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9일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 위원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러나 신 씨에게서 고문을 받았던 항일운동가 차익환(車益煥·80·경기 고양시) 씨는 “신 씨를 친일인사 명단에서 누락시킨 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차 씨는 편찬위의 친일인사 선발 기준에 의문을 제기했다.
1944년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신상묵 씨가 지휘한 취조반으로부터 고문을 당한 미술교사 출신 고 김주석 씨가 석방된 뒤 고문받는 장면을 그린 삽화.
“내게 문의 한번 해오지 않았다”
신 씨한테서 고문을 당한 인사들은 아직 생존해 있다. 차 씨와 그의 동료인 김장룡(金章龍·79·부산 순천의원 원장) 씨는 “1944년 7월 경남 진해에서 만세운동 등을 계획하다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당시 일본군 헌병 군조인 신상묵(시게미시 구니오)한테서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와 관련 편찬위 측에선 “자료가 불분명하다”고 해명했는데, 이에 대해 차 씨는 “신상묵이 일본군 헌병이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신상묵한테서 모진 고문을 당한 당사자인 나와 김장룡 씨가 이렇게 두 눈 뜨고 살아 있지 않은가. 친일인사 명단을 발표한 쪽에선 내게 문의 한번 해오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편찬위 측의 해명과 달리 신 씨의 친일행위를 보여주는 자료는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지도급’인 교사직을 포기하면서까지 일본군에 지원한 신 씨가 좌담회에 참석해 조선 학생들의 일본군 지원을 독려한 1940년 11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연재 기사물 “반도를 석권한 애국혼의 선풍, 전 조선의 영예, 지도적 계급에서 먼저 지원병이 되자”와 신 씨가 친일 잡지인 ‘삼천리’ 1941년 1월호에 기고한 ‘지원병의 일기’라는 제목의 글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의 군인이 되는 것은 으레 할 일. 내선일체를 이루는 데 가장 먼저 할 일은 지원병이 되는 것” 등이 그에 해당한다.
한편 신 전 의장 측은 지난해 말을 전후해 차 씨에게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사과를 했는데, 이에 대해 차 씨는 “신 전 의장이 직접 온 것도 아니고 대신 사람을 보냈다. 그들은 내게 사과하기보다는 나를 살피러 온 사람 같았다. 신 전 의장은 나 대신 광복회를 찾아가 사과를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