를 곧 내놓을 예정이라는데, 구체적인 사항은 ‘극비’랍니다. 커버는 악어, 타조, 송아지 등 고가 소재고 스티치는 말 안장을 꿰매는 장인들의 솜씨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종이와 가죽으로 붙잡아 꿰매서 팔 생각을 하다니, 참 대단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