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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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에티켓’ 戰士를 길들이다

중세시대는 폭력이 모든 갈등 해결사 … 궁정 인간으로 살기위해 상대 내면 읽기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그림자료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과정’

    입력2005-05-27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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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과 에티켓’ 戰士를 길들이다

    부르고뉴 공 필리프의 궁정 모습.

    서구인은 언제부터 ‘젠틀맨’이었을까? 장 르노 주연의 영화 ‘비지터스’. 중세의 기사가 마법에 걸려 현대로 와서 겪는 에피소드를 엮은 영화다. 이 영화에 나타난 중세인은 언행이 거칠기 짝이 없다. 기사는 칼로 자동차를 두드려 부수고, 속옷을 걸친 채로 욕조에 들어가 젖은 옷 상태로 몸을 말리고, 맨손으로 고기를 뜯어먹는다. 시종은 마치 개처럼 식탁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주인이 먹다 버린 고기 조각을 허겁지겁 주워 먹는다. 이 야만인들이 언제부터 문명인이 됐을까.



    호전적인 전사들


    노베르트 엘리아스에 따르면 중세인은 인성구조가 현대인과 많이 달랐다. 그들의 세상은 선악의 결전장이었고, 그들의 인간은 친구 아니면 적이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회색지대,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닌 중간지대의 폭은 극히 좁았다. 때문에 그들의 판단은 선악의 이분법을 따랐고, 그들의 감정은 호오(好惡)의 극단성 위에 서 있었다.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출했던 그들은 사소한 일에도 폭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단순무식한 인간이 중세의 이상형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가 있다. 중세의 사람들은 개인적 갈등을 ‘결투’로 처리했고, 집단적 갈등은 ‘전쟁’으로 해소했다. 심지어 재판에서도 폭력이 사용되곤 했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을 때, 판사는 소송 당사자들의 손에 칼을 쥐어주며 결투를 시켰다. 이를 ‘신명재판’이라 부른다. 여기서 판결은 폭력의 물리량에 따라 내려졌고, 그 결과를 그들은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폭력은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이자 사법적 판결을 내리는 수단이었다. 이렇게 폭력이 사회적 문제 해결의 주요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몸 튼튼, 간 퉁퉁, 머리 텅텅의 호전적 전사형 인간이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갈등의 현장에서 폭력의 행사를 자제하거나 기피하는 사람은 ‘명예’를 모르는 비겁한 인간으로 낙인 찍혀 곧바로 사회에서 매장당하기 일쑤였다.

    개인의 폭력은 불법

    ‘문명화 과정’은 이 호전적인 인간들이 세련된 매너를 갖춘 문명인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른바 ‘문명화’는 이미 중세 말의 궁정 기사사회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근대국가 성립기에 거의 완성에 도달한다. 16세기에 유럽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국가가 성립한다.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면서, 지방의 영지에서 기사들을 거느리고 독립적 권력을 행사하던 영주들은 이제 수도로 거처를 옮겨 국왕의 가신으로 편입된다.

    근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영주들의 군사조직은 해체된다. 사병이 금지되고 모든 병력은 국가의 상비군으로 재편된다. 근대적 사법체계가 만들어지면서 개인이 직접 정의를 실현할 권리도 박탈된다. 아무리 명예로워도 결투는 금지되고, 아무리 억울해도 복수는 처벌 대상이 된다. 폭력을 행사할 일체의 권리는 국가에 이양되고, 법을 통하지 않은 개인의 폭력은 이제 불법으로 간주된다. 사법제도가 제 기능을 하려면 개인들에게서 폭력적 성향을 제거해야 했다. 그래서 이제 인간들은 법 앞에서 얌전히 길들여지기 시작한다.

    ‘법과 에티켓’ 戰士를 길들이다

    중세의 기사들.

    궁정은 중세의 호전적 전사들을 세련된 예법을 갖춘 근대의 귀족으로 바꿔놓았다. 전쟁터의 상스러운 어투는 궁정에서 세련된 귀족의 어법으로 바뀌고, 전사의 거친 행동은 ‘에티켓’이라는 이름의 섬세한 예법으로 다듬어진다. 글자 못 읽는 것을 자랑으로 알던 까막눈들이 이제 예술을 사랑하고 철학을 논하는 교양인으로 거듭난다. 문명화는 이렇게 전사가 궁정에서 귀족으로 변모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매너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문명화 과정’의 첫 번역본은 ‘매너의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 매너의 역사를 다룬 부분이다. 가령 중세 말의 예법서에 나타난 식사예절. “식탁보에 코를 푸는 사람은 버릇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식탁에서 손으로 코를 닦는 사람은 틀림없이 바보일 것이다.” “식사하면서 귀를 쑤시거나 코를 후벼서는 안 된다.” 이런 예법이 존재했다는 것은, 거꾸로 당시 사람들이 식탁에서 코를 풀고, 닦고, 후볐음을 증언해준다.

    중세의 인간들은 공개된 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방귀를 뀌거나, 트림을 하거나, 입맛을 다셨다고 한다.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이제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생리현상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게 된다. 성욕, 식욕 등 본능적 욕구를 게걸스럽게 드러내는 것은 금기가 된다. 잔인함에 대한 거부감도 커진다. 중세만 해도 짐승의 고기가 원형 그대로 식탁에 올라오곤 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끔찍한 해부학을 부엌에서 끝내고, 식탁에서는 우아하게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요리를 즐긴다.

    하지만 ‘문명화 과정’이 정말 ‘매너의 역사’일까? 그럴 수는 없다. 이 책의 주제는 정작 ‘근대적 인성의 탄생’에 있기 때문이다. 엘리아스에 따르면 문명화는 ‘궁정적 합리성’을 통해 이루어졌다. 전장에서의 승리는 단순한 물리력에 달려 있으나, 궁정의 권력투쟁은 치밀한 정략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변화된 환경 속에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며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변화된 권력투쟁의 양상이 사람들의 인성을 바꿔놓았고, 바로 거기서 근대의 서구인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법과 에티켓’ 戰士를 길들이다

    예루살렘을 포위한 채 공격하고 있는 십자군.

    모더니티의 탄생

    중세의 인간들은 감정을 즉발적으로 표출했다. 하지만 궁정의 인간들은 살아남기 위해 제 속마음은 감추고, 상대의 외면적 행동에서 그의 속셈을 읽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외향적 중세인은 내성적인 근대인으로 변한다. 근대의 철학은 의식을 가지고 의식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이른바 ‘반성(=내성)철학’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궁정에서 일어난 인성의 내면화, 내성화 과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중세의 전사들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순간의 명예감에 따라 행동했다. 행동의 결과를 계산하며 행동하는 것은 그들의 명예감정을 거스르는 일, 한마디로 비겁한 일이었다. 하지만 궁정의 근대인들은 몇 단계 앞의 결과를 미리 내다보며 계산된 행동을 하게 된다. 일단 저지르고 보던 맹동적인 인간이 이제 원인과 결과의 연관을 의식하게 된다. 현상의 인과관계를 탐구하는 근대의 과학정신은 이 ‘궁정적 합리성’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아스는 “합리주의는 데카르트의 발명품이 아니다”고 말한다. 외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야말로 사회 전반에서 일어난 합리화의 결과, 그것의 철학적 반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과거의 전사들과 달리 궁정의 문명인들은 잔혹한 것이나 생리적인 것에서 불쾌를 느끼는 섬세한 감각을 갖고 있다. 흔히 우리가 ‘취향’이라 부르는 미적 능력 역시 궁정인이 가진 이 섬세한 감각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의 미적 문화를 낳는 토대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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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스푼과 포크가 귀족사회에 등장했다. 'Feast Celebrating the Peace of Ryswick,' 니콜라우스 아르놀트.

    문명화는 서구의 전유물인가

    궁정의 예법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 궁정에 들어온 시민계급에게 받아들여진다. 졸지에 고귀한 신분이 된 과거의 장사치들은 처음엔 궁정의 예법을 모방하기에 바빴으나, 권력이 증대하면서 이 상승하는 계급은 거기에 자신들의 계급의식을 담아내게 된다. 궁정적 합리성이 상인적 합리성으로 변모하면서 문명화는 이제 시민계급의 것이 된다. 후에 이것이 보통교육을 통해 사회의 하층에 확산되고, 이로써 서구의 문명화는 완성에 도달한다.

    문명화는 서구의 전유물인가? ‘수치심의 역사’로 유명한 독일의 민속학자 한스 페터 뒤르는 엘리아스의 비판자로 유명하다. 그는 엘리아스가 ‘문명화’를 오직 서구의 전유물로 간주함으로써 다른 문명을 무시했다고 비판한다. 과연 그럴까? 엘리아스 자신은 1936년의 서문의 첫 문장에서 이미 이 책의 주제가 “서구적으로 문명화된 사람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양식”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서구적 문명화 외에 다른 형태의 문명화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게다가 엘리아스는 서구의 문명화를 결코 절대적 가치로 치켜세우지 않았다. 서구의 문명화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외려 상당히 비판적이다. “우리는 문명화와 함께 어떤 함정에 빠져들었다고 느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장 자크 루소처럼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 고상한 야만인이 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덜 문명화된 사람들도 우리가 이미 극복했거나 그들만큼 겪지 않았던 결핍과 고난에 고통받고 있다.”

    ‘법과 에티켓’ 戰士를 길들이다

    고기가 식탁 위에 올려지는 방식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중세 상류층에서는 종종 죽은 동물이나 동물의 몸통 부위 전체가 식탁 위에 올려졌다. 'Banquet,' 작자미상.

    동양의 문명화

    사실 ‘문명화’는 서양보다 동양에서 먼저 일어났다. 아시아에서는 이른 시기에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지배층을 위한 복잡한 도덕과 예법도 일찍부터 발달했다. 이른바 ‘수신’ 그 뒤에 이어지는 제가치국평천하를 위한 토대였다. 서구인들은 지금도 식탁에서 해부용 흉기(?)를 사용하나, 아시아인들은 우아하게 젓가락을 놀린다. 적어도 17세기까지만 해도 서구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동아시아에 비해 야만적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조선시대만 해도 고도의 예법을 가진 양반문화를 갖고 있었다. 조선 말에 이르러 양반문화는 성차별과 신분제를 강화하는 제도로 형해화(形骸化)해 버린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서민들은 돈을 주고 양반을 사려 했으며, 그 고급문화에 자신의 계급의식을 담으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낡은 봉건적 신분제에 편입하는 수단으로만 여겼다. 그래서일까? ‘양반전’에서 양반의 예법은 차라리 풍자의 대상이 된다.

    양반의 도덕과 예법이 시민계급의 것으로 변형되고, 근대의 보통교육을 통해 사회의 모든 계층으로 확산되어야 했을 때, 우리는 일제의 침략을 받아야 했다. 이 때문에 우리의 ‘문명화’는 일제강점기에는 군국주의 문화, 광복 이후에는 군사주의 문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했다. 전사를 귀족으로 만들어낸 문명화 과정이 우리 사회에서는 거꾸로 인간을 산업 ‘전사’, 반공 ‘전사’로 바꿔놓은 과정이었다.

    우리 사회를 누군가는 ‘천민자본주의’라 부른다. 똑같은 자본주의인데 서구의 것과 달리 우리의 것이 ‘천민’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지금 우리는 시민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이 왜곡된 문명화의 문화적 천박성을 벗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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