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의 대모’ 뭐 그런 수식어는 부담스럽고요, 새로운 걸 개척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 성격 덕분에 꾸준히 만화를 그리게 된 거 아닐까 싶네요.”
한국 고대사 배경 새 작품 구상중
한창 바쁠 때는 매달 아홉 번 마감을 했단다. 그럴 때면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웠겠지만, 마침 황미나는 성교육 만화 ‘루나레나의 비밀편지’ 편집 작업을 마치고 잠시 휴식기를 보내고 있다. 그래서 작업실 겸 자택인 경기 성남시 분당 아파트에서의 만남도 가능했다. 아파트 거실에는 컴퓨터 책상이 네 개, 그리고 안방에는 펜 작업을 하는 책상 세 개가 놓여 있다. 그 사이를 세 마리의 애견이 부지런히 누비고 다닌다.
-황미나씨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순정만화가에서 소년만화가, 가족만화가로 끊임없이 변신해온 만화가라는 점입니다. 순정만화가로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90년에 느닷없이 ‘수퍼트리오’라는 소년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루나레나의 비밀편지’의 주인공인 루나레나.
-일본 만화잡지인 ‘모닝’에 ‘윤희’ ‘이씨네 집 이야기’ 같은 작품을 연재하기도 했죠?
“일본 만화잡지는 한국과 다른 점이 있어요. 만화 스토리(콘티)를 우선 편집자에게 보여서 허락을 받아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이죠. 좋게 말하면 편집자가 작가와 ‘의논’을 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작가한테 ‘명령’을 하는 건데, 한참 하다 보면 새로운 걸 창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릴 것 같았어요. 차라리 한국의 연재 시스템이 더 낫지 않나 싶습니다.”
- ‘웍더글 덕더글’ 같은 대가족을 주제로 한 만화의 배경이 황미나씨 본인의 가족사라는 말도 있는데요?
“실제로 저희 형제가 6남매예요. 성장할 때는 형제들끼리 부대끼면서, 정말 만화 속에 그린 것처럼 재미있게 살았죠. 지금은 다 커서 분가했는데 그 형제들이 다 같이 모여 살면 어떨까 상상하다 가족만화를 그리게 된 겁니다. ‘이씨네 집 이야기’ 같은 경우에는 실제 우리 가족을 모델로 한 캐릭터가 많이 등장하죠.”
펜작업 중인 황미나씨(위). 문하생과 매킨토시 컴퓨터로 ‘레드문’을 수정하고 있다. 그의 만화 중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레드문’은 올겨울 12권 분량으로 재출간된다.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는 너무도 안타까운 작품이죠. 80년대에 어렵게 사는 남매의 성장 이야기를 그리려 했는데 첫 권부터 심의에 걸렸어요. 판잣집을 그리지 마라, 가난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지 마라, 부모가 이혼한 가정 이야기를 그리지 마라…. 심지어 ‘걸음걸이가 허무하다’는 이유로 심의에 걸리기도 했어요. 나중에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는지도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레드문’도 너무 성급히 결말을 내려버린 감이 있긴 한데, 지금 조금씩 수정하며 개정판을 준비중이에요. 겨울쯤 12권 분량으로 개정판이 나올 겁니다.”
보통 만화가들은 낮에 잠을 자고 밤에 일한다. 황씨도 마찬가지. 낮에는 산만해서 도통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그러니 만화가들은 만화를 위해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대부분 포기하는 셈이다.
“만약 회사에 취직해서 일하는 거라면 이렇게 못하죠.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재미는 당사자 외에는 누구도 모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더 재미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어요. 이 재미에 빠지면 친구 만나고 영화 보고 쇼핑하고… 그런 게 다 시시해지는 거죠.”
-독자들은 변신의 귀재인 황미나씨가 이번에는 어떤 만화를 그릴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동양 고전물을 그리고 싶어요. 한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의 스토리를 구상중입니다. 또 한 작품이 있는데, 출판사에서 이 작품에 대해선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네요.”
사실 그가 최근 연재를 쉬고 있다는 사실은 좀 뜻밖이다. 이에 대해 묻자 황씨는 “나뿐만 아니라 이름 있는 작가들 중에서 요즘 잡지에 연재하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신일숙 김혜린 김진 등 순정만화의 대가급들은 한결같이 활동이 부진한 상황. “만화 관련 잡지나 출판사가 생존하는 데는 일본만화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어요. 책은 안 팔리고 단행본은 대여점이 소화하고, 이런 상황에서 원고료 비싼 작가들의 작품을 내겠어요? 우리의 소원은 서점에서 만화를 팔고, 정당하게 인세를 받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봐요.”
최근 황미나는 약간 뜻밖의 작품을 하나 완결지었다. 산부인과 의사인 안명옥 박사(포천중문의대 교수)와 함께 ‘루나레나의 비밀편지’(동아일보사 펴냄)라는 성교육용 만화를 낸 것. 남녀의 차이부터 생리통, 임신까지 소녀들의 성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일종의 ‘학습만화’다.
“처음엔 거절했죠. 학습만화가 유행인 게 사실이지만 학습만화와 정통 만화는 엄연히 다르거든요. 그런데 안선생님의 열정이 너무 대단한 거예요. ‘달’이라는 뜻을 가진 루나레나(‘레드문’ 여주인공)를 주인공으로 삼자는 것도 안선생님 아이디어였어요. 또 나야 한번 학습만화 그렸다가 다시 정통 만화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소녀들이 사춘기 때 자기 몸을 망가뜨리면 되돌릴 수 없잖아요.”
그는 “그런데 한 권을 완성하고 나니 안선생님이 성인 여성을 위한 성교육 만화, 남성을 위한 만화 등을 아예 시리즈로 내자고 하신다”면서 “이거 참 큰일났다”고 깔깔 웃었다.
보통 만화가들은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다. 황미나도 그리 언론에 잘 모습을 드러내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막상 만나본 황미나에게서 ‘창작하는 사람의 괴팍함’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는 어떤 주제든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달변가였다. 어떤 모임에 나가든 대번에 좌중을 휘어잡을 것 같다. 그런데 왜 만화가들은 좀처럼 인터뷰를 하지 않는 걸까?
“마감에 쫓기는 와중에서 인터뷰를 하면 하루를 허비하니까 시간이 아까워서죠. 그러나 그보다는 상처가 많아서일 거예요. 괜히 한마디 했다가 만화를 비평하는 기사에 자기 코멘트가 나오는 일, 만화가라면 다들 한 번씩은 당한 일이거든요.”
그는 ‘루나레나의 비밀편지’가 일반 서점에서 팔리게 되고, 또 책의 판매를 돕기 위해 인터뷰도 할 수 있다는 점이 참 기쁘다고 했다. “만화도 다른 책들처럼 판매를 위한 마케팅을 하고, 베스트셀러 집계에도 들고 했으면 좋겠어요. 만화는 많이 팔려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안 넣어주거든요.” ‘만화 여왕’의 꿈은 생각보다 소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