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설립된 ‘주한 프랑스 비즈니스협회’는 2002년 ‘한불상공회의소’(이하 FKCCI)로 이름을 바꾸었다. FKCCI는 프랑스 기업 또는 한불합작회사, 프랑스와 관련 있는 한국 기업 160여개 업체가 회원으로 등록한 비영리단체. 한국과 프랑스 간의 무역 지원과 경제정보 제공 등을 함으로써 양국 업체들이 윈-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FKCCI가 설립 이후 처음으로 한국계 인사를 회장으로 선임했다. 올 3월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된 김&장 법률사무소 이준 필립(40) 변호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회장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교포 2세로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집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은 덕에 한국어 구사가 유창하다.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니고 88년 변호사 시험까지 합격한 그가 한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병역의무의 일환으로 90~91년 FKCCI에서 일하면서부터. 프랑스는 해외 주재 대사관이나 상공회의소 등에서 근무하면 병역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인정한다.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친 그는 프랑스로 귀국하지 않고 한국 정착을 택했다. 92년에는 한국 여성과 결혼도 했다.
“프랑스에 있을 때도 여름방학이면 부모님과 함께 한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이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병역 의무차 한국 근무를 한 뒤로는 한국에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과 프랑스 양쪽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 후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게 된 이 회장은 FKCCI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무총장과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결국 근무지 이동으로 물러난 파트리스 쿠벤 전 회장의 뒤를 잇게 된 것이다. 이 회장은 취임 후 역점 사업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가 회원들 간의 공동체 유대감을 강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불 양국이 경제 분야를 비롯해 정치, 문화에서도 다양한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한·불 양국이 서로를 잘 알 수 있도록 홍보하는 것이다.
한국에는 프랑스를, 프랑스에는 한국을 적극적으로 알리겠다는 것이다. 이 회장이 2003년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도 그 같은 이유 때문이다. CICI는 학계·재계 인사들이 한국의 이미지나 브랜드 인지도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 한국 이미지 홍보에 힘쓰기 위해 만든 재단이다.
이밖에도 이 회장은 프랑스 정부의 무역고문을 맡고 있으며, 프랑스 명품사들로 구성된 꼴베르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 회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바로 집안 이야기다. 이 회장의 부친은 파리 7대학 교수였던 고(故) 이옥 씨다. 프랑스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하고 한국학을 보급하는 데 정열을 쏟은 역사학자였다. 그리고 이 회장의 조부는 초대 법무부 장관과 민의원을 지낸 고 이인 씨다. 이 전 장관은 일제강점기 때 변호사로서 많은 애국 인사들을 변호했고, 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4년간 복역하기도 한 항일인사.
이 회장이 한국에 정착하고 산 지 16년째. “혹시 프랑스로 돌아갈 살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전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한국과 프랑스 양쪽에서 지냈기 때문에 정체성 문제로 혼란을 겪을 법도 하지만 이 회장에게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두 나라를 너무 잘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두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점이 행복해 보일 뿐이다.
FKCCI가 설립 이후 처음으로 한국계 인사를 회장으로 선임했다. 올 3월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된 김&장 법률사무소 이준 필립(40) 변호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회장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교포 2세로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집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은 덕에 한국어 구사가 유창하다.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니고 88년 변호사 시험까지 합격한 그가 한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병역의무의 일환으로 90~91년 FKCCI에서 일하면서부터. 프랑스는 해외 주재 대사관이나 상공회의소 등에서 근무하면 병역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인정한다.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친 그는 프랑스로 귀국하지 않고 한국 정착을 택했다. 92년에는 한국 여성과 결혼도 했다.
“프랑스에 있을 때도 여름방학이면 부모님과 함께 한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이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병역 의무차 한국 근무를 한 뒤로는 한국에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과 프랑스 양쪽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 후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게 된 이 회장은 FKCCI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무총장과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결국 근무지 이동으로 물러난 파트리스 쿠벤 전 회장의 뒤를 잇게 된 것이다. 이 회장은 취임 후 역점 사업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가 회원들 간의 공동체 유대감을 강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불 양국이 경제 분야를 비롯해 정치, 문화에서도 다양한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한·불 양국이 서로를 잘 알 수 있도록 홍보하는 것이다.
한국에는 프랑스를, 프랑스에는 한국을 적극적으로 알리겠다는 것이다. 이 회장이 2003년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도 그 같은 이유 때문이다. CICI는 학계·재계 인사들이 한국의 이미지나 브랜드 인지도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 한국 이미지 홍보에 힘쓰기 위해 만든 재단이다.
이밖에도 이 회장은 프랑스 정부의 무역고문을 맡고 있으며, 프랑스 명품사들로 구성된 꼴베르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 회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바로 집안 이야기다. 이 회장의 부친은 파리 7대학 교수였던 고(故) 이옥 씨다. 프랑스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하고 한국학을 보급하는 데 정열을 쏟은 역사학자였다. 그리고 이 회장의 조부는 초대 법무부 장관과 민의원을 지낸 고 이인 씨다. 이 전 장관은 일제강점기 때 변호사로서 많은 애국 인사들을 변호했고, 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4년간 복역하기도 한 항일인사.
이 회장이 한국에 정착하고 산 지 16년째. “혹시 프랑스로 돌아갈 살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전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한국과 프랑스 양쪽에서 지냈기 때문에 정체성 문제로 혼란을 겪을 법도 하지만 이 회장에게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두 나라를 너무 잘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두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점이 행복해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