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이용경 사장(왼쪽)과 KTF 남중수 사장.
11월21일, 러시아를 방문하고 있던 KT 이용경 사장이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증권업계 등에서 KT-KTF 합병 가능성이 거론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당사자가 직접 나서 필요성을 ‘공식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사장은 합병 시기에 대해서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두 회사 사이에 협조가 잘 되고 있어 아주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두 회사를 다른 회사로 생각하는 직원들의 정서가 있지만, KTF의 장래는 KT와 연관돼야 할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11월23일 아침, 이 사장의 발언이 알려지자 주식시장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웬만한 재료에는 꿈쩍도 않던 KT 주가가 전날보다 1500원(3.78%) 상승해 4만1200원을 기록한 것. KT 주가가 4만원을 넘어선 것은 7월 이후 처음이다. KTF 주가 상승률은 더 커 전날보다 5.42%나 뛰어오른 2만1400원을 기록했다.
필요성과 필연성으로 주가 반등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KT와 KTF는 즉각 “큰 의미를 둘 만한 발언이 아니다”며 진화에 나섰다. 11월24일 KTF는 “최근 일부 언론 보도기사에 게재된 KT-KTF 합병 가능성과 관련해 현재까지 당사에서는 검토한 바가 없다”고 공시했다. KT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나 뉘앙스는 달랐다. “통신시장의 유·무선 통합 추세를 반영해 합병 가능성을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으나 구체적 계획이나 일정은 없다”는 것. 이는 곧 “시기를 정하지 못했을 뿐 필요성은 분명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실제로 두 회사 주가는 양사의 부인 발언에도 떨어질 줄 모르고 있다. 12월3일 KT 종가는 4만2900원, KTF는 2만3400원이다. 주식시장이 합병의 ‘필요성’과 ‘필연성’에 대한 가치 판단을 이미 내려버린 것이다.
KT는 요즘 매출 신장에 도움이 될 만한 신사업 개발에 골몰하고 있다. 9월 선보인 KT의 건강관리 서비스 ‘유 헬스’.
여기서 2강이라 함은 SKT그룹(SKT+하나로)과 KT그룹(KT+KTF)을 뜻한다. 이렇게 될 경우 LG그룹은 통신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LG텔레콤(이하 LGT)도 매각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그 대상은 KTF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KTF는 9월 임원회의에서 LGT 합병에 대한 논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KTF 내부에서는 벌써 “LGT는 한 식구가 될지 모르니 너무 세게 밀어붙이지 말라”는 농담 반 진담 반 얘기가 흘러나오는 형국이다.
이른바 2강 체제가 한국 통신산업의 미래일 수 있음은, 지금의 3강 구도로는 각 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업계와 주식시장에 폭넓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KT의 사정을 들여다보자.
KT는 기존 유선전화 시장의 침체로 심각한 매출 감소 위기에 직면해 있다. KTF 휴대전화 재판매로 이를 겨우 만회하고 있으나, 신사업 진출로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려면 휴대인터넷(와이브로) 등 유·무선 결합을 통한 시너지 창출이 시급한 시점이다.
2005년 5월과 2007년 1월에 각각 예정돼 있는 두 차례의 EB(교환사채, 사채권자의 의사에 따라 주식 등 다른 유가증권으로 교환할 수 있는 사채) 상환 문제 해결도 큰 과제다. 각각의 주당 교환 가격은 5만9400원과 5만588원. 현재 주가로는 EB의 주식 전환을 유도할 수 없다.
이는 곧 ‘KT 민영화 실패’라는 평가로 이어질 수 있다. 민영화 당시 주가는 5만4000원. 민영화를 통해 기업 가치가 상승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락해 각각 1조3229억원, 1조3389억원에 이르는 ‘생돈’을 상환해야 할 처지에 몰리기 때문이다. 희망은 KTF와의 합병을 통한 주가 상승뿐이다. 실제로 통신 분야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꼽히는 LG투자증권 정승교 팀장은 “두 회사가 합병할 경우 KT 주가는 6만원을 상회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아 지금의 주가 상승에 불을 당기기도 했다.
KTF 처지에서도 KT와의 합병은 매력적이다. KTF의 무선시장 점유율은 10월 말 현재 32.28%. 번호이동성제 시행 등으로 많이 늘었다고 하지만 SKT와 경쟁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그런 만큼 KT의 막강한 기업 이미지와 광범위한 유통 조직, 유선망과의 시너지 효과 창출은 KTF에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합병 문제에서 KTF는 KT보다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KTF 관계자는 “이른바 3강 구도로 인해 지금껏 우리가 얻은 것이 많은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SKT 독점 방지, LGT 생존 보장이란 명분 아래 다양한 비대칭 규제와 이른바 ‘유효경쟁체제’ 구축으로 적지 않은 실리를 챙겨온 까닭이다. 그런데 KT와 합병을 하거나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대로 LGT까지 가져온다면, 그때는 반대로 자신들이 정통부와 공정거래위원회의 ‘표적’이 될 수 있다.
통신사업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변수인 정통부 규제는 두 회사 합병에 대한 SKT의 태도 정리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SKT는 현재 “우리는 하나로를 가져올 생각도, KT-KTF 합병에 찬성할 생각도 없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SKT, 정통부 움직임에 주목
물론 SKT 측으로서도 KT-KTF 합병을 통해 얻을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겹도록 반복·강화돼온 비대칭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LGT의 ‘파격적 행보’로 인해 속속 빼앗길 위기에 처한 컨버전스(융합) 사업의 주도권을 다잡을 수 있다. 그동안 LGT는 낮은 매출과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데 급급해, 뱅크온 등의 컨버전스 사업 주도권을 사실상 협력 사업체 쪽에 내주다시피 해왔다. 각종 콘텐츠 사업도 SKT가 지향하는 네트워크 의존형 서비스가 아닌 개방형을 택해 ‘작은 몫’을 가져오는 데 만족했다. SKT 측에서 보면 ‘내 먹고 살 밑천을 다 내주는’ 식의 행보를 보여온 것이다.
또 한 가지, 3강 구도를 통해 SKT가 누려온 가장 큰 이익은 요금인하 억제 효과였다. SKT가 요금을 내릴 경우 LGT에 치명적 타격이 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이제는 요금인하를 피할 도리가 없다. 시민단체는 물론 재정경제부, 청와대 등에서도 요금인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3강 구도 유지의 가장 큰 이점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SKT는 KT-KTF 합병에 선뜻 찬성할 생각이 없어 뵌다. SKT 관계자는 “우리가 하나로를 가져올 것이란 의견이 많으나 그렇지 않다. 설사 하나로가 지금 추진하는 대로 두루넷 인수에 성공하고, 그렇게 커진 하나로를 우리가 가져온다 해도 KT의 막강한 유선망과 경쟁이 가능하겠느냐”고 되물었다.
SKT는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 LG그룹의 파워콤과 데이콤의 인수자로도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SKT 측은 “그들을 다 합쳐봤자 어차피 안 된다. KT와 경쟁이 되려면 케이블TV망까지 가져와야 하는데, SK는 그룹이라 방송업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KT에 필적할 만한 유선망을 보유할 수 없는 마당에야, 굳이 KT-KTF 합병체라는 강적의 탄생에 일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정통부가 두 회사의 합병을 허가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대우증권 김성훈 연구원은 “합병 실현 여부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정부의 의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유·무선 구분, 선·후발 업체 차등 경쟁이라는 정부 정책 방향에는 아직 아무런 변화가 없다. 때문에 “KT-KTF 합병은 이 모든 정책 방향과 상치되는 만큼 통신업계의 구조조정이 한참 진행된 뒤 거의 마지막에나 고려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식시장과 통신업계에서는 “결국 2강 체제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정승교 팀장은 “KT-KTF 합병은 시급한 수술이 필요한 통신업계에 치료의 물꼬를 터주는 일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야만 각종 규제 정책 수립을 둘러싼 3사 사이의 소모적 경쟁을 끝낼 수 있으며, 정리될 회사는 정리되고 성장할 회사는 그에 걸맞은 규모와 위상을 갖추게 될 것이란 얘기다. 정승교 팀장은 “그러므로 합병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KT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했다. ‘명분’과 ‘실리’가 충분한 만큼 정통부는 물론 SKT도 설득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SKT로서도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합병 효과가 자사에 어떤 형태의, 얼마만한 이익과 불이익이 생길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유·무선 통합이 중요하다지만, 미래는 ‘무선 중심의 세상’일 가능성이 높다. 두 회사 통합이 의외로 위협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KT-KTF 합병에 대한 반대급부로 SK텔레텍의 ‘스카이’ 휴대전화 양산 허가와 같은 ‘선물’을 받아낼 수 있다면 내수기업에서 수출기업으로의 도약이라는 숙원을 풀 길도 열린다. 컨버전스 사업의 주도권 확보 또한 SKT의 미래가 달린 일이다.
KT와 KTF, 그리고 SKT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정통부는 절체절명의 대원칙처럼 강조해온 3강 구도 해체를 결단할 수 있을까. 통신산업 발전과 소비자 이익 증대를 위해 진정 현명한 길은 무엇인가. 답을 아는 것은 결국 ‘시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