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유배지.
누설하는
모란모란꽃모란모란모란모란꽃!!!!꽃
모란모란!!!!!!!!!!!모란꽃모
란!!!!!!모란모란꽃!!!!!!란
모란이 피어 봄은
명치가 아픕니다.
-장석남 ‘모란의 누설’에서
그렇다면 바다 건너 남제주로 가볼 일이다. 지리적으로 봄은 남제주에서 시작한다. 청년 때부터 제주의 유채꽃에 사무쳤던 시인 김정환이 썼듯, 남제주 곧 서귀포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돌아올 자들만 돌아오게 하는’(시 서귀포에서) 곳이다. 남제주는 호기 있게 둘러보기만 해서는 곤란한, 속 깊은 곳이다. 그러니까 만약 당신이 제주공항에서 차라도 빌려 한라산을 넘어간다고 하면, 그 능선 어디쯤에선가 잠시 숨을 고르며 이제부터는 ‘제주가 아니라 서귀포’로 넘어간다는 다짐이라도 해야 한다.
김정환은 그곳이 ‘유채꽃 만발 무성한 보리밭 노랑 파랑 파도가 마음 온통 설레놓는/ 한라산 슬하, 서귀포에서는/ 돌아와 쉬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산이 베푸는 안도의 숨소리’(시 서귀포에서)로 충만한 곳이라고 썼다. 그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피로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주의 삶을 추사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일도 의미 있을 듯하다.
오래전 추사 김정희가 그 길을 걸었다. 조선 정조 10년(1786)에 태어난 김정희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바와 같이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시대와의 불화’ 때문에 남제주에서 10년 세월을 보냈고, 이후에도 일흔 가까운 몸으로 함경도 북청에서 유배를 살았다.
그는 쉰다섯 살에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는데, 그 과정을 편지로 남겼으니 그 문맥 사이에 깊은 상처가 스며 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가 발간한 완당전집 2권에 실린, 동생 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정희는 이렇게 썼다.
“대정(현 서귀포시 대정읍)은 주성(현 제주시)의 서쪽으로 80리 쯤의 거리에 있는데, 그 다음 날에는 큰 바람이 불어서 전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다음 날은 바로 그달 초하루였었네. 길을 나섰는데, 그 길의 절반은 순전히 돌길이어서 인마(人馬)가 발을 붙이기가 어려웠으나, 그 길의 절반을 지난 이후로는 길이 약간 평탄하였네. 그리고 또 밀림의 그늘 속으로 가게 되어 하늘빛이 겨우 실낱만큼이나 통하였는데, 모두가 아름다운 수목들로서 겨울에도 새파랗게 시들지 않는 것들이었고, 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 숲도 있었는데, 이것은 또 내지의 단풍잎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으로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운취가 있었겠는가.”
조선의 유형(流刑)에는 죄질, 신분, 유배지 성격에 따라 ‘배(配), 적(謫), 찬(竄), 방(放), 천(遷), 사(徙)’ 등이 있다. 이를 달리 말하여 ‘천사, 부처, 안치’로도 보는데, 천사(遷徙)란 고향에서 천리 밖으로 이주시키는 것이며 부처(付處)는 ‘중도부처’의 준말로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적당한 곳을 골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가장 끔찍한 것이 ‘안치(安置)’다. 한 장소를 정하여 오직 그곳에서만 머물게 하는 형벌. 이 역시 본향 안치, 주군 안치, 자원처 안치 등의 가벼운 형벌이 있는가 하면, 실학자 정약전이 흑산도로 떠나간 것처럼 절해고도로 보내는 ‘절도 안치’와 가시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만 머물게 하는 ‘위리 안치’가 있다.
김정희의 경우는 ‘절도 안치’와 ‘위리 안치’가 결합된 셈이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멀고 먼 땅, 바다 건너 섬, 그 섬에서도 가장 남쪽, 풍경도 말도 풍습도 낯선 대정읍으로 쫓겨나 10년 세월을 보낸 것이다.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정희는 담담하게 쓴다.
이중섭미술관, 김영갑갤러리도 꼭 한 번 들러볼 만
“작은 정주를 장차 온돌방으로 개조한다면 손이나 하인 무리들이 또 거기에 들어가 거처할 수 있을 것이네. 가시울타리를 둘러치는 일은 이 가옥 터의 모양에 따라서 하였는데, 마당과 뜨락 사이에 또한 걸어다니고 밥 먹고 할 수가 있으니, 거처하는 곳은 내 분수에 지나치다 하겠네.”
만약 당신이 남제주까지 왔다면, 은갈치조림이며 말고기에 신경 쓰기 전에 우선 사위가 툭 트인 대정읍에 물끄러미 서서 산방산을 한참 동안 바라볼 일이다. 그곳 사람들의 전설에 의한다면, 산방산은 한라산의 꼭대기가 뚝 분질러진 것으로 남은 것은 백록담이 되고 그 나머지가 산방산이 되었으니, 남과 북을 번갈아 본다면 분명 산방산이 한라산의 신화적 부속물임을 느끼기에 어렵지 않다. ‘내지’의 산에 비하여 산방산은 산 같지 않은 산이며 섬 같지 않은 섬이며, 산도 아니고 섬도 아닌 기이한 물체다. 10년 세월을 가시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했던 김정희에게 산방산은 아침저녁마다 ‘낯선 곳으로 유배된 삶’을 환기시키는 은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김정희는 “기침이 급하여 기(氣)가 통하지 않을 때는 혈담(血痰)까지 아울러 나오는데, 이는 모두 장습( 濕)이 빌미가 된 것이네. 게다가 수천(水泉)도 좋지 않아 답답한 기운이 풀리지 않고, 눈의 어른어른한 증세도 더하기만” 했던 삶을 살았다.
그렇게 곤고한 삶을 살았기에 10년 유형을 마치는 순간 김정희는 “7일 이내에 10년 동안에 걸친 온갖 번쇄한 일을 다 처리하였네. 양일 동안 연달아 바람을 무릅쓰고 길을 걸었으나 다시 몸에 손상을 입지는 않았네. 포구로 내려와 순풍을 기다리네” 하면서 육지로 나갈 마음에 성치 않은 몸을 급히 부렸던 것이다. 제자인 소치 허련과 세한도 창작의 모티프를 부여한 이상적, 그리고 해남 대둔사의 초의선사 외에는 누구도 김정희와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그는 가시울타리에 의하여 온전한 세상과도 10년 동안 격절했던 것이다.
물론 오늘의 여가문화에서, 남제주 일대를 추사 김정희의 적막한 기운에만 의지하여 돌아다니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제주도로 건너가면 온갖 번다한 유흥이 넘치는 바이니, 한 번쯤은 제주의 삶을 이방인 김정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도 값싼 낭만은 아닐 성싶은 것이다. 자동차로 10분쯤 달리면 만날 수 있는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이나 거기서 20분을 더 가면 만나는 김영갑갤러리의 한적하면서도 쓸쓸한 기운도 ‘낭만 관광’ 시대를 잠시 역주행하는 조촐한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게 대정읍과 서귀포 사이를 소일하다 보면 날이 저물 것이고, 그때 문득 고개를 들면 아늑한 한라산 자락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시인 김정환은 썼다. “아아 한라산은/ 어둠이 덮친 밤마다 서귀포의 모계사회로 돌아온다” 지금, 그곳에서 새봄이 무르익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