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일 오후 이명박 대통령이 이춘호(여성부) 장관 후보자에 이어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등 각종 의혹을 받던 남주홍(통일부) 박은경(환경부) 후보자를 사실상 경질하자 청와대는 ‘카오스’ 상태에 빠졌다. ‘개망신’이라는 자기비하적 막말을 서슴지 않는 직원들도 있었다. 노무현 정부를 ‘아마추어 정부’ ‘코드 인사 공화국’이라고 비판하던 한나라당과 그 대표자인 이 대통령이 10년 만에 정권을 잡은 뒤 내놓은 첫 조각(組閣)에서 15명의 장관 후보자 중 20%인 3명이 잇따라 낙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이들 후보자에 대한 인선과정을 지켜본 이들은 대부분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됐던 상황이라고 말한다. 공식 논의기구가 아니라 철저히 비선조직에 의지한 인선 시스템과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빈약해진 보수층 인재풀, 여기에 이 대통령 특유의 인선 기준이 겹쳐져 발생한 ‘예고된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20% 중도 하차’라는 기록적 참사를 남긴 이명박 정부 첫 조각은 도대체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이 대통령은 지난해 말 대선 승리 후 자신의 복심(腹心)으로 통하는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에게 인수위와는 별도의 ‘조각팀’을 꾸릴 것을 지시했다. 이 팀의 임무는 사회 각 분야의 추천과 자체 검증을 거쳐 부처별 장관 후보자를 최대한 모으는 것. 나중에 이 팀은 정 의원을 포함해 이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 3명이 각각 이끄는 팀으로 분화됐다. 이 팀들이 추린 각 보직 후보자들은 다시 정 의원 팀에 보내져 1월 중순 최종 취합됐다.
정두언 의원마저 몰랐던 막판 인선
예를 들어 정 의원 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로 A, B, C씨를 추천하면 또 다른 측근 팀에서는 D, E, F씨를 추천하는 식이다. 물론 각 팀의 추천자 중 일부는 겹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표적으로 추천이 겹쳤던 인물 중 한 명이다.
인물군(群)을 1차 선별하는 이 작업까지는 대체로 순탄했다. 문제는 그 뒤부터 시작된 검증과정에서 서서히 생겼다. 정 의원 팀이 취합한 후보군에 대한 검증에는 박영준 대통령 당선인 총괄팀장(현 대통령기획조정비서관)이 나섰다. 그리고 윤한홍 서울시 인사과장(현 대통령인사비서관실 행정관) 등이 실무를 도왔다. 그 검증결과를 토대로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이 대통령이 최종 낙점했다. 당선인 비서실장이던 임태희 의원도 인선 초기 과정에 참여했으나 류 실장이 참여한 뒤로는 인선에서 손뗐다.
박 비서관은 인선 검증 후 기자들과 만나 “검증팀이 5000여 명의 인사 자료를 한 달 동안 거의 밤새워가며 훑었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기자들이나 인수위 관계자들도 ‘그런가 보다’는 표정으로 “고생했다”는 덕담을 건넸다.
그러나 정작 검증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검증작업을 돕거나 지켜봤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정두언 의원마저 인선 막판엔 기자들에게 “누가 장관 후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인선팀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작업 장소도 수시로 바꿨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 당선인 집무실 내 사무실을 주로 이용했지만,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내 세미나룸이나 류 실장이 원장으로 있는 종로구 신문로 국제전략연구원(GSI)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인수위 출입기자들은 통의동 집무실과 롯데호텔 앞을 밤늦도록 지키기 일쑤였으나 인선팀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인선팀은 검증 막판에 정밀한 검증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소수 인원이 밀폐된 공간에서 짧은 시간에 비공개적으로 진행한 검증의 ‘태생적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이를 전해들은 노무현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는 “축적된 노하우를 빌려주겠다”며 지원 의사를 밝혔으나, 이 대통령 측에서 “그럴 경우 인선 내용이 새나간다”며 비밀유지 우선 원칙을 고집하며 이를 거부했다. 인선팀 한 관계자는 “그 조직만 활용했어도 3명이 낙마하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10년간 정권을 놓은 것은 인선-검증 시스템뿐 아니라 이 대통령이 활용할 수 있는 ‘인재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대통령의 최측근인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당시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위원)은 “그럴 줄 몰랐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대한민국에 우리가 쓸 사람이 너무 없더라. 좌파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중도보수 성향 인재들의 씨가 말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선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보수 성향 인재 중에서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사람 가운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일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주로 찾다 보니 김영삼 정부 인사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첫 내각에 60대 이상 고령자가 대거 포진한 배경 중 하나다.
노무현 정부의 인선 검증 노하우 제공 의사도 거부
이 대통령의 인선 기준과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한민국을 ‘실용주의 공화국’으로 바꾸겠다는 이 대통령의 최우선 인선 기준은 실력과 실적이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이전 정부에서 최고 기준이었던 도덕성은 상식선에서 인정받을 정도면 된다는 인식이 있다”며 “도덕성도 중요하지만 실력과 적재적소인지가 더 관건”이라고 말했다.
다른 일처리와 달리 질질 끄는 MB식 인선도 도마에 올랐다. A씨로 낙점했다 싶으면 B씨로 갔다가 C씨나 다시 A씨로 눈길을 옮긴다는 것. 그러다 보니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라고 막판에 인선이 엉클어지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3월3일 장관급 및 차관에 대한 임명장 수여식에서는 이런 ‘지연 인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벌어졌다. 이 대통령은 수여식에 배석한 곽승준 대통령국정기획수석비서관을 가리키며 “직함이 뭐였지, 기획수석?”이라고 물었다. 이에 곽 수석이 “국정기획수석입니다”라고 하자, 이 대통령은 “왜 명칭 앞에 국정을 붙여서 혼자 다 일하는 것처럼…”이라고 농담을 건넸다. 이에 옆자리에 있던 박재완 정무수석비서관이 “제가 (국정기획수석을) 할 줄 알고…”라고 화답한 것.
인수위 시절 정부조직 개편의 주무자였던 박 수석은 당초 국정기획수석이나 사회정책수석이 유력했으나 막판까지 마땅한 후보를 찾지 못한 정무수석으로 발표 하루 전 내정됐고, 사회정책수석에는 후보군에 거의 거론되지 않던 박미석 숙명여대 교수가 낙점됐다. 그런 박 수석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논문표절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진한 홍역을 치른 청와대는 앞으로 대통령실장 주재 인사위원회와 인사추천위원회를 가동해 체계적인 시스템을 정착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형태는 갖추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의 인사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그러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이들 후보자에 대한 인선과정을 지켜본 이들은 대부분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됐던 상황이라고 말한다. 공식 논의기구가 아니라 철저히 비선조직에 의지한 인선 시스템과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빈약해진 보수층 인재풀, 여기에 이 대통령 특유의 인선 기준이 겹쳐져 발생한 ‘예고된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20% 중도 하차’라는 기록적 참사를 남긴 이명박 정부 첫 조각은 도대체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이 대통령은 지난해 말 대선 승리 후 자신의 복심(腹心)으로 통하는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에게 인수위와는 별도의 ‘조각팀’을 꾸릴 것을 지시했다. 이 팀의 임무는 사회 각 분야의 추천과 자체 검증을 거쳐 부처별 장관 후보자를 최대한 모으는 것. 나중에 이 팀은 정 의원을 포함해 이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 3명이 각각 이끄는 팀으로 분화됐다. 이 팀들이 추린 각 보직 후보자들은 다시 정 의원 팀에 보내져 1월 중순 최종 취합됐다.
정두언 의원마저 몰랐던 막판 인선
예를 들어 정 의원 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로 A, B, C씨를 추천하면 또 다른 측근 팀에서는 D, E, F씨를 추천하는 식이다. 물론 각 팀의 추천자 중 일부는 겹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표적으로 추천이 겹쳤던 인물 중 한 명이다.
인물군(群)을 1차 선별하는 이 작업까지는 대체로 순탄했다. 문제는 그 뒤부터 시작된 검증과정에서 서서히 생겼다. 정 의원 팀이 취합한 후보군에 대한 검증에는 박영준 대통령 당선인 총괄팀장(현 대통령기획조정비서관)이 나섰다. 그리고 윤한홍 서울시 인사과장(현 대통령인사비서관실 행정관) 등이 실무를 도왔다. 그 검증결과를 토대로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이 대통령이 최종 낙점했다. 당선인 비서실장이던 임태희 의원도 인선 초기 과정에 참여했으나 류 실장이 참여한 뒤로는 인선에서 손뗐다.
박 비서관은 인선 검증 후 기자들과 만나 “검증팀이 5000여 명의 인사 자료를 한 달 동안 거의 밤새워가며 훑었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기자들이나 인수위 관계자들도 ‘그런가 보다’는 표정으로 “고생했다”는 덕담을 건넸다.
그러나 정작 검증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검증작업을 돕거나 지켜봤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정두언 의원마저 인선 막판엔 기자들에게 “누가 장관 후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인선팀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작업 장소도 수시로 바꿨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 당선인 집무실 내 사무실을 주로 이용했지만,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내 세미나룸이나 류 실장이 원장으로 있는 종로구 신문로 국제전략연구원(GSI)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인수위 출입기자들은 통의동 집무실과 롯데호텔 앞을 밤늦도록 지키기 일쑤였으나 인선팀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인선팀은 검증 막판에 정밀한 검증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소수 인원이 밀폐된 공간에서 짧은 시간에 비공개적으로 진행한 검증의 ‘태생적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이를 전해들은 노무현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는 “축적된 노하우를 빌려주겠다”며 지원 의사를 밝혔으나, 이 대통령 측에서 “그럴 경우 인선 내용이 새나간다”며 비밀유지 우선 원칙을 고집하며 이를 거부했다. 인선팀 한 관계자는 “그 조직만 활용했어도 3명이 낙마하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10년간 정권을 놓은 것은 인선-검증 시스템뿐 아니라 이 대통령이 활용할 수 있는 ‘인재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대통령의 최측근인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당시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위원)은 “그럴 줄 몰랐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대한민국에 우리가 쓸 사람이 너무 없더라. 좌파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중도보수 성향 인재들의 씨가 말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선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보수 성향 인재 중에서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사람 가운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일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주로 찾다 보니 김영삼 정부 인사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첫 내각에 60대 이상 고령자가 대거 포진한 배경 중 하나다.
노무현 정부의 인선 검증 노하우 제공 의사도 거부
이 대통령의 인선 기준과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한민국을 ‘실용주의 공화국’으로 바꾸겠다는 이 대통령의 최우선 인선 기준은 실력과 실적이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이전 정부에서 최고 기준이었던 도덕성은 상식선에서 인정받을 정도면 된다는 인식이 있다”며 “도덕성도 중요하지만 실력과 적재적소인지가 더 관건”이라고 말했다.
다른 일처리와 달리 질질 끄는 MB식 인선도 도마에 올랐다. A씨로 낙점했다 싶으면 B씨로 갔다가 C씨나 다시 A씨로 눈길을 옮긴다는 것. 그러다 보니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라고 막판에 인선이 엉클어지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3월3일 장관급 및 차관에 대한 임명장 수여식에서는 이런 ‘지연 인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벌어졌다. 이 대통령은 수여식에 배석한 곽승준 대통령국정기획수석비서관을 가리키며 “직함이 뭐였지, 기획수석?”이라고 물었다. 이에 곽 수석이 “국정기획수석입니다”라고 하자, 이 대통령은 “왜 명칭 앞에 국정을 붙여서 혼자 다 일하는 것처럼…”이라고 농담을 건넸다. 이에 옆자리에 있던 박재완 정무수석비서관이 “제가 (국정기획수석을) 할 줄 알고…”라고 화답한 것.
인수위 시절 정부조직 개편의 주무자였던 박 수석은 당초 국정기획수석이나 사회정책수석이 유력했으나 막판까지 마땅한 후보를 찾지 못한 정무수석으로 발표 하루 전 내정됐고, 사회정책수석에는 후보군에 거의 거론되지 않던 박미석 숙명여대 교수가 낙점됐다. 그런 박 수석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논문표절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진한 홍역을 치른 청와대는 앞으로 대통령실장 주재 인사위원회와 인사추천위원회를 가동해 체계적인 시스템을 정착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형태는 갖추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의 인사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