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련이 머물렀던 운림산방 전경.
나그네는 왕고개에서 발길을 돌려 상록수림이 울창한 첨찰산으로 달린다.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에는 고찰 쌍계사와 운림산방(雲林山房)이 돌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이 말년에 은거한 작업실이다. 소치 가문은 이곳에서 아들 미산 허영, 손자 남농 허건으로 대를 이어 남종화의 진경을 보여준다.
소치는 조선 순조 9년(1809)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년부터 해남의 윤선도 고택에 초동(樵童)으로 들어가 살면서 그림과 인연을 맺는다. 윤선도 고택에는 문인화가 윤두서의 그림과 화첩이 있어 전통 화풍을 익힐 수 있었다. 어린 소치가 차를 알게 된 것은 윤선도 고택에서 가까운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를 찾아가 살면서부터였다. 초의는 시서화에다 차까지 능한 선사였는데, 암자의 자잘한 일을 돕는 동자가 필요했던 터라 소치를 맞아들였다. 어린 소치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초의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봄이 되면 하루 종일 산에서 야생 찻잎을 따야 했고, 초의가 찻잎을 가마솥에서 덖어 내놓으면 그것을 비비고 말렸다. 지방 관리나 추사 김정희 같은 손님이 오면 마당 한쪽에서 주전자 밑에 솔방울을 모아 찻물을 끓이는 일도 소치가 도맡아했다.
궁중화가 되고 벼슬도 지중추부사 올라
따라서 소치는 20대에도 다도 공부만 했을 뿐, 그림 수업은 깊게 하지 못했다. 그에게 전기가 온 것은 초의가 소치의 재주를 알아보고 한양의 추사에게 소개한 뒤부터였다. 소치는 31세 때인 1839년부터 추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배웠는데, 추사에게서 중국 대가들의 구도와 필법을 익혔다. 그는 원나라 말기 산수화의 대가인 대치 황공망의 화풍을 익힌 뒤 자신의 호를 소치라고 했는데, 이때 추사는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고 평했다. 1846년에는 권돈인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린 그림을 헌종에게 바쳐 여러 차례 왕을 알현한 뒤 궁중화가가 되었고, 벼슬도 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칭송받았으며, 당시 교유한 인물로는 해남 우수사 신관호, 다산의 아들 학연, 민승호, 김흥근,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등이 있다. 그는 스승인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가 있는 동안 초의가 제다한 차를 가지고 위험을 무릅쓰고 세 번씩이나 바다를 건너가 스승을 위로하기도 했다. 추사가 1856년에 죽자, 소치는 다음해 한양을 떠나 고향 진도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한다. 자신의 이름도 남종화와 산수수묵화의 효시인 중국의 왕유를 본떠 허유라고 개명한다. 서울대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대표작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등이 삼절로 칭송받던 한양생활의 작품이 아니라 말년의 서화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에게는 사교의 시간보다 사색과 고독의 시간이 더 적실한 것이다.
소치에게 차 한잔은 말년의 고독을 달래주는 도반(道伴)이었을 터다. 곤궁해진 그에게 차는 1892년 84세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감로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유서의 한 대목이 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
‘자고로 이름난 사람들을 보아라. 죽을 때까지 불우하여 곤궁하게 지냈다. 내가 일세에 삼절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내 분수에 넘치는 일, 어찌 그 위에 부귀를 구했겠느냐.’
가는 길
진도대교를 건넌 다음 진도읍으로 가서 의신면 쪽으로 직진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의 첨찰산과 소치가 은거했던 운림산방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