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8일 미국 최고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왼쪽)가 ‘The Apprentice(견습생)’ 출연진과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장난 광고일까. 아니다, 진짜다. 미국 굴지의 TV 채널에서 경쟁적으로 나오는 광고다. 높은 연봉과 명예로 선망의 대상인 뉴스 앵커를 ‘공개’ 채용하는 방송사들이 늘고 있다. 최근 수년 새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로 자리잡은 ‘리얼리티 쇼’ 바람이 난공불락의 영역에까지 몰아친 것이다.
뉴스에 엔터테인먼트 결합
이른바 ‘직장 잡기(job hunt)’ 리얼리티 쇼다. 새삼스럽지는 않다. 가장 대표적인 건 ‘The Apprentice(견습)’. 전국 방송인 NBC의 인기 프로그램이다. 미국 최고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제작과 쇼 호스트를 맡았다. 수천명의 지원자 중에서 추린 18명을 상대로 각종 테스트, 이벤트를 통해 최종 승자를 가린다. 우승자에겐 트럼프 그룹의 계열사 한 곳의 사장 자리가 기다리고 있다. 1년간 회사를 직접 경영할 수 있다. 물론 엄청난 연봉과 대우가 보장된다. 테스트 과정 및 최종 후보들의 경쟁과 시시각각의 심리상태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TV 시리즈로 방송되고 있다. 후보들, 아니 출연자들은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순간순간 환희와 절망의 모습이 가감 없이 TV 화면에 쏟아진다. 당연히 인기는 높다. 매주 목요일 9시(미국 동부시간) 프라임 타임을 단숨에 석권했다. 지난해에 시작돼 시청률 돌풍을 일으키자 NBC는 부랴부랴 2차 시리즈를 만들어 지난달부터 방영하고 있다.
하지만 ‘The Apprentice’는 쇼적인 성격이 강하다. 계열사 사장을 채용한다기보다는 ‘서바이벌 쇼’처럼 경쟁에서 살아남은 한 사람에게 엄청난 보상을 해준다는 고답적인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백만장자 남녀 주인공을 차지하려는 지원자들의 경쟁을 담은 ABC의 ‘The Bachelor(미혼남)’와 ‘The Bachelorette(미혼녀)’처럼 일회성 구인 이벤트의 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앵커 공채쇼’는 기존의 ‘job hunt’ 쇼와 방향을 다르게 잡았다는 게 특징이다. 일단 쇼적인 요소를 최대한 줄였다. 실제 채용 과정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시청자들은 인터뷰와 실기 테스트,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냉혹하기까지 한 평가와 당락 판정을 안방에서 지켜볼 수 있다. 프로그램은 마치 자신이 지원자나 심사위원이라도 된 것처럼 빨려들게 한다. 일회성 이벤트도 물론 아니다. 최종 합격자는 정규직 뉴스 앵커에 채용된다. 그리고 트레이닝을 거친 몇 달 뒤 간판 뉴스에 투입된다. 시청자들은 실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의 탄생과 성장을 처음부터 낱낱이 지켜보는 셈이다.
미국의 스포츠전문 케이블방송 ESPN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Dream Job(드림 잡)’의 한 장면.
미국 LA 지역방송 KTLA의 기상캐스터 선발 프로그램 ‘The Audition(오디션)’ 출연자들.
“앵커는 내 손으로” 시청자 욕구 많아
이 프로그램은 첫해부터 큰 히트를 쳤다. 전국에서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렸다. ESPN은 뉴욕 본사 사옥을 몇 겹으로 둘러친 지원자들의 줄을 시그널 화면으로 장식하고, 1차 면접부터 전 과정을 시리즈로 제작했다. 최종 후보에 오른 12명의 인터뷰와 뉴스 진행 테스트가 매주 월요일 프라임 타임에 2시간씩 방영됐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기존 앵커와 해설자 등 4명의 심사위원의 매서운 평가도 곁들였다. 여기에 더해 ESPN은 아예 시청자들을 쇼에 끌어들였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한 당락 예상 투표 결과를 최종점수에 20% 반영하기로 한 것. 매회 방송 때마다 투표 참가 시청자의 수는 10만명을 넘었다.
첫 회 우승자인 미주리 대학 출신 마이크 홀은 6개월간의 수습 리포터를 거친 뒤 스포츠 뉴스 앵커로 투입됐다. 1년이 지난 지금은 낮 시간대 ‘스포츠센터’의 앵커로 날마다 시청자들과 만나고 있다. 2회째인 올해는 지원자가 더욱 많아졌다. 5회로 제작된 1차 시리즈에 비해 방영 횟수도 8회로 늘었다. 시청률도 10%에 육박했다. 치열한 경합 끝에 켄트 대학 4학년생인 데이비드 홈스가 주인공으로 뽑혔다. 두 차례 성공으로 고무된 ESPN은 내년 2월에 3차 시리즈를 내보낼 계획이다. 이번엔 앵커가 아니라 프로스포츠 선수 출신을 대상으로 ‘전속 해설가’를 뽑는 기획을 마련하고 있다.
2003년 5월 ‘The Bachelor(미혼남)’ 프로그램을 통해 맺어진 앤드루(왼쪽)와 젠이 포옹하고 있다.
많은 방송 관계자들은 ‘앵커 공채 쇼’가 뉴스가 지닌 저널리즘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비난이 이는데도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시청률의 마력’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공채 쇼의 시청률도 매력적이지만 여기서 탄생한 ‘병아리 앵커’가 무시 못할 지명도를 안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명망 있는 스타급 앵커를 보유하지 못한 로컬방송사로서는 간판 뉴스 프로그램의 인기를 단숨에 올려놓을 수 있는 기회다.
실제로 공중파 전국방송과 ‘케이블공룡’ FOX의 위세에 눌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ESPN은 ‘Dream Job’ 프로그램의 성공으로 홍보 효과뿐 아니라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그래서 무수한 비난과 조롱을 받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시리즈를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KTLA 역시 이번 쇼에서 뽑은 두 명의 기상캐스터가 실전 투입될 내년 1월을 기대하고 있다. 이제 조만간 미국 여러 지역에서 정규뉴스 앵커의 공개 채용 쇼를 보는 것은 시간 문제일 듯하다. 기자 출신의 중후하고 노련한 앵커가 아니라, 잘생긴 데다 실력까지 갖춘 앵커를 ‘내 손으로 뽑고 싶은’ 시청자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