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과학연구소가 개발한 자주대공포 ‘비호’는 분당 600발을 쏠 수 있는 대공포 두 문으로 구성돼 있다. 이 대공포의 재질에 문제가 있어 비호는 시험에 탈락했다.
문제의 무기는 자주(自走) 대공포인 ‘비호(飛虎)’. 비호는 저공으로 침투하는 적기를 10km쯤에서 포착해, 유효 사거리인 3km 안에 들어오면 분당 600발의 속사(速射)로 ‘화망(火網)’을 구성해 요격하는 무기다. 비호는 초속 340m인 마하 1로 날아오는 적기까지 요격할 수 있게 음속의 네 배인 초속 1340m의 속도로 탄약을 쏘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비호는 오래 전부터 ‘가다 서기’를 반복해온 대표적인 지체 무기다. 이유는 일부 인사들이 “그 정도 성능으로는 첨단화된 전투기를 요격할 수 없다. 선진국에서 최첨단 대공포를 이미 개발했으니, 이를 사오는 것이 전력 증강에 도움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비용도 적게 든다”며 반대론을 펼쳤기 때문. 이 때문에 비호는 1990년대 중반 사실상 개발을 끝냈는데도 ‘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하지 못해 오랫동안 대기 상태로 있었다.
납기 못 지킬 땐 막대한 지체상금 물어
그러다 조영길 전 국방부 장관이 합참의장을 하던 시절 “투자된 기간과 비용이 적지 않다. 부품 제작을 담당할 국내 회사의 기술도 현저히 발전했으니, 비호는 AN-2 같은 북한의 저공 침투기를 충분히 요격해낼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창설할 육군 기계화 부대에는 반드시 대공포 부대가 있어야 하므로, 비호 사업은 계속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이 도출되면서 기사회생하였다.
미 육군 사단은 항공여단·포병여단과 더불어 반드시 방공포여단을 거느리고 있다. 이를 참조한 한국 육군은 ‘휴전선 바로 뒤에 있는 모든 예비사단을 기계화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기계화사단에는 방공포대대를 창설하고, 군단에는 방공포연대를 만든다는 것. 이를 위해 육군은 2020년까지 400대 이상의 비호를 도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비호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제때 납품되지 못하면 이 계획은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
비호는 D기계에서 최종 조립된다. 2002년 4월 국방부는 D기계와 ‘2004~2007년 사이에 64대의 비호를 납품받는다’는 1차 도입 계약을 체결하고, 올해 중 16대를 납품받기로 했다.
국방품질관리소(이하 품관소)는 납품된 무기가 약속한 성능을 갖추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골키퍼’다. 올해 2월부터 4월 사이 품관소는 육군의 다락대 사격장에서 납품된 다섯 대의 비호 중에서 임의로 한 대를 지정해 최초 생산품 시험을 했다.
저공 침투한 적기가 비호의 유효 사거리(3km) 안에 들어오는 시간은 3초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비호는 한 번 방아쇠를 당기면 분당 600발의 속도로 총알이 계속 나가는 것이 아니라, 10발 혹은 20발씩 나가도록 사전 조정해놓고 사격한다. 비호에 대한 최초 생산품 시험은 한 번 방아쇠를 당기면 40발이 나가도록 사전 조정해놓고, 2초마다 한 번씩 열 번 방아쇠를 당겨 총 400발을 쏜 후, 다시 모드를 낱발 사격으로 바꿔 한 발 한 발씩 13발을 쏴 그중 8발 이상이 표적 안에 들어가면 통과 판정을 받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시험은 40발×10번=400발을 쏜 후 13발을 낱발 사격하는 ‘단판’으로 끝나지 않는다. 두 달에 걸쳐 총 사격 횟수가 3000발에 이를 때까지 이 같은 조건의 사격을 반복해 모두 통과해야 합격이다. 413발을 쏘는 사격을 일곱 번 하면 2891발이라는 숫자가 나온다(413×7= 2891). 이렇게 되면 3000발에서 109발만 부족하게 되는데, 109발은 400발을 연속 사격하는 가운데 소진될 수 있으므로, 비호는 같은 조건의 시험을 일곱 번 통과해야 최종 합격처리된다.
비호사업을 회생시킨 합참의장 시절의 조영길 전 국방부 장관.
품관소는 이미 제작한 비호 5대에 대해서는 3000발 사격에도 확공이 일어나지 않는 총열을 개발해 교체하고, 올해 안에 납품할 나머지 9대는 새 총열을 달아 납품(리콜)하라고 명령했다.
비호 총열은 T중공업에서 제작했다. T중공업은 K사가 질화(窒化)처리를 하고, C사가 제작한 특수강으로 총열을 만들었다. 질화처리는 금속에 강제로 질소를 ‘침탄’시키는 것인데, 침탄을 어느 정도로 하느냐에 따라 특수강의 강도가 달라진다. T중공업은 K사와 함께 질화처리의 정도를 높인 새로운 총열 제작에 착수하였다.
T중공업이 해결책을 모색하는 사이 시간이 자꾸 흐르자 D기계가 다급해졌다. D기계는 계약한 대로 비호를 납품하지 못하면 국방부에 ‘지체상금’이라는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물론 최초 원인 제공자인 T중공업도 지체상금을 내야 하는데, 두 회사가 부담할 지체상금은 천양지차다. 지체상금은 각각의 제품의 가격에 대해 동일한 비율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비호의 총열 가격은 2억6000만원이지만, 비호 가격은 20배 이상 비싼 48억원. 따라서 D기계는 T중공업보다 훨씬 더 많은 지체상금을 물어야 하니, T중공업을 재촉하는 한편으로 다른 대안을 모색했다.
국방부 주변에선 “합격선 낮추자”
비호 사업에 관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구나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 하나 있다. 비호에 탑재된 포(총열)는 스위스 오리콘사의 포를 ‘모방’했다는 사실이다. 무기에 관한 국제조약인 파리조약은 ‘자국 방위에 한정할 경우 다른 나라 무기를 모방 제작하는 것은 지적재산권 침해가 아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T중공업이 오리콘 포를 모방해 한국군에 납품한 것은 불법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수출을 한다면 오리콘사로부터 제소를 당해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
오리콘은 세계 최고의 대공포 제작회사다. 오리콘은 현재 ‘스카이 쉴드’라고 하는 차원이 다른 최첨단 대공포를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T중공업이 모방한 대공포는 30여년 전 이 회사가 제작했던 것이다. 오리콘은 오래 전부터 스카이 쉴드를 한국에 판매해볼 생각이 있었는데, 한국이 비호 사업을 부활시키는 바람에 꿈을 접어버린 기억이 있다.
D기계는 이러한 오리콘을 상대로 “16대분의 포를 팔 수 없느냐”고 문의했다. 한국 시장을 상실한 아픔이 있는 오리콘은 당연히 “노”라고 대답해, D기계는 T중공업만 쳐다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과연 T중공업은 빠른 시간 내 시험에 통과하는 새 총열을 개발하고, D기계는 납품 시기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T중공업과 D기계 측은 올 8월 중에 새 총열을 개발해 T중공업에서 자체 실험을 해 통과하면 이 총열을 비호에 붙여 9월 다락대 사격장에서 품관소 주관의 시험을 다시 받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예상외로 빠르게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국방부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3000발을 계속해서 쏘게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조건이다. 규격을 2500발로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비호의 합격 가능성이 낮을 것 같자 커트라인을 아예 낮추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육군의 전력화 시기를 맞추고 방위산업도 살릴 수 있다는 묘안으로 거론되는 현실, 이것이 한국 방산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20여년간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 기사회생한 비호는 마지막 순간에 또다시 비틀대는 ‘둔호(鈍虎)’로 변했다. 비호는 올 가을 치러질 ‘후기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을까. 애물단지 비호의 비극을 쉬쉬하며 감춰야 했던 방산업체와 군 관계자들은 애타는 심정으로 비호의 합격을 기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