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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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이단아 … 나 홀로 깃발 휘날리며

  • 입력2005-01-05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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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로 이단아 … 나 홀로 깃발  휘날리며
    박철수 감독이 소리 소문 없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완성된 후 1년 반이 넘도록 개봉도 안 하고, 그런 영화가 있다는 소문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런 박철수 감독의 ‘녹색의자’가 1월20일 개막하는 선댄스영화제에 출품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전화를 했다.

    “하 작가, 오랜만입니다.”

    그에게 나는 여전히 작가였다. 영화 비평으로 밥 먹고 산 지 10년이 훨씬 넘지만, 내가 시인이며 소설 쓰던 시절에 만났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나를 하 작가라 부른다.

    1990년대 중반 ‘박철수식 영화 찍기’라는 말이 있었다. 그는 주류 충무로에 반기를 들고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었다. 예산을 절약하는 방법은 스타를 동원하지 않고 속전속결로 찍는 것이다. 제작비는 촬영 횟수에 비례해 상승하니까. 그는 2주일 안에 모든 영화 촬영을 끝냈다. 김기덕 감독에 의해 계승된 이런 방식은, 당시에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스타 없이 속전속결 제작 해외 시장 겨냥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여요?”라고 묻는다. 주위에서 자신을 이상하게 본다는 것이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좋다. 인간이나 문화를 관습적 태도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돈 만드는 일과 거리가 있다. 보편성을 일탈하면 절대 돈은 안 생긴다. 그러나 영화감독이 돈을 만들지 않으면 영화를 찍을 수 없다. 그는 어떻게 돈을 만들까?

    “우리 문화를 상품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오리엔탈리즘이다. 그것과 가장 맞닿아 있는 것이 한국 선불교다.”

    박철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오세암’이나 ‘성철’ 같은 불교영화가 들어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는 국내 흥행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제작한다는 얘기다.

    충무로 이단아 … 나 홀로 깃발  휘날리며

    성철, 오세암.(왼쪽부터)

    “ ‘오세암’ 끝내고 93년에 NYU(뉴욕대)에 갔다.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는데, 오히려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 학생들 앞에서 나는, 스토리 텔러가 아니라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너무 스토리에 치중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때는 내가 픽션을 이야기하는지 진실을 이야기하는지 나 스스로 모를 때가 많았다. 나는 두려웠다. 사실 대학 2학년 때까지 영화 두 편밖에 보지 않았다. 너무 가난해서 장학생이 되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대학시절, 나는 의식적으로 영화와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극장 언저리에만 가도 공부를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다 영화와 만나면서 이야기 만들기에 치중했다. 그런 내 영화 인생을 반성하는 계기가 된 것이 뉴욕 시절이다.”

    여행은 내가 살던 곳을 떠나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낯익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에서의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자신의 영화를 생각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한다.

    “미국에서 나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동안 그것을 찾지 못하고 살았다. 말이 잘 안 통하니까 먹는 게 기다려지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건 거짓말하지 않고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정일의 시를 읽다 구상이 떠올랐다. 그것이 ‘301·302’다. 그때 미국에서는 다이어트가 담론의 중심이었다. 섹스, 음식 이런 것이 미국 문화의 트렌드였다.”

    장정일의 ‘301·302’는 매우 연극성이 강한 시다. 설치미술가 최정화가 미술을 맡은 그 영화는 박철수 영화인생의 분기점이다. 나는 강렬한 시각적 조응 속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사람의 일상은 창작 주체에게는 소재의 보고다. 삶의 본질을 세시풍습과 같은 모습으로 엮어보자고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화두는 ‘학생부군신위’로, 태어나는 것은 ‘산부인과’로, 그리고 가족 이야기로는 ‘가족시네마’를 찍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영화 속에서 일본어로 대사를 하는 것은 금기였지만 나는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 원작의 ‘가족시네마’를 대부분 일본어로 찍었다. 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일본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가, 박철수 감독 일본 망명설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결국 ‘가족시네마’ 개봉을 기점으로 우리 영화 속에서의 일본어 발성 금지가 해제되었다.”

    나는 박철수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족시네마’를 가장 좋아한다. ‘301·302’ 이후 지속된 그의 실험이 가장 성과를 드러낸 영화이기 때문이다. 핸드 헬드(카메라 들고 찍기)를 적극 사용해 삶의 역동성을 드러내면서 인간 본능을 탐색하는 이 영화는 뛰어난 표현의 깊이를 획득하고 있다.

    충무로 이단아 … 나 홀로 깃발  휘날리며

    301.302, 산부인과, 가족시네마. (위부터)

    그러나 그 뒤에 찍은 서갑숙 주연의 ‘봉자’는 실패했다. 극장 개봉된 최초의 한국 디지털 영화 ‘봉자’는 박철수식 영화찍기의 장점을 모두 버린 작품이다. 나는 실망했다. 디지털과 박철수가 만나면 굉장한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왜 그는 더 역동적일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로 오히려 필름처럼 정석으로 찍었을까? 혹시 서갑숙이라는 당대의 호기심을 상업화하기 위해서였을까? 그의 대답은 달랐다.

    “디지털카메라는 35mm 필름에 못 미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디지캠으로 찍으면서도 35mm 이상의 효과를 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봉자’는 디지털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너무 경직된 자세로 영화를 찍었다. 그래서 실패했다.”

    그동안 박철수 필름은 대전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지역에서 새로운 영화를 찍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는 수천억원이나 되는 국민 혈세로 만들어진 엑스포 단지에 세트장을 만들고 싶었다. 또 미국 메이저 필름에서 동양의학을 소재로 영화 만들자는 제의가 있어서 1년간 시나리오 작업도 하고 앤터니 홉킨스를 만나기 위해 노력도 했다. 그러다가 ‘녹색의자’를 만들었다.

    “ ‘녹색의자’는 충무로 토착자본으로 만든 영화다. 그동안 영화 만들면서 투자사, 대기업, 정부의 자본을 썼는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 개인 돈이 없어서 이 자본 저 자본 쓰다 보니 나중에 남은 것이 충무로 토착자본이었다. 예전의 충무로 자본은 지금 다 사라졌다.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서울극장 곽정환씨다. 그래서 만났다. 그리고 ‘섹스가 하고 싶다’고 했다. ‘아, 그래, 섹스 해야지, 섹스 영화 만듭시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게 ‘녹색의자’다.”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배설하고. 이런 인간의 본능적 행위는 그만큼 말초적일 수 있다. 서정적 깊이나 서사적 확대 대신 감각적 자극에 치우치면 상업적으로 흐르게 된다. 박철수류의 영화가 진정성과 맞닿으면서 깊이를 획득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나의 불만은 그가 너무 계산을 한다는 것이다. 김기덕은 박철수 영화에서 상업적 계산을 거세하고 출발한다.

    소자본 디지털 영화 제작 가시적 성과

    “그동안 섹스 신 찍을 때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그냥 찍었다. ‘나인 하프 위크’류의 영화는 무드나 테크닉 위주다. 섹스 신을 엑사이팅한 행위로 몰아간다. 그런 것이 못마땅하다. 커트를 테크닉하게 가지 말고 정직하게 가자고 생각했다. 침대 위에서든 어디서든 정직하게 보여주자. 섹스 장면에서 카메라가 숨는데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녹색의자’의 여주인공 서정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런데 남자 배우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너희에게 실제 성행위를 강요할지 모른다, 그랬더니 모두들 두려워했다. 결국 심지호(KBS 드라마 ‘금쪽 같은 내 새끼’에서 이덕화 사위 역)가 캐스팅됐다. 가족회의를 했는데 심지호 어머니가 ‘아무려면 박철수 감독이 엉터리 영화를 만들겠냐’고 해서 영화를 찍게 되었다. ‘녹색의자’는 30대 유부녀가 10대 후반의 소년과 역(逆)원조교제를 하는 내용이다. ‘오션스 트웰브’ ‘에린 브로코비치’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과 친하다. 그가 2002년 월드컵 당시 인터넷으로 ‘korean’을 검색하다 실제로 국내에서 그 당시 있었던 역원조교제 기사를 보고 재미있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녹색의자’의 변태적이거나 감각적인 섹스 장면이 공개된다면 남녀 주인공의 실제 성행위 여부가 문제가 될 것이다. 심의는 18세 이상으로 나와 있다.”

    충무로 이단아 … 나 홀로 깃발  휘날리며

    봉자, 녹색의자, 학생부군신위. (위부터)

    그의 말을 정리하면, ‘녹색의자’의 성행위 장면은 사실적이다. 그 사실성은 눈속임 없는 촬영에서 비롯된다. 배우들의 실제 섹스를 찍었을 수 있다는 발언이다.

    “기술시사를 한 뒤 곽정환 사장은 절대로 흥행이 안 될 것 같다고 판단했는지, 배우 얼굴도 클로즈업으로 다시 찍어 삽입하자고 자기 방식의 재편집을 요구했다. 40년 동안 영화하면서 내 말 안 들은 사람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재편집 요구를 거절했고, 결국 필름은 1년 반 동안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 그후 ‘미로비전’에서 ‘녹색의자’ 판권을 사서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공식 상영을 했다. 선댄스영화제의 프로그래머인 제프리 길모어가 나를 초청했다. ‘301·302’ 이후 내가 만든 영화들이 대부분 선댄스영화제에 소개되었다. ‘학생부군신위’의 경우 조지워싱턴대학에서만 박사학위 논문이 2개가 나왔다.”

    ‘학생부군신위’는 불과 10일 만에 촬영을 끝낸 작품이다. 국내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예술공헌상을 받았다. 그의 저예산 영화들은 국내보다는 해외 흥행을 더 염두에 두고 제작된다. 그러나 한탕주의가 횡행하는 충무로에서 독립영화를 만들기가 쉬운 일인가.

    “박철수 필름이 93년 출범했으니 벌써 10년을 버틴 셈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영화가 산업의 한 부분이 되면서 투자사들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다. 결국 트렌드 영화만 양산되고 있지 않은가. 2005년에는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 베를린영화제의 파노라마 부문에 여덟 번이나 참가했는데 그곳에서는 내 영화 ‘성철’을 기다리고 있다. 80% 촬영을 마쳤는데, 현재는 보류상태다. 곧 다시 찍을 생각이다. 시인 장석남씨가 성철 스님 역을 맡았다. 그런가 하면 가벼운 컨셉트를 유지하면서 성형외과를 들여다보고 싶다. 에밀레종 설화도 영화로 만들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내 마지막 영화가 될지 모르겠지만, 대체역사적 시각에서 본 베트남전 영화를 만들고 싶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베트남전 영화들이 엉터리였다는 것을 반드시 고발하겠다. 나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그때 우리는 철저하게 팔려가는 노예 군인이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화는 자본을 먹고 사는 예술이다. 독립영화 감독은 자본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수없이 절망한다.

    “지금, 내 가슴속에서는 분노가 사라졌다. 이제 분노로 일관된 삶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서 그것과 싸워가겠다.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갖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지금 그는 뉴 시네마 네트워크(NCN)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젊은 감독들에게 제작비로 현금 2억5000만원을 주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연계해서 소자본으로 다수의 디지털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협력이 성사 단계에 있고 2005년에는 가시적 성과가 있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충무로 이단아 … 나 홀로 깃발  휘날리며

    30대 유부녀와 10대 소년의 섹스를 다룬 박철수 감독의 \'녹색의자\'.

    “서울에서 출발해서 동아시아 쪽으로 네트워킹을 하면 오리엔탈리즘의 영화 에너지가 형성된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강의 IT(정보기술) 강국이지만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콘텐츠 개발이 시급하다. 멀티플렉스 공간도 이대로 가면 망한다. 극장 점유율도 숫자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제작비, 광고비는 터무니없이 거품이 낀 상태로, 모두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거품 좀 빼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장르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한 시대의 문화적 깊이가 확립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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