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5일 하나로통신 임시주총에서 유상증자 안이 부결되자 LG 관계자들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LG가 ‘맞장 뜨기’를 선언한 표면적 상대는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이다. 하나로통신의 2·3대 주주인 두 회사는 8월5일 1대 주주인 LG가 임시주총에 상정한 유상증자 안을 부결함으로써 ‘통신 3강’을 향한 LG의 행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그러나 일이 수포로 돌아간 후 LG가 가장 큰 섭섭함을 토로한 쪽은 오히려 정보통신부(이하 정통부)였다.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하고서도, 내부적으로는 유상증자 안 상정을 위해 LG가 무산시킨 외자유치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LG의 입지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개적인 반발은 못 하고 있을 즈음 진대제 정통부 장관의 입에서 “국가 신인도 측면에서 하나로통신은 외자유치를 통해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발언이 터져 나왔다. 진장관은 8월20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그러나 이는 사견이며 하나로통신 문제는 주주들이 판단해야 할 사안으로 정통부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주무 장관이 삼성·SKT 편 든 셈
진장관의 발언은 통신업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주요 주주들이 자사 이익에 비추어 외자유치냐(SK텔레콤·삼성전자), ‘선 유상증자 후 외자유치냐’(LG)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중인 시점에서 결과적으로 주무 부처 장관이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의 편을 든 셈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LG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하나로통신의 주요 주주들이 유동성 문제 해결을 포함한 경영정상화 방안을 두고 협의중인 시점에, 장관이 특정 방향이 바람직하다는 식의 의견을 밝힌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고 유감을 나타냈다. “정통부가 중립을 견지하겠다고 말해온 것에 비추어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라는 ‘꼬집기’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 같은 LG의 선명하고도 즉각적인 유감 표명은 이례적인 것이다. LG가 구상중인 ‘후발 사업자간 구조조정을 통한 통신 3강 체제(한국통신-SK텔레콤-LG) 구축’은 정부의 정책적 지원 없이는 그 실현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 만큼 정통부의 ‘눈치’를 보아온 것이 사실. 한편으로는 청와대에 두 차례나 ‘통신 구조조정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보고서를 올릴 정도로 ‘관(官)’의 향배 파악과 지원 얻기에 노심초사해 왔다. 그런 LG가 정통부 장관의 발언에 공개적으로 반발하며 ‘유상증자→후발 사업자 구조조정→외자유치 계획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궁지에 몰린 LG에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오른쪽)의 ‘외자유치 바람직’ 발언은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 됐다. 8월5일 열린 임시주총에서 LG의 유상증자 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는 SK텔레콤 관계자.
일각에서는 “8월19일 이사회에서 CB 발행에 합의해놓고 LG가 돌연 태도를 바꾼 이유가 뭐냐, 하나로통신이 부도라도 나기를 바라느냐”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과 달리 19일 회의에서도 LG의 태도는 모호했다. 이로 인해 회의는 CB 발행의 구체적 내용을 전혀 결정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LG가 이렇듯 ‘경영권 인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거액을 쏟아 부어야 하나’를 고민하던 시점에 돌연 진장관의 발언이 터져 나온 것이다. LG가 장관 발언에 유감을 표하는 중 굳이 ‘하나로통신의 주요 주주들이 ‘유동성 문제 해결을 포함한’ 경영정상화 방안을 두고 협의중인 시점’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설명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LG가 정통부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한번 실패한 유상증자 안을 고집스레 밀고 나가는 속뜻은 무엇일까. 일단은, 사실상 그 외에는 통신사업을 끌고 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돈 먹는 하마’ 데이콤과 6000억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인수한 파워콤, ‘만년 꼴찌’인 LG텔레콤. 이들을 살리기 위해선 외자유치 및 유·무선 번들링을 통한 시너지 창출이 가능한 하나로통신을 꼭 손에 넣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꼭 정통부와 ‘맞장’을 뜰 필요까지는 없었을는지 모른다.
실제로 LG는 그간의 ‘하나로통신 인수 작전’에 허점이 많았음을 인정하고, 새 방안 모색을 위해 태스크포스인 ‘통신사업기획단’을 구성하는 등 내부 정비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왔다.
LG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과거 구조조정본부 소속 인력이 인수전을 주도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 통신시장의 생리와 사업적 특성을 꿰뚫어보는 데 실패한 것이다. ‘국익’이니 ‘정도(正道)’니 하는 명분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문제는 하나로통신-데이콤 합병을 유상증자 및 외자유치의 전제조건으로 삼은 것이다. 사업적 시너지 효과를 위해 꼭 두 회사를 하나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로 인해 우리 편이 될 수도 있었을 하나로통신 직원들이 등 돌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고 진단했다.
재계 2위 자존심 회복 가능?
이어 그는 “하지만 희망은 있다. 유상증자 안에 대한 소액주주들의 지지도가 의외로 높았던 점이 특히 고무적이다. 여기에 더해 하나로-데이콤 합병 안을 재검토하는 등 ‘하나로통신을 위한 비전’ 창출에 힘쓴다면 정부, 주주, 직원을 두루 만족시키는 새 안을 내올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런데 이렇게 LG 내부에서 원인을 찾는 분위기가 팽배할 즈음 진장관의 ‘외자유치 바람직’ 발언이 나온 것이다. 진장관은 또 같은 인터뷰에서 “(통신사업자를) 꼭 3개 만들기 위해 마지막 세 번째를 정부가 도와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3강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정책목표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LG에게 이러한 일련의 발언은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 된 듯하다. ‘벙어리 냉가슴’이던 속을 드러내놓고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하나, 정통부는 진장관 발언이 몰고 온 파장으로 인해 하나로통신 문제에 있어 앞으로 더욱더 철저히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게 됐다. 어떤 식으로든 의중을 내비쳤다간 ‘편들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된 까닭이다. 따라서 진장관의 분명한 의사 표현은 LG에게 재난이자 기회다. ‘통신사업기획단’을 중심으로 주주·외자·하나로통신 등을 설득할 ‘획기적 안’을 마련하는 한편, 외부적으로는 통신사업 구조조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논쟁과 화제를 이끌어내 ‘3강론’의 불씨를 되살리는 ‘대도박’에 나설 수 있음이다. 한편 정통부의 ‘입’이 묶인 상태에서 LG의 고집스런 태도는 주주 및 하나로통신 내부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가능성도 커졌다.
그럼에도 상황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어쨌거나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은 하나로통신 유동성 위기 극복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주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는 명분을 챙기게 될 듯 하다. 공은 다시 LG에게로 넘어왔다. 주사위를 한 번 던질 때마다 예기치 않은 위험과 맞닥뜨려야 하는 ‘주만지 게임’처럼 ‘통신 3강’을 향한 LG의 행로는 곳곳이 지뢰밭이다. 총성 없는 자본의 전쟁터에서 ‘단기필마’ LG는 재계 순위 2위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