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중국을 다녀온 후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A의원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명박 대통령 계파(친이·親李)후보에게 밀려나는 것. A의원은 이미 같은 계파 의원들이 공천심사 과정에서 친이계에 밀려 하나둘 탈락하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쉽사리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혹여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길까봐, 또 한편으로는 박 전 대표와 이 대통령이 합의한 ‘공정한 공천심사’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다.
이쯤 되자 A의원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면서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때 탈당할 걸….’
한나라당 공천심사 결과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자 친박 의원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특사로 중국을 다녀온 직후인 1월23일 이 대통령을 만나 약속받은 ‘공정한 공천심사’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친박 의원들은 특히 공천심사 과정에서 계파 안배라는 명목으로 특혜를 받고 있다는 당 안팎의 시각이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대표적인 친박 유승민 의원은 격한 불만을 토로했다.
“지금 안배가 어디 있나. 비율을 보면 일방적이다. 계파별 안배라는 말은 맞지 않다. 영남권 공천 결과를 봐라. 친박 가운데 문제 있으면 (공천을) 못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대통령 쪽은 경쟁력이 없어도 후보가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여의도연구소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수도권이든 영남이든 그 지역에서 여론이 가장 좋지 않은 현역 당원협의회 위원장은 이 대통령 쪽이다. 정상적이라면 친박 의원이 공천을 많이 받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권력을 잡은 쪽에서 마음대로 공천하고 있다. 그런데도 계파별 안배라고 말한다면 정말 억울하다.”
이성헌 전 의원은 “친박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대부분 현직 당원협의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지역 내 여론조사에서도 월등히 높은 결과가 나오는 후보들이다. 그런데도 후보로 공천받지 못해 답답해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적 고려는 이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1월 중순 실제 分黨까지 심각히 검토
친박 의원들이 이처럼 분을 삭이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들은 올해 1월 중순, 공천심사를 앞두고 분당(分黨)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취재 결과 친박 일부 강경파 의원들은 자체 여론조사와 시뮬레이션을 통해 탈당 이후를 예측한 보고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는 강재섭 대표와 이방호 사무총장 등 사실상 당권을 장악한 친이 측의 일방적 독주 움직임에 친박 진영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
강경파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보고서 존재 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솔직히 부인하진 못하겠다”면서 “다만 누가 작성했는지는 말하기 곤란하다”고 했다.
친박 의원 그리고 이들과 친분이 두터운 정치권 일부 관계자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보고서 내용은 탈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고서는 집단행동 의사를 밝힌 친박 의원 35명과 원외 당협위원장 일부가 탈당할 경우, 친박 신당은 총선에서 최소 60석 이상 확보할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친이와 일부 중도파 의원들이 남은 한나라당은 130석 정도를 확보하는 선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은 전체 의석수(299석) 중 절반(150석) 확보에 실패해 정권 초기 국정운영을 이끌어갈 동력을 얻지 못하는 반면, 친박 신당은 제1야당까지도 가능하다는 내용이 보고서의 골자라는 것.
친박 강경파 의원들은 이를 토대로 박 전 대표에게 탈당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와 관련해 김무성 최고위원은 “보고서 형태는 아니었다”고 전제한 뒤 당시 친박 진영의 분위기를 전했다.
“어느 조직이든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라는 최고 권력자 주변의 소권력자들이 공천을 주도하기 위해 밀실공천기획 작업을 벌였다. 그때 대통령을 안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순혈주의’로 가자, 이번 기회에 박근혜 측을 다 없애버리자는 등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정보가 흘러나왔다. 우리라고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는 일 아니냐. 강경파 쪽에서 분당을 전제로 여론조사를 해본 것 같다.”
탈락한 사람들끼리 집단 탈당 가능성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친박 의원들이 검토했던 보고서 내용은 이 대통령 측에도 전달됐으며, 이 때문에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박 전 대표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결국 박 전 대표가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이 대통령에게서 ‘빅딜’을 이끌어냈다”는 게 이 관계자의 부연 설명이다.
그러나 최근 진행되고 있는 당 공심위의 공천심사 결과는 친박 의원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후회스럽다. 이미 공천에서 탈락한 원외 당원협의회 위원장의 처지에서는 그 이상이다. 서울지역에서 공천을 신청했다가 아쉽게 탈락한 한 원외 당원협의회 위원장의 얘기다.
“만약 그때 분당했다면 (친박 신당은) 100석까지도 가능했다. 우리가 제1야당이 되고 통합민주당은 호남당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박 전 대표의 파괴력은 정동영 손학규 강금실을 다 합해도 비교가 안 된다. 박 전 대표가 서울에서 이재오 의원과 맞붙는다고 생각해보라. 누가 이기겠는가. 박근혜 신당은 현 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세력이 될 수 있었다.”
한나라당 공천심사는 이제 막판으로 치닫고 있다. 친박 진영의 움직임은 이미 공천심사 이후의 후유증을 예고한다. 이 전 의원은 “우리도 나름대로 공심위와 유사한 방식으로 조사해 지역별로 어떤 후보가 경쟁력이 있고 없는지를 다 파악했다. 얼마나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공천심사를 하는지 일단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공심위의 심사 결과가 친박 측의 기대를 끝내 저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유 의원은 “박 전 대표가 직접 움직일 가능성은 낮다. 이미 타이밍을 놓쳤다. 탈락한 사람들끼리 집단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방향은 자유선진당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