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미덕은 역시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원시 자연상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여전히 미지의 세계라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탄자니아(Tanzania)의 원시적인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특히 유명하다. 탄자니아에서는 야생동물을 볼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지역인 세렝게티나 킬리만자로산 같은 유명한 국립공원 등이 사람을 유혹한다.
그러나 이런 유명한 장소도 아닌 한 작은 마을인 우지지(Ujiji)는 나의 발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곳은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하나로 근-현대사를 수놓은 많은 탐험가들조차 오지 가운데 오지로 손꼽은 곳이었다. 게다가 탐험가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마을’이라는 매력에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우지지 마을이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뜸한 내륙에 위치하였는가 하는 것은 수도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에서 기차를 타고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나 걸린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차를 내린 이곳 또한 우지지 마을에서 가장 가깝다는 키고마에 도착할 뿐이지 이곳에서 다시 우지지 마을로 찾아가려면 다른 교통수단을 알아봐야 했다. 탕가니카호(Lake Tanganyika) 부근에 있는 작은 마을 우지지. 탕가니카호 품안에 있는 덕에 마을 사람은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데, 호수에는 풍부한 어종들이 있어 오지지만 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우지지 사람은 탄자니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투계 아프리카인으로 주로 붉은 흙으로 가옥을 짓고 생활한다. 스와힐리어와 영어가 공용어지만 이곳에서는 스와힐리어를 주로 쓰며, 쌀을 주식으로 한다. 그리고 열대기후인 까닭에 손쉽게 많은 종류의 열대과일을 얻을 수 있어 식사 대용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오지인 우지지 마을이 사람에게 알려진 것은 탕가니카호를 발견한 사람이기도 한 영국의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리빙스턴의 덕이다. 그의 기본적인 목표는 복음을 확장하고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이었기에 아프리카 강의 분포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나아가 파라오 왕 때부터의 의문인 나일강의 원류를 찾아 탐험하였다.
그가 이 작은 마을로 온 경위는 탕가니카호 지역을 탐험하다 건강상태가 크게 나빠져 철수한 탓이었다. 그는 본국과의 연락도 두절되고 물자 수송도 끊긴 채 이곳에서 힘든 나날을 보냈는데, 다행히 특종을 위해 리빙스턴을 찾아다닌 한 기자의 도움으로 다시 탐험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 기자는 뉴욕 헤럴드 잡지사의 스탠리로 90명의 인부를 동원하고 3,500km를 넘는 먼 거리를 1년하고도 51일을 소요하고서 이 작은 오지 마을에서 리빙스턴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당시 리빙스턴의 실종은 전 세계적으로 큰 뉴스였다. 1869년 말부터 이듬해에 걸쳐 ‘아프리카 탐험의 영웅 리빙스턴 박사를 구하자’ ‘하루라도 빨리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의 생사를 확인하라’ 등의 여론이 모국인 영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일어났다. 유럽인이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아프리카 땅에서 약 30년 동안이나 원주민과 생활한 그는 성자로까지 칭송되었다.
리빙스턴의 보고는 1869년 5월30일자로 끝나고 무려 1년 10개월이나 넘게 소식이 없었기에 그의 모국 영국에서는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탐험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영국 탐험대가 출발하기에 앞서, 당시 대특종을 노린 미국의 뉴욕 헤럴드 신문사에서는 리빙스턴 수색을 보도하기 위해 영국 청년 스탠리를 대장으로 하는 탐험대를 먼저 아프리카로 보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들의 만남은 “리빙스턴 박사님 아닙니까”라는 스탠리의 짧은 인사말로 싱겁게 시작되었다. 한번 생각해 보라. 말라리아에 걸리고, 정글 초원 산골짜기 강을 수십 번이나 건넜고, 독사·독충·사자·악어 등 그 무수한 어려움을 뚫고 이루어진 만남치고는 너무 싱겁지 않은가. 그러나 이 짧은 인사말 뒤에 스탠리는 감격의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런 그의 손을 노인(리빙스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이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우지지 마을에는 작은 기념관이 세워졌다.
근대 아프리카 역사에서 리빙스턴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한다면 나는 당연히 어느 정도 규모의 박물관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나가던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았다. 한 주민이 다 쓰러져 가는 부락민의 골목을 가리켰다. 저런 외지고 지저분한 곳에 있을까 싶어 설마 하면서 골목길을 따라갔다. 집 앞에 이르자 거의 칠이 다 벗겨진 허름한 양철 입간판에 ‘리빙스턴 박물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로 이 초라한 곳이 스탠리와 만난 역사적인 장소요, 지금은 기념관이자 박물관이란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그래, 아프리카에서도 오지 중 오지인 우지지까지 와서 박물관을 둘러보려는 이도 드물겠지”라고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아무도 없는 폐가 같은 박물관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마당에 있는 기념탑과 망고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양철문이 열리면서 한 노인이 다가왔다. 그는 “내가 박물관을 지키는 사람이니 미화로 2달러쯤 되는 탄자니아 실링(TSh)을 입장료로 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정말로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하는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한 실랑이는 적도의 이글거리는 뜨거운 태양에 지쳐 포기해 버렸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한다는 듯 실제로 스탠리와 리빙스턴의 만남이 이루어진 망고나무는 지금 마당에 있는 망고나무가 아니고, 기념관에서 100m 아래 있는 망고나무인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설명해 주었다. 박물관 안은 조잡스럽게 만들어진 스탠리와 리빙스턴의 인형이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채 조용히 그 당시를 설명하고 있었다. 근대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리빙스턴이 살던 이곳이 너무도 초라해 더 머물고 싶은 마음조차 없어졌다. “나는 아프리카의 흙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신의 명령이니까요”라고 한 리빙스턴의 말이 귓전에 맴도는 듯했다.
그러나 여느 아프리카 사람처럼 욕심이 없어 보이는 얼굴, 서둘지 않는 느긋한 심성, 소박하게 웃는 우지지 사람을 대하노라니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거대한 망고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는 사람, 현란한 색상의 전통 옷차림의 여인네들이 오후 햇살 속에 거리를 활보하는 우지지 마을을 뒤로 하면서 이곳이 앞으로도 ‘세상의 때’에 절지 않는 순수한 역사 속의 한 마을로 남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이런 유명한 장소도 아닌 한 작은 마을인 우지지(Ujiji)는 나의 발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곳은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하나로 근-현대사를 수놓은 많은 탐험가들조차 오지 가운데 오지로 손꼽은 곳이었다. 게다가 탐험가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마을’이라는 매력에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우지지 마을이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뜸한 내륙에 위치하였는가 하는 것은 수도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에서 기차를 타고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나 걸린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차를 내린 이곳 또한 우지지 마을에서 가장 가깝다는 키고마에 도착할 뿐이지 이곳에서 다시 우지지 마을로 찾아가려면 다른 교통수단을 알아봐야 했다. 탕가니카호(Lake Tanganyika) 부근에 있는 작은 마을 우지지. 탕가니카호 품안에 있는 덕에 마을 사람은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데, 호수에는 풍부한 어종들이 있어 오지지만 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우지지 사람은 탄자니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투계 아프리카인으로 주로 붉은 흙으로 가옥을 짓고 생활한다. 스와힐리어와 영어가 공용어지만 이곳에서는 스와힐리어를 주로 쓰며, 쌀을 주식으로 한다. 그리고 열대기후인 까닭에 손쉽게 많은 종류의 열대과일을 얻을 수 있어 식사 대용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오지인 우지지 마을이 사람에게 알려진 것은 탕가니카호를 발견한 사람이기도 한 영국의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리빙스턴의 덕이다. 그의 기본적인 목표는 복음을 확장하고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이었기에 아프리카 강의 분포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나아가 파라오 왕 때부터의 의문인 나일강의 원류를 찾아 탐험하였다.
그가 이 작은 마을로 온 경위는 탕가니카호 지역을 탐험하다 건강상태가 크게 나빠져 철수한 탓이었다. 그는 본국과의 연락도 두절되고 물자 수송도 끊긴 채 이곳에서 힘든 나날을 보냈는데, 다행히 특종을 위해 리빙스턴을 찾아다닌 한 기자의 도움으로 다시 탐험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 기자는 뉴욕 헤럴드 잡지사의 스탠리로 90명의 인부를 동원하고 3,500km를 넘는 먼 거리를 1년하고도 51일을 소요하고서 이 작은 오지 마을에서 리빙스턴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당시 리빙스턴의 실종은 전 세계적으로 큰 뉴스였다. 1869년 말부터 이듬해에 걸쳐 ‘아프리카 탐험의 영웅 리빙스턴 박사를 구하자’ ‘하루라도 빨리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의 생사를 확인하라’ 등의 여론이 모국인 영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일어났다. 유럽인이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아프리카 땅에서 약 30년 동안이나 원주민과 생활한 그는 성자로까지 칭송되었다.
리빙스턴의 보고는 1869년 5월30일자로 끝나고 무려 1년 10개월이나 넘게 소식이 없었기에 그의 모국 영국에서는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탐험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영국 탐험대가 출발하기에 앞서, 당시 대특종을 노린 미국의 뉴욕 헤럴드 신문사에서는 리빙스턴 수색을 보도하기 위해 영국 청년 스탠리를 대장으로 하는 탐험대를 먼저 아프리카로 보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들의 만남은 “리빙스턴 박사님 아닙니까”라는 스탠리의 짧은 인사말로 싱겁게 시작되었다. 한번 생각해 보라. 말라리아에 걸리고, 정글 초원 산골짜기 강을 수십 번이나 건넜고, 독사·독충·사자·악어 등 그 무수한 어려움을 뚫고 이루어진 만남치고는 너무 싱겁지 않은가. 그러나 이 짧은 인사말 뒤에 스탠리는 감격의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런 그의 손을 노인(리빙스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이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우지지 마을에는 작은 기념관이 세워졌다.
근대 아프리카 역사에서 리빙스턴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한다면 나는 당연히 어느 정도 규모의 박물관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나가던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았다. 한 주민이 다 쓰러져 가는 부락민의 골목을 가리켰다. 저런 외지고 지저분한 곳에 있을까 싶어 설마 하면서 골목길을 따라갔다. 집 앞에 이르자 거의 칠이 다 벗겨진 허름한 양철 입간판에 ‘리빙스턴 박물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로 이 초라한 곳이 스탠리와 만난 역사적인 장소요, 지금은 기념관이자 박물관이란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그래, 아프리카에서도 오지 중 오지인 우지지까지 와서 박물관을 둘러보려는 이도 드물겠지”라고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아무도 없는 폐가 같은 박물관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마당에 있는 기념탑과 망고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양철문이 열리면서 한 노인이 다가왔다. 그는 “내가 박물관을 지키는 사람이니 미화로 2달러쯤 되는 탄자니아 실링(TSh)을 입장료로 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정말로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하는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한 실랑이는 적도의 이글거리는 뜨거운 태양에 지쳐 포기해 버렸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한다는 듯 실제로 스탠리와 리빙스턴의 만남이 이루어진 망고나무는 지금 마당에 있는 망고나무가 아니고, 기념관에서 100m 아래 있는 망고나무인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설명해 주었다. 박물관 안은 조잡스럽게 만들어진 스탠리와 리빙스턴의 인형이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채 조용히 그 당시를 설명하고 있었다. 근대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리빙스턴이 살던 이곳이 너무도 초라해 더 머물고 싶은 마음조차 없어졌다. “나는 아프리카의 흙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신의 명령이니까요”라고 한 리빙스턴의 말이 귓전에 맴도는 듯했다.
그러나 여느 아프리카 사람처럼 욕심이 없어 보이는 얼굴, 서둘지 않는 느긋한 심성, 소박하게 웃는 우지지 사람을 대하노라니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거대한 망고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는 사람, 현란한 색상의 전통 옷차림의 여인네들이 오후 햇살 속에 거리를 활보하는 우지지 마을을 뒤로 하면서 이곳이 앞으로도 ‘세상의 때’에 절지 않는 순수한 역사 속의 한 마을로 남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