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이 여생을 보낸 경남 산청군 산천재 전경.
봄 산 어디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오/ 다만 천황봉이 상제(上帝)와 가까움을 사랑해서라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거나/ 은하가 십 리이니 먹고도 남으리(春山底處无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猶餘).
산천재 마당을 지키는 매화나무 고목이 꽃망울을 달고 있다.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에 남명의 혼이 깃든 것 같다. 매화가 귀한 대접을 받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꽃들이 겨울 추위에 자취를 감추고 없을 때 홀로 피어 있기 대문이리라. 매화마저 피지 않는 겨울은 얼마나 삭막한가. 가지가지에 피어난 매화나무 꽃망울이 더 이상 움츠러들지 말라고 마음의 균형을 잡아준다. 그래서 나그네는 매화를 반갑고 귀한 손님으로 여긴다.
남명도 매화나무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의 소임은 무엇보다 학문이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기울었을 때 그 반대편에 서서 균형을 잡아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남명은 벼슬하기를 철저히 거부한 채 학문을 더욱더 연마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꽃피우게 한 유학자였다. 산천재 마루 벽에 그려진 벽화가 남명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면 벽에는 바둑을 두고, 오른쪽 벽에는 차를 달이고, 왼쪽 벽에는 쟁기질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직언 서슴지 않는 상소로 위상 높아져
남명은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경남 합천 삼가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한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면서 학문을 익혔다. 19세 때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극형에 처해지고 숙부 언경(彦卿)이 파직되는 것을 보고는 세상의 부조리를 느꼈다. 25세 때 어느 절에서 ‘성리대전’을 보다가 ‘벼슬에 나아가서도 하는 일이 없고, 산림(山林)에 처해서 지키는 것이 없다면 뜻한 바와 배운 바를 무엇에 쓰겠는가?’라는 구절을 읽고 크게 깨달아 과거공부를 단념했다. 그리고 30세 때부터는 처가가 있는 경남 김해 신어산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제자를 길렀으며, 이후 헌릉참봉·전생서주부(典牲暑主簿)·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상소에서 ‘대비는 생각이 깊으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어리시어 선왕의 한 고아일 뿐입니다’라고 하여 조야를 크게 술렁이게 했다. 이 같은 직언은 산림처사의 위상을 재고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남명은 만년(61세)에 여생을 보내려고 산천재를 지어 벽에 써둔 경(敬)과 의(義)를 지키며 살다가 72세 때 운명했다. 경과 의는 ‘주역’의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구절에서 연유한 말인데, 이는 남명 사상의 핵심이기도 했다. 그는 패검에까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구절을 새기고 다녔다. 운명할 때 제자들이 그에게 사후 칭호를 묻자, ‘처사(處士)로 하는 것이 옳다. 만약 벼슬을 쓴다면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와 경이 남명에게 서릿발 같은 지침이었다면 차와 바둑, 그리고 쟁기질은 그의 삶을 따뜻하게 한 훈풍이었던 셈이다. 그렇다. 남명이야말로 유학자 산림처사로서 냉철한 머리와 훈훈한 가슴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다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는 길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단성 인터체인지에서 경남 산청군 지리산 중산리 쪽으로 직진하다가 대원사 가는 삼거리에서 덕산 쪽으로 내려가면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