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군의 엔터테이너 ‘끼’를 무기로 스타덤에 오른 추성훈. 이제 강자와의 경기를 통해 진정한 파이터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굳혀야 할 때다.
유도복 오른팔 부위엔 태극기와 한국어로 쓰인 스폰서가, 왼쪽엔 일장기와 일본어로 표기된 스폰서 업체명이 눈길을 끈다. 국적은 일본이지만 재일교포 4세로 순수 한국인의 혈통을 지닌 추성훈의 현실이 유도복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면이다.
한국에서 절대적인 인기와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추성훈은 오히려 일본에선 ‘찬밥’ 신세다. 추성훈이 등장하는 무대에선 으레 일본 관중의 야유와 비난이 뒤따르고 일본 팬들은 일본 국적을 가진 추성훈을 자신들과 같은 동포로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 팬들이 추성훈에게 등을 돌린 가장 큰 원인은 그 유명한 사쿠라바전에서 있었던 ‘로션 사건’ 때문이다. 그 사건으로 추성훈은 ‘악마’의 이미지로 자리를 굳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런 추성훈에 대한 안티 문화가 K-1 흥행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선 인기와 관심 일본에선 ‘찬밥’
추성훈은 ‘드림 6’ 대회를 앞두고 오랫동안 상대 선수를 고르느라 진을 뺐다. 결국 무명이나 다름없는 도노오카 마사노리(35·일본 정도회관)를 점찍었지만 항간에선 ‘너무 약한 상대만 고르는 것 아니냐’며 비난이 거셌다.
이를 의식한 것일까? 추성훈은 경기 전 열린 기자회견에서 헤비급에 도전하겠다는 도발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도노오카 마사노리를 ‘예상대로’ 가볍게 제압한 뒤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출신이자 일본 최고의 영웅 파이터인 요시다 히데히코(38)에게 ‘후배의 도전을 받아달라’며 정식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모든 것은 사전에 일본 K-1 주최사인 FEG와 사전 협의된 사항이 아니었다. 헤비급 도전은 한낮의 해프닝으로 끝났고 요시다에 대한 도전도 성사되기 어렵다는 게 격투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일본 내에서의 비호감 선수를 K-1 측에서 A급 스타로 관리하는 것은 한국에서 불거진 추성훈 열풍에서 비롯된다. FEG의 다니가와 사다하루 대표는 지난 6월 드림콘서트 무대에 오른 추성훈과 앙드레 김 패션쇼에서 메인 모델로 선 추성훈을 직접 현장에서 지켜보며 새삼 그가 한국에서 차지하는 인기를 실감하게 됐다. 더욱이 잇따른 CF 출연은 K-1 관계자들에게 추성훈의 존재감을 인식시킨 절대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추성훈이 이렇게 인기 스타플레이어로 올라서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FEG코리아 양명규 대표이사는 “지난 2월 출연했던 ‘무릎팍도사’가 결정적이었다”면서 “그 전에는 추성훈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지만 그 프로그램 출연 이후 그의 인간적 내면에 매력을 느낀 팬들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추성훈은 당시 ‘무릎팍도사’에서 자신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국적을 바꾼 경위와 한국 유도계의 심한 파벌 싸움으로 제 기량을 펼치지 못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즉, 모 대학 출신 선수들의 텃세로 인해 선수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웠다는 이른바 ‘양심선언’으로 일부 유도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러나 추성훈은 2002년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으로 귀화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국내 유도계의 심한 텃세와 해외파 출신에 대한 차별 때문인가”라는 질문에 “그런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게 모든 이유는 아니다. 같은 체급 세계선수권자였던 조인철(은퇴 전까지 추성훈을 상대해서 1패만 했던 당시 국내 유도계 1인자)을 이길 실력이 모자랐다. 한국 유도는 뿌리가 깊고 선수층이 두꺼웠다. 내가 일본으로 돌아간 건 유도를 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런 환경을 제공해줬다”고 말한 바 있었다. 즉, 추성훈이 ‘무릎팍도사’에 나와 유도계의 심한 텃세를 견디지 못해 일본으로 귀화했다는 내용과 6년 전 필자한테 직접 했던 말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 당시 추성훈은 귀화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번복하는 등 매끄럽지 못한 태도로 비난을 받았었다. 이에 대해 추성훈은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힘들게 지내다 일본에 가면 굉장히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속병 없이 마음 편히 유도만 할 수 있을 거라는 유혹이 날 이끌었다”며 일본 귀화 발언을 번복한 부분에 대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기도 했었다.
추성훈이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기 직전인 지난해 11월, 필자와 일본 도쿄에서 인터뷰를 약속한 적이 있었다. 한국 내에서도 추성훈에 대한 존재감이 조금씩 뿌리내리려 했던 시점이라 추성훈의 매니지먼트사는 인터뷰에 긍정적 태도를 보였고, 추성훈과 직접 통화해 인터뷰 시기를 잡으라며 연결해줬다.
추성훈과 전화로 인터뷰 일정을 잡고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인터뷰 약속을 정한 추성훈은 난색을 표하며 자꾸 만남을 연기하려 했다. FEG 측으로부터 정식 허락을 받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FEG는 추성훈의 스케줄이나 인터뷰 일정과 관련해 어떤 권한도 없었다. 추성훈이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건만 무슨 이유에선지 추성훈은 FEG를 핑계대며 필자와의 만남을 꺼렸다.
추성훈‘인기’ 냉정하게 평가해야
추성훈은 유명세를 타고 있는 지금도 방송 아닌 언론과의 인터뷰는 주저하는 편이다. 방송도 되도록 출연하지 않겠다는 주의다. 이유는 신비주의를 지속시키고 싶은 마음에서다. 공식 기자회견 외에 추성훈의 인터뷰가 일절 나오지 않는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
한국에서 추성훈의 인기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FEG코리아 양명규 대표이사는 “어느 면에서는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도 있다. 그러나 대회를 통해 좋은 성적을 내고 강한 파이터랑 맞붙어 화끈한 경기를 선보인다면 추성훈의 인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 전망했다.
반면 격투기 전문인 조용직 기자는 “추성훈이 갖고 있는 진짜 실력에 비해 어느 정도 과대 포장된 부분이 있다”면서 “남성적인 카리스마와 운동에 대한 열정 등이 추성훈의 남다른 출신 성분과 성장과정 등과 함께 맞물려 일반인들에게 신비한 매력으로 다가온 면이 있지만, 추성훈이 진정한 파이터로 거듭나기 위해선 지금까지 싸운 상대보다 월등한 실력의 ‘쎈놈’들과 맞붙어 이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추성훈과 아키야마 요시히로. 국적이라는 경계선을 넘나들며 일본인도 되고 한국인도 되는 그가 진정 팬을 위해서라면 이젠 엔터테이너의 기운을 걷고 진정한 파이터로 인식돼야 한다. 11월과 12월 한국과 일본에서 두 차례 경기를 더 치를 예정인 추성훈이 겉으로 포장된 것이 아닌 진정한 ‘쎈놈’으로 부각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