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아술린 지음/ 이기언 옮김/ 두레 펴냄/ 256쪽/ 1만2800원
프랑스는 조국을 배반하고 나치에 협력해 부역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처벌했다. 인류 역사에서 자기의 부끄러운 역사를 단호하게 바로잡은 가장 전형적인 본보기를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 국민 모두의 지지를 받았을까. 모든 부역자들이 공평한 처벌을 받았을까. 또 부역자들을 어떻게 처벌했을까.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기자이자 작가인 피에르 아술린이 쓴 ‘지식인의 죄와 벌’은 이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상이 비록 지식인 중심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과거와 현실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에 충분하다.
프랑스는 1944년 8월 나치에서 해방된 뒤 약 2년에 걸쳐 1만여명의 부역자를 처형했다. 이 처형자 수는 공안 경찰의 집계나 드골의 회고록에 의한 수치이므로 실제 처형자 수는 훨씬 많을 것이란 주장이 적지 않다.
일반의 생각과 달리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다수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이뤄진 것이 아니다. 과거사 청산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나치에 부역한 지식인의 숙청 문제는 레지스탕스 측과 우익·보수진영 간의 찬반 논쟁으로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저자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는 프랑스 모리악과 카뮈의 치열한 논쟁을 소개했다.
전형적인 가톨릭 신자이자 부르주아 작가였던 모리악은 프랑스의 전통 우익을 대변하는 ‘르 피가로’지의 논설을 통해 숙청의 부당성과 자비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가 서로 (죽음의) 쳇바퀴를 돌리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란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제4공화국이 게슈타포의 장화를 신어서는 안 된다.” 즉 적이 우리에게 한 짓을 우리가 적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승자의 진정한 위대함은 패자가 쓴 무기를 패자에게 쓰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두 번에 걸쳐 게슈타포에게 붙잡힐 위기를 넘겼던 청년 작가 카뮈는 저항 지식인들의 대변지인 ‘투쟁’의 사설을 통해 모리악을 비난하면서 배신자와 반역자들을 인간의 정의에 따라 엄정히 처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내가 숙청을 언급하면서 정의를 외칠 때마다 모리악은 자비를 말한다. 내가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마치 증오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면서 모리악은 우리가 예수의 사랑과 인간의 증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단지 치욕 없는 진실을 원할 뿐이다.”
논쟁의 결말은 숙청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겪은 숙청은 공평하지만 않았다. 문인이나 언론인, 출판인 등 지식인은 다른 분야의 부역자들에 비해 더한 처벌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지식인들의 구실과 책임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나 언론인들의 부역행위는 인쇄물로 고스란히 남아 증거 확보가 쉬웠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경제인들의 행위는 은밀하게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계약서나 회계장부, 영수증 등 거래 내용을 뒷받침할 증거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 상대적으로 처벌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지식인 숙청은 그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하나둘 문제점이 드러났다. 혁명 열기 속에서 진행된 재판, 적법성의 애매함, 불공정한 심판, 정치적 의도의 작용 등등. 당시 숙청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개인의 권력이나 정당의 권력을 염두에 두고 단죄를 도약대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다. 아마 훗날에 ‘과거사 청산 과정’에 대해 다시 청산하자는 주장이 제기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과오가 있었음에도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우리에게 부러움을 안겨준다. 과거사 청산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Tips
드골(De Gaulle, 1890∼1970) 프랑스의 군인, 정치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뒤 수상, 대통령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망명지 런던에서 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항전을 호소했는데, 이후 드골의 이름은 독일에 맞서 싸우는 프랑스를 상징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