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
서울에 사는 70대 박모 할아버지. 일본의 탄광 작업에 강제동원된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사망한 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지난해 초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에 피해신고를 한 지 1년 반 만에 유족임을 인정하는 ‘피해결정 통지서’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 12월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희생자지원법률)이 제정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다급히 진상규명위를 찾아가 위로금에 대해 문의했지만 “올 6월에 법률이 시행되고, 해당 위원회가 만들어진 후에야 알 수 있다”는 모호한 답변을 들어야 했다.
“수십 년을 잊고 살다가 위원회도 생기고 해서 조만간 보상받을 수 있으리란 희망이 생겼는데….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내가 죽기 전에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뭐가 이리 복잡, 죽기 전에 해결될는지…”
지난해 말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된 희생자와 유족에게 국가 차원의 위로금 지원을 목적으로 희생자지원법률이 제정됐다. 6월부터 시행되는 이 법률은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로 강제동원돼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희생자 유족에게 2000만원 이하 위로금을 지급하고, 강제노역에 대한 대가를 지급받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미수금을 보전해주며, 강제동원 생존자에게는 의료지원금을 지급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와 함께 지원대상자를 심의, 결정하는 기구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이하 지원위)가 만들어질 예정이다.
문제는 위로금을 지급하기 전에 피해 관련 신청을 받고 이를 심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새로 생길 지원위 업무의 상당 부분이 진상규명위가 지난 3년간 해온 일과 겹친다는 것이다.
2004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된 바 있다. 법 제정 당시 보상사항에 대한 이견이 분분했던 탓에 먼저 조사부터 진행하자는 취지에서 진상규명특별법이 통과됐다고 한다.
진상규명특별법에 따라 희생자 및 유족의 심사·결정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 의결하기 위해 2004년 11월 출범한 진상규명위는 그동안 22만 건의 피해신고를 받아 현재까지 7만 건만 조사, 처리한 상태다. 이를 위해 매년 80억~100억원의 예산이 들었다. 진상규명위 이재철 기획홍보팀장은 “강제동원 사실을 확인하려면 일본 자료는 물론 국가기록원 자료, 현지 목격자까지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 만큼 시간과 전문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2년간 두 차례 피해신고 접수를 받았지만 아직도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 세 번째 피해신고 접수가 불가피한 실정이다. 그런데 지원위에서 또다시 신청을 받고 심의할 경우 그 이상의 시간과 비용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로운 지원위 다시 서류 준비 우릴 두 번 죽이는 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희생자에 대한 피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한편 지원위를 준비 중인 행정자치부 관계자는 “아직 시행령이 나오기 전이라 이전 진상규명위와 새롭게 만들어질 지원위 사이의 업무조정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확답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해자와 유족들은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틈틈이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고 해당 위원회에 전화를 건다는 최모(40·경기 부천시) 씨는 “새로운 지원위가 언제 생겨 어떤 방식으로 운영될지도 모른 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그저 답답하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에 관련 서류를 제출하면서 수십 년 전 증거자료를 찾는 게 쉽지 않았던 그는 “다시 서류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일이 번거로울뿐더러 해당 유족인 어머니와 이모들의 건강도 좋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최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원법 수혜자의 평균연령은 85세나 된다.
이에 더해 희생자지원법률 제정이 발표된 이후 이를 악용하는 사기행위마저 판치고 있다. 강원도 철원에 사는 60대 감모 씨는 얼마 전 “최근 법률이 제정돼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돼 돌아가신 당신 아버지에 대한 1억원 상당의 피해보상이 이뤄지게 됐다. 인감증명을 비롯해 관련 서류를 준비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으로 귀환한 후 사망한 경우로, 이번에 제정된 법률의 지원대상이 아니다. 다행히 위원회와 피해자유족회에 문의해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가 거짓임을 알았지만, 감씨는 “주위 유족 중에 이 같은 전화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실제로 진상규명위와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 등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전국 각지에서 다음과 같은 문의가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다.
“1900~1928년 태어난 노인을 대상으로 20만원의 수수료와 인감증명, 주민등록 등의 서류를 제출하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보상금 1억원을 지급받을 수 있다면서 다단계로 사람을 모으고 있습니다. 6개월 안에 보상금이 나온다는 말만 믿고 연세 많으신 분들이 의심 없이 서류를 제출하고 있는데, 확인 바랍니다.”
2005년 진상규명위 출범 당시에도 이와 유사한 사기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 양순임 회장은 “유족회의 이름을 빌려 보상신청을 대행한다며 비싼 수수료를 요구하거나 인감도장, 인감증명, 통장사본을 가져오라는 경우가 많다”면서 “(강제동원 희생자 중) 80세 이상 노인이 많아 사기행위가 공공연하게 일어나지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관련 기관의 적극적인 대책은 미비한 실정이다. 진상규명위 홈페이지 공지사항 게시판에 간략히 ‘보상신청 관련 주의사항’만 올려놨을 뿐이다. 가뜩이나 국가 지원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피해자와 유족들은 사기 피해에까지 무방비로 내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