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선 씨의 승무.
화려한 발레나 경쾌한 댄스와는 거리가 먼, 하지만 기(氣)를 모아 던지는 동작으로 인해 가빠진 숨을 또 다른 기로 절제하는 정적미. 하단전(下丹田)이 강하지 않고는 표현하기 힘든 자세를 바라보며 한국 춤은 태껸 같은 고래(古來)의 무도나 화엄으로 돌아가는 사물놀이와 유사한 도(道)를 가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춤이 끝난 다음이었다. 김 씨가 동료들과 인사를 마칠 때쯤 객석에서 중년의 신사와 한 남자 아이가 무대로 올라왔다. 진행자는 김 씨의 남편이자 일본 시코쿠(四國)에 있는 대일사(大日寺) 주지인 오구리 고에이(大栗弘榮·66) 스님과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한국 무용가와 일본 스님 부부라…. 한국 춤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고 일본 절은 신사(神社) 이상으로 일본적인 공간인데, 쟁쟁한 한국 무용가가 일본 스님에게 시집을 갔다? 기자의 단상은 흘러가는데, 무대복 차림의 김 씨는 부자(父子)에게 한없는 다정함을 표현했다. 그것이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87년 동아국악콩쿠르 전통무용 금상받은 실력파
독도 영유권에 대한 한-일 갈등이 잦아들던 5월 초 서울의 한 일식집에서 이 부부를 만났다. 먼저 김 씨와 대화를 시작하자, 스님은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회를 안주 삼아 히레 소주를 마시며 일본어로 “일본에서 먹던 생선회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일본 스님이 결혼을 하고 술과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흥미로웠다.
김 씨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온 사람이다. 대구에서 2남4녀의 맏이로 태어난 그는 열 살 되던 해 우연히 길거리에 나붙은 한국고전무용 발표회 선전문을 보고 찾아가 한국 춤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진 학원이나 독선생을 통해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고 학교 특별활동의 일부로서만 춤을 추었다.
그의 어머니는 통일교 신자였다. 그 인연으로 고교를 마친 뒤 서울에 올라와 통일교 대학생 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 1978년 종묘제례악 기능으로 제1호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가 된 김천흥(97) 선생에게서 제대로 된 한국 춤을 배우다 김 선생의 소개로 82년 이매방(77) 선생의 제자가 되었다(이 선생은 87년 승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면서 한국 춤의 거목이 되었다).
이때부터 김 씨는 춤에 인생을 걸기로 마음먹고 이론을 익히려 추계예대 국악과에 입학했다. 김 씨는 이 선생 집에서 살다시피 하며 춤을 배웠는데, 이 선생은 김 씨가 대회에 나가려 하면 손수 바느질을 하고 풀을 먹인 옷을 입혀줄 정도로 김 씨에게 정성을 쏟았다. 87년 동아국악콩쿠르 전통무용 부문 금상을 차지한 김 씨는 이듬해 이 선생의 승무 이수자 자격을 획득했다.
일본 대일사에서 결혼식을 올린 한국 무용가 김묘선 씨와 오구리 스님. 김묘신 씨의 옷을 봐주고 있는 이매방 선생(오른쪽).
그는 뜻한 바는 거의 다 이루는 진취적인 사람이지만, 미국 생활에서만은 성공하지 못하고 93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맡겨놓았던 인천의 무용단 활동에 전력하며 한국 무용의 최고봉을 향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나 집착이 강해서인지 연이어 물을 먹었다.
이러할 때인 95년 일본 시코쿠에 있는 통일교 모임 코리아문화연구회에서 그의 무용단을 초청했다. 시코쿠 도쿠시마(德島)에서 열린 환영 모임에서 그는 이 행사의 스폰서를 한 강한 인상의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남자는 빡빡 깎은 머리에 평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김 씨는 소개해주는 분의 일본어를 잘못 알아들어 ‘야쿠자가 우리 행사의 스폰서였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행사가 끝나고 그의 무용단은 숙소인 대일사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절 앞에는 아까 그 남자가 승복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비로소 그와 단원들은 ‘스폰서가 야쿠자가 아니라 스님’이라는 것을 알고 안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일사는 아주 ‘빵빵한’ 절이었다. 일본 불교에서는 최징(最澄) 스님이 만들었다는 천태종과 홍법(弘法, 774~835) 대사가 도입한 진언종 등이 유명한데, 대일사는 진언종 계열이었다.
홍법 대사는 시코쿠 출신으로, 시코쿠에 있는 88개의 절을 진언종 성지로 만들었다. 지금도 진언종을 따르는 사람들은 봄가을로 시코쿠를 찾아와 88개 절을 순례하는데, 대일사는 13번째 성지다. 대일사는 연간 찾아오는 순례객이 30만~50만명에 이르는 큰 사찰로, 오구리 스님은 이 절을 세습받아 지켜온 주지였던 것.
95년 첫 만남 … “한국 춤 세계화 돕겠다”로 청혼
스님도 김 씨 이상으로 파격적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주지의 막내아들이었던 그는 절이 싫어서 오사카로 도망쳐 사업을 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30대 초반에는 미국산 중고차를 월남에 수출해 큰돈을 벌었다. 여기저기 단골 술집이 즐비했고 주먹 싸움에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왕성히’ 활동했건만, 그의 호기는 사업이 부도를 맞으면서 꺾이게 되었다. 이러한 그를 구해준 것이 아버지였다. 그제야 그는 머리를 깎고 스님 되는 공부에 매진해 대일사를 이어받았다.
그는 봄가을이면 대일사를 찾아온 수많은 순례객의 아픔을 들어주는 일을 한다. 순례객 중에는 나병 환자를 비롯해 불치병에 걸린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러한 순례객들의 ‘도와줄 수 없는’하소연을 듣다 보면 그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는 “그러한 날은 너무 힘들어 한잔해야만 잠을 잘 수 있다”고 털어놓았다.
아무튼 스님은 큰 사찰의 주지여서 지역 문화활동을 많이 지원했는데, 그러다 56세이던 95년 김 씨(당시 38세)를 만났던 것. 연분을 느낀 스님은 다시 김 씨만을 초청해 “한국 춤을 세계화하는 데는 오히려 일본이 나을 수도 있다. 장차 한국 정부가 당신을 모셔가게 할 정도로 당신이 한국 춤을 추는 것을 지원할 테다”는 말로 청혼을 했다.
그 약속이 힘이 됐을까. 그해 김 씨는 서울전통예술경연대회에서 그토록 바라던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리고 스님과 결혼해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매방 선생은 이러한 그를 “여자는 아이를 낳아봐야 여자다운 춤을 출 수가 있다”며 격려했다.
어느 틈엔가 기자는 김 씨를 통역 삼아 스님과 문답을 주고받고 있었다. 스님은 김 씨와 결혼한 뒤 대일사가 더 한층 유명해졌다며, “며칠 전 일본 NHK 방송이 아내를 취재해갔고, 오늘 아침에는 나를 인터뷰해 갔다”며 “아내는 한국의 인간문화재가 되고, 나는 스님 세계의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 꿈이다”며 밝게 웃었다.
해탈을 위해 장엄하게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것이 한국 불교라면,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것이 일본 불교다. 그러한 차이가 그를 한국 무용가와 만나게 해준 것이 아닐까. 국적과 문화와 종교의 벽을 넘어 장년에 만난 두 사람은 사람 냄새 나는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