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사 뒤 원효방
“원효방 가는 바위에 돌계단을 만들어놓았습니다만 오늘같이 눈이 쌓인 날은 큰일 납니다. 실수하면 최소한 중상이고 황천행일 수 있으니 아예 포기하십시오.”
나그네가 원효방을 순례하려고 한 것은 스님께서 차를 마셨다는 기록을 흥미롭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규보 문집 ‘동국이상국집’ 23권에 수록된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한 대목에 나온다. 당시 이규보는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錄 兼 掌書記)라는 첫 벼슬을 받아 전주로 부임, 의욕적으로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바를 수필 형식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남행월일기’인 것이다.
‘높이가 수십 길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발을 포개고 매우 조심하여 걸어서 도달하였더니 뜰의 층계와 창이 수풀 끝에 솟아 있었다. 듣자니 범과 표범이 살지만 아직은 당겨서 올라온 놈이 없다고 한다. 원효방 옆에 한 암자가 있는데 사포성인(巳包聖人)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원효가 와서 살았기에 사포 또한 와서 스님을 모시었는데 차를 달여 스님께 올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근심할 때 물이 문득 바위틈에서 솟아났으니 물맛은 매우 달고 젖과 같아서 사포는 차를 점다(點茶)했다고 한다.’
화쟁(和諍) 부르짖은 반전주의자 … 민족의 聖師
개암사 전경
원효가 이 남향의 바위동굴에서 수도한 때는 아마도 백제가 멸망한 통일신라 시대일 것이다. 화쟁(和諍)을 부르짖은 반전주의자였던 원효이고 보면 백제 땅을 찾은 목적은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백제인들의 해원(解寃)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 사상을 지닌 스님이었기에 한국인 모두에게 존경받는, 말 그대로 민족의 성사(聖師)로 불리고 있는 것이리라.
원효의 속성은 설씨이고, 아명은 서당. 불지촌(지금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 화랑이 되었다가 진덕여왕 2년(648)에 황룡사로 출가한다. 34세에 의상과 함께 육로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고구려군에 잡혀 귀향한다. 10년 뒤 다시 해로를 이용해 유학길에 나섰지만, 밤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이튿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깨달아 의상과 헤어져 돌아온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와 정을 나눠 설총을 낳게 되는데 이때의 파계는 원효의 사상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때부터 원효는 자신을 복성거사라 칭하고 광대 복장을 하고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다닌다. 원효의 무애행은 당시 수행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여 백고좌(百孤坐) 법회에 끼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훗날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의 강설을 듣고는 모두가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후 원효는 입적 때까지 저술에 전념,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 100여부 240권(10부 22권만 현존)을 남긴다.
개심사 스님들은 뒷산의 울금바위(禹金巖) 중에서 왼쪽 동굴을 장군방, 오른쪽 동굴을 원효방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원효방은 정남향으로 5평이 될까 말까 하고, 장군방은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동굴입니다.” 나그네는 문득 고개를 끄덕인다. 분열을 지양하는 원효의 화쟁이야말로 다인들이 실천해야 할 차원 높은 다도(茶道)가 아닐까도 싶기 때문이다.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부안나들목으로 나와 고창 방면 23번 국도를 타고 10여분 가다 보면 개암사 진입로와 이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개암사까지의 거리는 2.4k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