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세계’의 주인공은 디아스포라들이 아니라, 그들을 불법적으로 고용하고 불법적인 일을 알선하는 런던의 멀쩡한 중산층 혹은 중하 계층이다.
켄 로치의 새로운 영화 ‘자유로운 세계’는 바로 이 디아스포라,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냉철하고도 성찰적으로 다룬 신작이다. 물론 블루칼라의 시인이자 노동자들의 십자군인 켄 로치가, 전 세계가 인정하는 영화계의 양심인 그가 이주 노동자 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신기한 것이 있으랴.
그러나 ‘자유로운 세계’의 주인공은 디아스포라들이 아니라, 그들을 불법적으로 고용하고 불법적으로 일을 알선하는 런던의 멀쩡한 중산층 혹은 중하 계층이다. 그들의 시선으로 그들의 인식의 거름망으로 걸러진 현실을 들여다보라니, 결과적으로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이란 스크린에 직면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게 한다.
사실 주인공 앤지는 처음에 누구나 동정할 수밖에 없는 계약직 노동자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여성, 저학력, 싱글맘, 노동자 계층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그녀는 이주 노동자들의 처지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앤지는 친구인 로지와 함께 ‘번듯한 사무실을 차릴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사업을 시작하지만, 점차 여권 없는 노동자들을 불법으로 고용하면 탈세를 통해 막대한 현금을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서 ‘자유로운 세계’의 역설과 풍자가 생겨난다. ‘자유롭다’란 말에서 드는 반어적 물음표는 끈질기게 이 세계의 모순에 천착한다.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했던 앤지는 젊은 남성 노동자들을 불러 성적 착취를 하고(물론 그녀 처지에서는 화끈하게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었지만), 인간적인 삶을 희구하면서도 인간적인 삶을 희구하는 노동자들의 꿈을 짓밟게 된다(물론 그녀는 그렇게 해서라도 일을 주는 것이 낫다고 보지만). 즉 자본은 어떤 시절, 어떤 땅의 백성도 타락시킬 수 있는 현대의 ‘절대반지’인 셈이다.
자주 등장하는 오토바이는 이기적 야심의 상징물?
오토바이의 번쩍거리는 몸체는 바로 이기적인 야심에 의해서만 살아 움직여, 자본주의의 대로를 누비려는 앤지와 우리,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그대로 반사해준다.
특히 앤지는 과감한 디자인의 오토바이를 몰면서 런던을 누비는데, 지나치리만큼 자주 등장하는 오토바이란 상징을 ‘칼라즈 송’의 버스나 ‘보리밭에 부는 바람’의 자전거 등과 비교해보면 더욱 흥미롭다(이 세 작품은 모두 켄 로치의 절친한 동료인 폴 래버티가 각본을 썼다). ‘칼라즈 송’의 버스보다 훨씬 개인적이고 ‘보리밭에 부는 바람’의 자전거보다 훨씬 가속도가 붙는 오토바이의 번쩍거리는 몸체는 바로 이기적인 야심에 의해서만 살아 움직여, 자본주의의 대로를 누비려는 앤지와 우리,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그대로 반사해준다.
영화의 마지막, 앤지 회사의 무지개 로고를 보고 우크라이나의 아주머니는 자식 둘을 떼어놓고라도 희망을 찾아 런던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과연 희망이란 대안은 있는 것일까. 이전 작품 ‘칼라즈 송’이나 ‘빵과 장미’, ‘레이닝 스톤’에서 그래도 켄 로치는 치유와 사랑을 믿었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세계’의 비전은 그리 화사하지 않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주인공을 완전히 동일시할 수도, 그렇다고 낯선 외국인 노동자에게 온전히 다가갈 수도 없는 관객의 어정쩡한 거리가 딱 현실의 거리는 아닌가.
단 한 번, 오토바이를 몰던 앤지는 폴란드에서 온 젊은 노동자 캐롤을 발견하고 가던 길을 멈춰 뒤를 돌아본다. 아마도 그녀가 단 한 번이라도 이 세계에 대해 뒤돌아볼 수 있었다면, 자신과 아들의 인간성마저 담보로 삼은 이 정글에서 또 다른 포식자가 될 수 있었을지. 켄 로치의 전작 ‘보리밭에 부는 바람’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왔다.
“네가 무엇과 싸우는지는 알기 쉽지만, 네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알기 어렵다.”
‘자유로운 세계’는 이 전망 부재의 시대에 바로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새로운 전망을 주는 영화다. 작지만 의미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