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강남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한 고급 생수의 안내문은 웬만한 약 설명서보다 더 자세하게 음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한 병에 1만원을 호가하는 가격도 약값 못지않다. 바야흐로 ‘물이 보약’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물’이 눈부시게 변신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먹는 샘물 시장을 이끌어온 것은 제주 삼다수와 진로 석수, 동원 샘물 등 국내 업체들. 이들은 저마다 청정지역에서 길어 올린 깨끗한 물임을 내세우며 경쟁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깨끗하고 맛있는 물’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 ‘건강에 좋은 물’을 찾는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발맞춰 해양 심층수, 빙하수, 탄산수와 기능성 물질 첨가수 등 고급 물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해양 심층수는 말 그대로 깊은 바다 속에서 퍼 올린 물. 햇빛이 닿지 않는 수심 200m 이하의 물로 외부와의 접촉이 없어 깨끗할 뿐 아니라 칼슘, 마그네슘 등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은 일본산 해양 심층수인 ‘마린 파워’로 2ℓ들이 한 병에 1만5000원 선이다. 일반 먹는 샘물 가격의 15배가 넘을 뿐 아니라 휘발유 값보다도 훨씬 비싸지만 이 물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 스타슈퍼 등 부유층 밀집지역에서 판매율 1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2ℓ한 병에 1만5000원 … 음용법까지 설명
이에 따라 하와이의 해양 심층수를 국내에 들여와 가공 판매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딥 오션 등 후발 업체들이 속속 이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마린 파워’를 판매하고 있는 ㈜케이제이브릿지의 김기태 부장은 “7월15일부터 국내에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물량을 댈 수 없을 만큼 주문이 폭주하고 있다. 판매량이 수입 당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며 “물의 효능을 생각할 때 현재의 가격 정도가 적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비자들도 이에 동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청정지역 빙하를 이용해 만들어낸 빙하수도 인기다. 세계 3대 장수마을 가운데 하나인 에콰도르 빌카밤바 마을 사람들이 먹는 물로 만들었다는 ‘빌카구아’는 2ℓ 한 병에 3600원, 캐나다산 빙하수 ‘아이스 에이지’는 8000원 선이다.
물에 탄산을 넣은 유럽식 탄산수도 다이어트와 변비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판매량이 늘고 있다. 가격대는 영국산 탄산수 ‘타이난트’ 750㎖가 5990원, 국내산 탄산수인 ‘청천 탄산수’는 500㎖에 1000원이다. 프랑스의 에비앙과 볼빅, 러시아의 바이칼수, 네팔의 나라 히말라야 등 각국의 유명 먹는 샘물도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상태.
캐나다산 빙하수 ‘아이스 에이지’. 운동 중에 여닫기 편한 스포츠 캡 형태의 병마개를 달아 효용성을 높였다.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산 해양 심층수 ‘마린 파워’.세계 3대 장수마을 가운데 하나인 에콰도르 빌카밤바 인근의 빙하수로 만든 ‘빌카구아’(왼쪽부터).
“가격 자율 책정, 특별한 효능 없는 똑같은 물”
이 같은 판매방식에 대해 ‘아이스 에이지’의 이성화씨는 “아이스 에이지는 캐나다의 청정 빙하를 깨서 덩어리째 정수한 것으로 캐나다 정부의 환경정책상 한정 수량만 생산된다”며 “특별한 물이기 때문에 소비가 가능한 이들을 중심으로 판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스 에이지’의 광고문구는 ‘특별한 물을 드시고 특별한 사람이 되십시오’다.
이 같은 판매방식 때문에 현재까지 ‘고급 물’이 국내 먹는 샘물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0.5%에도 미치지 못한다. 외국산 먹는 샘물 수입 업체 22곳 가운데 지난해 5000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곳은 ‘에비앙’을 포함해 세 곳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고급 물에 주목하는 것은 최근 부촌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판매 신장률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 속의 강남’이라고 불리는 타워팰리스 안 스타슈퍼에서는 올여름부터 외국산 먹는 샘물의 매출이 국내산을 추월, 현재는 6대 4 정도의 판매비율을 기록하고 있다. ‘마린 파워’ 등 초고가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판매량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자 환경부에 외국산 고급 샘물에 대한 수입 허가를 신청하는 이들도 증가하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지방을 분해해주는 ‘다이어트 생수’를 비롯해 ‘요오드 생수’, ‘불소 생수’ 등 다양한 기능성 샘물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점도 앞으로 이들이 수입될 경우 우리나라의 물 시장 전체를 뒤바꿀 만큼의 파괴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비싼 물이 과연 제값을 하는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고가 먹는 샘물을 수입한 업체들은 ‘흰머리가 다시 검어진다’거나 ‘암과 당뇨 및 고혈압 치료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광고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공식적인 과학적 검증은 이뤄진 바 없다. 이 제품들은 어디까지나 ‘물’일 뿐 ‘약’이 아니다.
환경부 먹는 샘물 담당 강원우씨는 “먹는 샘물로 허가받은 제품은 다 똑같은 물일 뿐이며, 비싼 물이라고 해서 효능을 인정받았거나 국내산보다 미네랄 성분이 특별히 많은 것은 아니다”라며 “가격이 자율적으로 책정되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비쌀수록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면이 있는데 외국산과 우리 물의 차이점은 정수 과정에서 미네랄을 얼마나 남겨두는가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외국산 물 중 상당수는 국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해 ‘혼합성 음료’로 수입됐다는 점도 문제다. 강씨는 “외국산 물 가운데 상당수는 물에 화학적 처리를 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나라의 ‘먹는 물 관리법’에 위반돼 ‘먹는 샘물’로 허가받지 못하고 ‘혼합성 음료’로 허가를 받아 들여온 것”이라며 “이 가운데 한 제품은 초고급 제품으로 판매하고 있지만 원수가 우리나라의 식수 기준에조차 부합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현재 식품의약품안전청 등 관계기관과 함께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건강과 장수에 대한 관심이 높은 현대인들이 몸에 좋은 물을 마시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좋은 물을 고르는 첫째 기준은 ‘물은 어디까지나 물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한국샘물협회 정진화 대표는 “좋은 물은 분명히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그 자체로 약이 될 수는 없다”며 “가격과 성분, 허가 사항 등을 잘 알아보고 현명하게 물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