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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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는 피부색을 막지 않는다”

  • 입력2005-01-26 15: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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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콕국제영화제의 프레스 룸 게스트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 궁금증이 생겼다. 그는 왜 방콕에 왔을까? 자료를 뒤져봐도 ‘007 다이 어나더 데이’(2002년) 이후 그가 새로운 영화를 찍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릭윤이라는 이름은 지금,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계 배우인 그에게 보내던 지지는 그가 ‘007 다이 어나더 데이’의 자오 역으로 등장하면서 수그러졌다.

    릭윤의 한국 이름은 윤성식. 그는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인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톤 비즈니스 스쿨에서 금융 기업경영을 공부할 때 모델로 발탁되었고, 랠프 로렌이나 베르사체의 모델로 국제적 지명도를 얻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대학 졸업 후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주식 및 선물 중개업을 하는 증권거래인으로 일했다. 릭윤이 영화에 데뷔한 것은 ‘샤인’을 만든 스콧 힉스 감독의 ‘삼나무에 내리는 눈’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된 데이비드 구터슨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 그는 젊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나왔다. 조연급이었지만 186cm의 잘 다져진 몸매와 인상적인 연기로 배우로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렀다.

    동생 칼윤도 배우의 길 … 성공한 한국계 미국인

    릭윤의 다음 작품은 ‘패스트 & 퓨리어스’(The Fast and the Furious, 2001년)였고, 세 번째 작품이 문제의 ‘007 다이 어나더 데이’다. 방콕국제영화제의 게스트 인터뷰 담당은 미국인이었다. 2004년 방콕국제영화제의 디렉터로 팜스프링스 영화제에 관련된 미국인들을 영입했기 때문에 영화제의 주요 스태프들 중에는 미국인이 많았다.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다음날 전화가 왔다. 우리는 영화제 본부가 있는 샹그리라 호텔 게스트 룸에서 만났다. 노타이 차림의 그는 지난번 한국을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이었다.

    나는 ‘삼나무에 내리는 눈’이 국내 개봉할 무렵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그때는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훨씬 인상이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부드러운 인상 속의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의 동생 칼윤(윤성권) 역시 릭윤과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칼윤은 로레알 광고 모델로 이름을 알린 뒤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하고, 지난해 드와이트 리틀 감독의 ‘아나콘다2: 사라지지 않는 저주’로 영화계에 데뷔해 지금은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먼저 릭윤에게 왜 방콕국제영화제에 참가했는지를 물었다. 그는 2월부터 자신이 출연하는 새로운 액션영화 ‘5번째 계율’이 태국에서 촬영에 들어간다고 했다.



    “007 이후 많은 도전 … 실수하면서 깨닫는 과정”

    올해 방콕국제영화제에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지난번 영화제에서 ‘007 다이 어나더 데이’가 소개된 것을 인연으로 또다시 방콕을 찾았다는 것이다. “동생의 첫 번째 영화는 성공적이었고, 지금은 점점 더 잘하고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연극도 했으며 단편을 포함해서 벌써 8편의 영화를 찍었다.” 2남1녀인 그에게는 누이가 한 명 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계 미국인이긴 하지만 앵글로 색슨계와 달리 맡을 수 있는 배역에 한계가 있고 인종적 장벽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피부색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카메라 앞에서 제대로 연기할 수 없다. 물론 영화시장에서는 조금 더 도전하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할리우드는 피부색을 막지 않는다”

    ‘007 다이 어나더 데이’ 당시의 릭윤.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의례적인 답변만을 기록한다면 너무도 재미없는 인터뷰가 될 것이다. 나는 데뷔 이후 그가 느낀 어려움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는 인종적 차이에 대한 질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표정이다. “미국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당신의 질문은, 만약 내가 흑인이라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느냐와 같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제한은 있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살았어도 힘든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자라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활동한다면 한국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지 않겠는가.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고 도움을 받은 적도 없다. 다만 나에게 도전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심히 노력했을 뿐이다. ‘007’ 이후로도 많은 도전이 있었다.”

    모델 출신인 그는 체계적으로 연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분명히 배우로서 느끼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액팅 클래스에 가려고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연기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거다.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연기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내가 깊은 영감을 받아 연기를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느낌이 전달되지 않겠는가. 연기는 과학 같은 게 아니라서 자기 자신이 실수도 하고 그러면서 깨달아야 한다. 이 분야가 세계에서 가장 힘든 비즈니스다.” 그가 연기를 할수록 더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진정한 배우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감독이나 영화가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모든 감독이나 배우들한테서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짐 캐리가 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없고 내가 하는 것을 짐 캐리가 할 수 없듯이, 모든 배우에게는 그만의 독특한 무엇이 있다. 사람들의 생각은 언제나 변한다. 나도 그렇다.”

    최근에 한국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자주 수상하고 할리우드에서도 한국영화의 판권을 사서 리메이크를 시도하는 사례가 많다. ‘조폭마누라’ ‘ ‘올드보이’ ‘달마야 놀자’ 같은 영화 판권이 할리우드에 팔린 것을 알고 있는지, 또 최근 본 한국영화 중 인상적인 영화는 무엇인지 물었다. “ ‘태극기 휘날리며’의 원빈이 인상적이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영화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나는 좋은 영화들이 그 나라의 산업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한다. ‘올드보이’ ‘조폭 마누라’ 같은 영화에는 관객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할리우드는 피부색을 막지 않는다”

    영화 홍보차 한국을 방문했던 릭윤.

    “한국영화 발전 깜짝 놀라 … ‘태극기’ 원빈이 인상적”

    그는 2001년 부산영화제에 참가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한국에 오고 싶은데 ‘007’ 사건 때문에 불편해서 못 오는 것은 아닐까? “부산영화제는 아시아의 칸영화제다. 한국에 가고 싶은데 나도 내 스케줄을 알 수 없다. 방콕에 오는 것도 이틀 전에 정해졌다. 일정에 관한 것은 모두 내 에이전시에서 하고 있다.” 그는 ‘007’에 대해 차인표 및 한국 누리꾼(네티즌)들과 잠시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릭윤이 할리우드에 기반을 둔 한국계 배우라는 점을 인정해도, 우리 국민이 실망한 것은 ‘007’의 왜곡된 북한 묘사가 그를 통해서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미선이, 효선이가 미군 탱크에 죽은 사건도 알고 있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났다. 그러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북한군 병사를 연기한 배우가 있지 않느냐. 그런데 내가 북한 군인을 연기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연기는 허구다. 현실이 아니다. 내가 이 역을 맡지 않았으면 중국계나 베트남계 등 다른 아시아 배우들 중 누군가가 했을 것이다. 나는 이 배역에 처음부터 캐스팅되었고, 연락도 가장 먼저 받았다.” 송강호나 신하균이 맡은 북한군 병사와 릭윤이 맡은 자오 역은 전혀 다르다. 미국 처지에서 악의 축인 북한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자오가 동원되었다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북한 측 병사는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또 하나 ‘007’과 관련해서 국내에서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차인표가 거절한 역을 릭윤이 맡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차인표도 자신이 제의받은 배역은 문 대령 역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릭윤이 맡은 배역은 자오. 아마 그는 그 점을 다시 강조하는 것 같았다.

    “할리우드는 피부색을 막지 않는다”

    영화 ‘삼나무에 내리는 눈’.

    그러나 릭윤은 자신이 ‘007’에 출연한 것에 대해 느끼는 한국 관객들의 불만의 강도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나의 계속되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기는 아닌 듯 느껴졌다. 그 영화가 우리에게 일으킨 정서적 반응이 그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배역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런 선택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그런 비난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내가 뭘 잘하고 뭘 잘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잘못된 부분을 빨리 고치고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

    릭윤은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런던에도 집이 있어서 자주 왔다갔다한다. ABC에서 2월 방영 예정인 드라마에 변호사로 등장할 예정이다. 촬영은 이미 마친 상태. 2월부터는 새로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영화 ‘5번째 계율’ 촬영에 들어간다. 나는 그가 칼윤과 함께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웃으면서 자신도 그럴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곧바로 방콕영화제의 본부가 있는 샹그리라 호텔 야외수영장에서 영화제의 부대 행사인 방콕필름마켓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파티 도중 태국 관광청장과 인터뷰를 했는데, 릭윤이 다가와서 다시 내 손을 꼭 잡더니 인터뷰 정말 고마웠다고 했다. ‘007 사건’ 이후 국내 언론과 제대로 된 인터뷰 없이 간접적으로 그의 의견이 소개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할리우드는 피부색을 막지 않는다”

    ‘007 다이 어나더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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