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지상주의에서 신경향파의 기수로 변신했다 친일로 민족반역자가 된 박영희, 낭만주의 시인으로 등단했으나 역사소설가로 이름을 남긴 월탄 박종화, 현실도피주의에서 저항시인으로 민족적 자존심을 지켜준 이상화, 불행한 현실에 희망을 심어주고 요절한 심훈, 극빈소설로 초기 신경향파 대표주자가 된 최서해, 민족적 서사시로 혜성처럼 데뷔했지만 끝내 현실과 타협하고 친일로 시적 파탄에 이른 김동환.
살아 있다면 올해 100세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6명의 문인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것은 분명 무리한 시도다. 1920~30년대에 활약한 6명은 모두 1901년생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그들의 문학적 행보는 각자의 이름만큼이나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특히 친일행각을 비난 받으며 납북된 박영희·김동환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를 한자리에서 논의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시도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현기영)와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이 공동으로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문학제’(9월20~21일)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느낀 부분도 6명을 한자리에 모으기 위한 ‘명분’ 찾기였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인 강형철 교수(숭의여대 정보방송학)는 “그동안 민족주의적 관점의 차이나 문학사를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 때문에 6명을 한자리에 모을 수 없던 게 사실이나 이제 이들을 한마당에 불러내 생애와 문학적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동갑내기란 점 외에 공통분모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대부분 1922년 박종화·박영희를 주축으로 창간한 순문예지 ‘백조’(낭만적 유미주의를 표방) 동인이며 나중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회주의적 색채의 신경향파 문학으로 선회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이 신경향파에 머문 시기는 잠시였고 이후 각자의 역사관과 입장 등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이번 문학제의 주제가 ‘근대문학 갈림길에 선 작가들’이 된 것은 동갑내기로서 문학적 출발점은 같았으나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던 6명을 통해 한국 근대문학의 갈래를 조명해 보자는 의도가 실려 있다. 서울대 김윤식 명예교수(국문학)는 6명의 문인이 ‘서구발 근대’가 한창 진행된 시기에 자라 열 살 무렵 일본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는 현실과 맞닥뜨렸다고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다. 그 후 알게 모르게 그들의 의식 깊숙이 자리잡은 것은 반제투쟁과 반봉건투쟁이었다.
그러나 6명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은 차후 문학적 행보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박영희·박종화는 모두 서울 출신의 중인계층이었다. 모물전(털로 만든 의류가게)집 아들이던 박영희는 배재고보(팔봉 김기진과 동기생으로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고 한다)에 입학한 뒤 보들레르·와일드 등 서구 탐미주의에 심취해 예술지상주의를 채택한 ‘백조’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박종화의 경우 조부가 전주 백지와 장지를 수입해 서울·이북에 조달하는 일종의 무역업으로 재산을 모았으며 어릴 때 한학을 익힌 뒤 보통학교를 거치지 않고 바로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초기 그의 시풍은 ‘사의예찬’ 등에서 나타났듯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 찬 어둡고 음울한 색채였다.
김윤식 교수는 출신환경으로 보아 박영희·박종화와 대조적 위치에 있는 인물로 이상화와 심훈을 꼽았다. 대구 출신의 이상화는 대지주이자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고, 충남 당진을 기반으로 한 심훈(출생은 경기도 시흥) 집안 역시 상당한 지주였다. 나중에 심훈은 왕족이며 후작인 이해승의 누이와 혼인했다(이것은 국혼에 해당한다).
또 앞서 4명과 도저히 같은 범주에 넣기 어려운 경우가 김동환과 최서해다. 김동환은 함경도 경성 출신으로 아버지 없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당대의 평론가 백철은 김동환을 가리켜 “백로(당시 귀족적 댄디즘에 빠진 시단을 가리킴)의 무리 속에 돌연히 등장한 까마귀다”고 했다. 함북 성진 출신의 최서해(본명 최학송)는 김동환보다 더욱 어려운 형편이었다. 너무 가난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최서해는 독학으로 문학을 했다. 노동판을 떠돌다 기자로서 생활의 안정을 얻었을 때는 이미 건강이 너무 나빠져 아편에 의지했고 결국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평론가 장석주씨는 “최서해의 삶 자체가 소설이다”고 했다. 이처럼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란 6명의 문인은 문학이라는 한 물에서 만났지만 결국 자신이 속한 계층적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었다. 한뿌리에서 문학을 시작하고도 전혀 다른 세계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문학평론가 박상준씨는 심훈·박종화·최서해의 대표작을 비교하면서 심훈의 경우 ‘상록수’에 나타나듯 불행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부정적 현실에 긍정적 인물이라는 분열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박종화의 역사소설들 역시 사회경제사나 민중사가 누락되고 정치사조차 몇몇 개인적 에피소드에 머물렀다고 비판하면서, 초라하고 한심한 역사를 기술하면서 영웅이나 의로운 선비들의 우국 정념을 기리는 작가의 모순을 지적했다. 한편 가난·기아·살인·복수 등을 소재로 한 최서해의 소설(대표작 ‘탈출기’ ‘홍염’)들은 현실논리를 무시하면서까지 특정 덕목(자본주의의 경제논리, 금권만능을 거부하고 도리와 정의를 따르라)만을 강조해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진다.
박상준씨는 심훈·박종화·최서해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불완전성이나 모순의 원인을 ‘작가들의 조바심’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일제치하의 암울한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거짓의 가치에라도 매달린 작가들의 시대적 딜레마를 읽을 수 있다.
시인 박영희·이상화·김동환이야말로 가장 극적으로 갈라선 인물들이다. 박영희와 이상화는 함께 ‘백조’ 동인으로 활약했으나 나중에 박영희는 신경향파에서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지도적 이론가로 성장했고, 이상화는 일본경찰의 감시와 원고 압수 등 문학을 통한 저항이 한계에 부딪치자 술에 빠졌으며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한 채 42세로 세상을 뜬다. 김동환은 신경향파에 가담하면서 이들과 인연을 맺고 “민족해방운동이 있는 곳에서 무산계급대중의 문학은 애국문학일 수밖에 없음을” 역설하는 투쟁적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카프의 지도적 이론가 박영희와 애국문학의 주창자 김동환은 종내 현실과 타협하고 친일의 길을 걷는다.
고려대 최동호 교수(국문학)는 세기의 선두주자로 나선 20대 초반의 젊은 시인들이 절망과 좌절 속에 더욱 탐미적 세계를 추구했고(백조파 시대), 한일합방과 독립운동을 겪으면서 역사적 파멸에 대한 대응논리로 카프를 결성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카프에서 전위적 평론을 펼친 박영희가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 자신이다”고 했듯 사회주의적 현실 참여도 1901년생 젊은 문인들에게 답이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100년 전 근대문학의 갈림길에 선 6명의 행보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최동호 교수는 이렇게 말을 맺는다. “흐트러진 만화경의 조각을 붙잡고 사이버 세상의 화려한 불꽃놀이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화려한 시적 수사의 껍질을 던져 버리고 시대사적 보편성을 이룩할 것인가.” 이것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시인(문인)에게 던져진 선택의 과제기도 하다.
살아 있다면 올해 100세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6명의 문인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것은 분명 무리한 시도다. 1920~30년대에 활약한 6명은 모두 1901년생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그들의 문학적 행보는 각자의 이름만큼이나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특히 친일행각을 비난 받으며 납북된 박영희·김동환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를 한자리에서 논의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시도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현기영)와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이 공동으로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문학제’(9월20~21일)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느낀 부분도 6명을 한자리에 모으기 위한 ‘명분’ 찾기였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인 강형철 교수(숭의여대 정보방송학)는 “그동안 민족주의적 관점의 차이나 문학사를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 때문에 6명을 한자리에 모을 수 없던 게 사실이나 이제 이들을 한마당에 불러내 생애와 문학적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동갑내기란 점 외에 공통분모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대부분 1922년 박종화·박영희를 주축으로 창간한 순문예지 ‘백조’(낭만적 유미주의를 표방) 동인이며 나중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회주의적 색채의 신경향파 문학으로 선회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이 신경향파에 머문 시기는 잠시였고 이후 각자의 역사관과 입장 등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이번 문학제의 주제가 ‘근대문학 갈림길에 선 작가들’이 된 것은 동갑내기로서 문학적 출발점은 같았으나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던 6명을 통해 한국 근대문학의 갈래를 조명해 보자는 의도가 실려 있다. 서울대 김윤식 명예교수(국문학)는 6명의 문인이 ‘서구발 근대’가 한창 진행된 시기에 자라 열 살 무렵 일본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는 현실과 맞닥뜨렸다고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다. 그 후 알게 모르게 그들의 의식 깊숙이 자리잡은 것은 반제투쟁과 반봉건투쟁이었다.
그러나 6명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은 차후 문학적 행보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박영희·박종화는 모두 서울 출신의 중인계층이었다. 모물전(털로 만든 의류가게)집 아들이던 박영희는 배재고보(팔봉 김기진과 동기생으로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고 한다)에 입학한 뒤 보들레르·와일드 등 서구 탐미주의에 심취해 예술지상주의를 채택한 ‘백조’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박종화의 경우 조부가 전주 백지와 장지를 수입해 서울·이북에 조달하는 일종의 무역업으로 재산을 모았으며 어릴 때 한학을 익힌 뒤 보통학교를 거치지 않고 바로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초기 그의 시풍은 ‘사의예찬’ 등에서 나타났듯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 찬 어둡고 음울한 색채였다.
김윤식 교수는 출신환경으로 보아 박영희·박종화와 대조적 위치에 있는 인물로 이상화와 심훈을 꼽았다. 대구 출신의 이상화는 대지주이자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고, 충남 당진을 기반으로 한 심훈(출생은 경기도 시흥) 집안 역시 상당한 지주였다. 나중에 심훈은 왕족이며 후작인 이해승의 누이와 혼인했다(이것은 국혼에 해당한다).
또 앞서 4명과 도저히 같은 범주에 넣기 어려운 경우가 김동환과 최서해다. 김동환은 함경도 경성 출신으로 아버지 없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당대의 평론가 백철은 김동환을 가리켜 “백로(당시 귀족적 댄디즘에 빠진 시단을 가리킴)의 무리 속에 돌연히 등장한 까마귀다”고 했다. 함북 성진 출신의 최서해(본명 최학송)는 김동환보다 더욱 어려운 형편이었다. 너무 가난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최서해는 독학으로 문학을 했다. 노동판을 떠돌다 기자로서 생활의 안정을 얻었을 때는 이미 건강이 너무 나빠져 아편에 의지했고 결국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평론가 장석주씨는 “최서해의 삶 자체가 소설이다”고 했다. 이처럼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란 6명의 문인은 문학이라는 한 물에서 만났지만 결국 자신이 속한 계층적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었다. 한뿌리에서 문학을 시작하고도 전혀 다른 세계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문학평론가 박상준씨는 심훈·박종화·최서해의 대표작을 비교하면서 심훈의 경우 ‘상록수’에 나타나듯 불행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부정적 현실에 긍정적 인물이라는 분열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박종화의 역사소설들 역시 사회경제사나 민중사가 누락되고 정치사조차 몇몇 개인적 에피소드에 머물렀다고 비판하면서, 초라하고 한심한 역사를 기술하면서 영웅이나 의로운 선비들의 우국 정념을 기리는 작가의 모순을 지적했다. 한편 가난·기아·살인·복수 등을 소재로 한 최서해의 소설(대표작 ‘탈출기’ ‘홍염’)들은 현실논리를 무시하면서까지 특정 덕목(자본주의의 경제논리, 금권만능을 거부하고 도리와 정의를 따르라)만을 강조해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진다.
박상준씨는 심훈·박종화·최서해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불완전성이나 모순의 원인을 ‘작가들의 조바심’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일제치하의 암울한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거짓의 가치에라도 매달린 작가들의 시대적 딜레마를 읽을 수 있다.
시인 박영희·이상화·김동환이야말로 가장 극적으로 갈라선 인물들이다. 박영희와 이상화는 함께 ‘백조’ 동인으로 활약했으나 나중에 박영희는 신경향파에서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지도적 이론가로 성장했고, 이상화는 일본경찰의 감시와 원고 압수 등 문학을 통한 저항이 한계에 부딪치자 술에 빠졌으며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한 채 42세로 세상을 뜬다. 김동환은 신경향파에 가담하면서 이들과 인연을 맺고 “민족해방운동이 있는 곳에서 무산계급대중의 문학은 애국문학일 수밖에 없음을” 역설하는 투쟁적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카프의 지도적 이론가 박영희와 애국문학의 주창자 김동환은 종내 현실과 타협하고 친일의 길을 걷는다.
고려대 최동호 교수(국문학)는 세기의 선두주자로 나선 20대 초반의 젊은 시인들이 절망과 좌절 속에 더욱 탐미적 세계를 추구했고(백조파 시대), 한일합방과 독립운동을 겪으면서 역사적 파멸에 대한 대응논리로 카프를 결성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카프에서 전위적 평론을 펼친 박영희가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 자신이다”고 했듯 사회주의적 현실 참여도 1901년생 젊은 문인들에게 답이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100년 전 근대문학의 갈림길에 선 6명의 행보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최동호 교수는 이렇게 말을 맺는다. “흐트러진 만화경의 조각을 붙잡고 사이버 세상의 화려한 불꽃놀이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화려한 시적 수사의 껍질을 던져 버리고 시대사적 보편성을 이룩할 것인가.” 이것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시인(문인)에게 던져진 선택의 과제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