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방망이’에 불과한 감찰의 칼을 서슬 퍼렇게 가다듬고, ‘신세지지 않는’ 검찰 문화를 만드는 것이 검찰을 바로 세우는 길이다.
뜻은 좋았는지 몰라도 방법과 과정에 무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김 전 검사 사건은 서울지검 강력부의 홍경령 전 검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홍 전 검사 사건은 2002년 10월25일 살인사건 용의자인 조천환씨를 연행해 조사하다 구타 등 가혹 행위로 연행 다음날 숨지게 한 사건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결과 조씨가 구타를 당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자 홍 전 검사는 물론이고 노상균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의 사표가 수리됐다.
이어 김정길 법무부 장관과 이명재 검찰총장이 책임을 지고 동반 사퇴하고 김진환 서울지검장과 정현태 서울지검 3차장은 지휘 책임을 물어 각각 대구고검 차장과 광주고검 검사로 전보 조치됐다. 홍 전 검사는 조씨를 구타한 수사관 등과 함께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독직폭행치사 혐의로 구속 기소됐는데, 현재 금(金)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김 전 검사는 이원호씨에게 살인교사 혐의가 있으며, 그가 청주지검 및 청주 경찰과 유착돼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전자를 입증할 증거를 잡는 데는 실패했고 후자는 양 전 실장이 청주에 내려와 이씨 등으로부터 향응을 제공받는 장면을 몰래 촬영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는 입증해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 그는 이 비디오테이프를 수사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언론 플레이’를 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지역 세력과 검찰 유착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오버’
1500여명의 검사 세계에서 능력 있는 수사 검사로 인정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이 좋아야 하고 언론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아야 ‘베스트 검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수사 외적인 것에 너무 기대게 되면 자신이 만든 함정에 스스로 빠지게 된다. 홍 전 검사는 용의자 사망이라는 절체절명의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는 수사를 하다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김 전 검사는 수사 외적 업무인 언론 플레이를 하다 꼬리가 잡혔다.
이런 점에서 검찰 수사는 후퇴했다. 증거를 포착하는 과학수사보다는 언론이라고 하는 외부 세력을 이용하려는 검사의 태도는 ‘의욕 과잉, 실력 부족’이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홍 전 검사 사건으로 장관과 검찰총장이 동반 퇴진하는 홍역을 치르고도 검찰의 수사력은 ‘진일보’하지 못했다.
김 전 검사 사건 이후 검찰은 김 전 검사와 갈등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K부장검사를 ㅇ지검으로 발령했다. 이것으로 검찰에 대한 조치는 마무리 짓고 이후부터는 ‘버리는 카드’인 김 전 검사의 무리수를 따지겠다는 게 검찰의 자세인 듯하다. 이러한 인사 조치는 검찰이 김 전 검사 사건을 홍 전 검사 사건보다 ‘훨씬 경(輕)하게’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검찰 내부적으로 보았을 때 김 전 검사 사건은 홍 전 검사 사건보다 가볍게 치부돼야 하는 것일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검찰 바로 세우기’를 강조했지만 DJ 정권은 특검을 가장 많이 허용한 정권이 되었다.
사실 지역 검찰과 지역 세력 간의 유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역 세력은 사업가일 수도 있고 변호사일 수도 있다. 때로는 변호사를 매개로 검찰과 사업가가 연결되기도 한다. 1998년에 일어난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과 1999년에 터져 나온 대전 법조비리 사건은 지역 변호사와 검사·판사가 연결돼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경우였다. 그때도 검찰은 지역 세력과 지역 검찰 간의 유착 척결을 선언했지만 ‘말로만’이었다.
왜 지역 검찰과 지역 세력은 유착될 수밖에 없는가. 모 지청장을 지내고 개업한 한 변호사는 지청장 시절 자신의 고민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여전히 필요한 ‘검찰 바로 세우기’
“아무리 작은 지청이라도 전체 직원은 30~40명에 이르는데,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지청장은 적절한 시기에 이들에게 회식을 베풀어야 한다. 지청장의 판공비가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먹여주겠는가. 휴가철 검사장 등 상급자가 우리 관할 지역으로 놀러 온다고 하면 숙소를 마련해드려야 한다. 그러나 지청장은 체면 때문이라도 콘도 회사에 전화를 걸어 ‘방 하나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다. 이러한 고민을 풀어줄 사람은 결국 지역 유지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전임 지청장은 후임 지청장에게 신세를 져도 좋은 깨끗한 스폰서를 인계해주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스폰서일지라도 십수년 간 검찰과 가깝게 지내면 그의 주변에는 ‘파리’가 꼬이게 마련이다. 이른바 ‘쓰리 쿠션’식으로 검찰에 청탁이 들어오는데 이렇게 되면 지청장은 그와의 인연을 끊어내야 한다. 그러나 지청의 모든 직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와의 인연을 끊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토착세력과 검찰의 유착은 여기서 시작되는데 ‘신세지지 않는’ 검찰을 만들지 않는 한 이를 혁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원호씨가 도축업 등을 하며 오랫동안 청주에서 기반을 굳혀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80년대 중반 청주지검에 근무했던 한 법조인은 “이씨의 작고한 친형이 청주지검 검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검사들은 보통 1~2년 근무한 후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데, 이씨 형제는 새로 오는 검사들과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전했다. 김 전 검사 또한 몰카 촬영을 통해 청주지역 유지가 ‘중앙(양 전 실장)’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유성수 대검 감찰부장의 얘기에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유부장은 “청주지검과 이씨가 유착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80년대 청주에 있었던 한 법조인은 “유착이라는 게 꼭 돈이 오가야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청주에 근무할 때 토착인사와 가깝게 지내던 모 검사는 토착인사가 찍어준 땅을 매입해 큰돈을 벌었다”라고 말했다.
김대중(DJ) 정부 시절 대검찰청을 비롯한 전국의 검찰청에는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DJ의 휘호가 내걸렸다. 그러나 검찰이 바로 서지 못해 특별검사가 검찰의 임무를 대행한 적이 가장 많았던 때가 DJ정권 시절이다.
검찰 바로 세우기. 김 전 검사는 비록 어설픈 언론 플레이로 자신의 눈을 찌른 실수를 범했지만, 자신의 구속을 통해 검찰 바로 세우기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점을 역으로 보여주었다. 청주의 한 소식통은 “김 전 검사가 당당한 모습으로 구속된 것은 자신이 ‘검찰 바로 세우기’에 일조했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대검이 이를 피해가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크게 실망했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김 전 검사 사건이 터진 후 강금실 법무부 장관은 “대검이 갖고 있는 감찰 기능을 법무부로 가져가겠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이에 대해 한 부장검사는 “강장관이 대검의 감찰을 믿지 못하겠다는 차원에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지금 검찰 형편으로 봐서는 강장관의 판단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대검의 감찰이 ‘솜방망이 감찰’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검찰 인사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공정한 감찰이 되어야 한다.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이나 경찰의 감찰을 보라. 내부 감찰인데도 국정원과 경찰 직원들은 감찰을 무서워한다. 검찰 바로 세우기는 ‘서슬 퍼런 감찰’을 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증거 포착에 매진하는 수사능력 함양과 ‘감찰 바로 세우기’가 김 전 검사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검찰의 당면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