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기 파동의 와중에도 출판계는 제 길 가기에 바쁘다. 휴가철을 앞두고 미국 출판계의 표현을 빌리면 ‘빅푸시’(광고공세)가 시작되었다. 물론 대중문학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지상을 장식하는 대중소설 광고를 보면 ‘참 많이 발전했구나’라는 생각부터 든다. 상품의 내용이나 질과는 상관없이 장식·포장하는 기술은 다른 업종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 거기에다 이제는 독자를 압도하는 문구도 서슴지 않는다. ‘순수·대중 문학 논쟁의 한가운데 선 작품’(이용범의 ‘열한번째 사과나무’)이라는 말을 듣고 나면 마치 대중소설이 오늘의 한국문학을 평정한 인상이다.
여기서 의도적으로 대중소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대중소설의 융단폭격을 지켜보며 의분을 느낀다. 독서대중들이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고 비판적으로 책을 읽는다면 이같은 거품은 상당히 약화하리라 믿기에 그렇다. 물론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면 세칭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반론을 제기할 법하다. 설혹 대중소설에 천편일률적인 도식성과 오락성, 그리고 현실도피주의라는 치명적 한계가 있더라도 거기에는 전망 없는 세계에 대한 심미적 저항이 담겨 있다며 목청을 높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대중소설과 본격문학에는 경계가 없는 것일까. 이제 본격문학은 문학사라는 박물관에 진열할 구시대적 유물이 되고 만 것인가. 나는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불륜소설과 애정소설의 차이에 있다고 믿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소설문단의 지형도를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90년대 들어 불륜소설이 왕성하게 창작되었고, 이들 작품이 본격문학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불륜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대부분 여성인 데 비해, 지고지순한 사랑의 세계를 그린 작가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그리고 이 애정소설 대부분을 대중소설로 분류한다.
이같은 대립구조는 무척 흥미롭다. 대부분은 불륜을 다룬 소설이 통속적일 가능성이 더 높다. 불륜은, 거칠게 말하면 가정을 버리고 다른 이성의 품에서 놀아나는 것을 말한다(고상하게 말하면 당대의 지배적인 도덕적 가치관과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불륜소설에는 당연히 질퍽한 성적 유희를 그렸을 거라는 게 일반적 예상이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90년대 한국소설의 풍향계에 너무 무지한 독자다.
우리 문단에 불륜소설의 흐름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여성작가로 서하진과 전경린이 있다(등단 초기와 달리 전경린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들은 주로 중산층 여성들의 일탈적 행위를 치밀하게 묘사하면서 작가적 명성을 쌓았다. 이들이 말하는 불륜은 ‘틈새’에서 시작한다. 틈새가 무엇인지에 대해 문학평론가 황종연은 “사랑의 코드와 결혼의 코드 사이의 대립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90년대 불륜소설은 ‘젖소부인’의 후예들이 아니다. 이들의 불륜은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한다. 매우 속물적 목적에서 맺은 인연이 파탄에 이르고, 이 위기상황을 넘기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불륜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들 작가들이 만든(불륜을 저지르는) 여성들은 탈옥수다. 가정이라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가부장적 질서라는, 감옥에서 탈출해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탈옥수들이 가는 길에는 두 갈래가 있다. 그 하나는 불륜이 과연 진정한 해결책이냐는 물음이다. 사랑하지 않고 사랑 받지 못해 새로운 사랑을 꿈꿨으나, 그 결과는 참담함뿐이다. 여성의 불륜은 결국 또 다른 남성의 사랑을 갈구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존적이다. 양성평등이 싹틀 여지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밀고 나왔어도 가부장적 질서가 쌓아놓은 높은 벽은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깨달음에 이르는 소설은 대체로 내향적이고 반성적이다. 서하진이 바로 이 어름에 있다. 다른 한 갈래는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매우 선동적인 경향이다. 종착지가 결국 비극이더라도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라면 현실에 과감히 맞서자는 것이다. 90년대 문학이 만든 새로운 유형의 영웅이 될 이 여성들은 정열의 화신들이다. 이 자리에 전경린이 있다.
이들 소설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삶의 진면목이다. 겉으로는 매우 안정적이고 행복해 보이는 우리의 결혼생활이 썩어 문드러진 진실을 만난다. 사실 그 모습은 낯설고 흉측하고 끔찍하다. 우리가 애써 회피하고 싶은 그 무엇이 이들 소설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두 작가는 황종연의 적절한 지적대로 이졸데의 손녀들이다.
여성작가들이 불륜을 그릴 때 대중소설계를 장악한 남성작가들은 순정의 세계를 작품화했다. 하병무(‘들국화’ ‘남자의 향기’), 김하인(‘국화꽃 향기’ ‘아침인사’ ‘허브를 사랑하나요’), 김민기(‘눈물꽃’ ‘가슴에 새긴 너’) 등이 대표선수들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애정소설이나 순정소설 분야는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며 서점가를 장악했다.
이 소설들의 공통된 특징은 ‘멜로의 법칙’을 철저히 지킨다는 점이다. 그 법칙은 문학평론가 고미숙이 말한 대로 사랑의 순정성, 슬픔의 감상적 과장, 오래 되고 익숙한 덕목들로의 귀환 등이다.
그런데 우리 대중소설은 유달리 통속성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한 예로 지난해 하반기 독서시장을 강타한 ‘국화꽃 향기’는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청춘남녀가 한눈에 반한다는 것은 대중소설의 일반적 얼개니 그냥 넘어가더라도 여자 주인공이 오랫동안 머리를 감지 않아 나는 냄새에서 남자 주인공이 꽃향기를 맡는다는 대목에서는 웃다가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제 눈에 안경이고, 그게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속물적인 단면이라고 이해하려 해도 좀처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대중소설에서 우연성을 강조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찍이 김동인은 이광수를 비판하면서 이 점을 부각한 적이 있다.
또 이런 유의 작품은 한 사람의 일방적 헌신을 돋을새김한다. 그것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헌신이든,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헌신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일방적 희생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 인간적 갈등은 전혀 없거나 최소화해 있다. 그러나 잘 따져봐라, 어찌 사랑과 헌신의 과정에 갈등이 없겠는가. 헌신과 희생이 돋보이는 장치는 죽음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상대방이 죽거나 상대방은 살고 자기가 죽는다. 읽는 이들의 콧물 눈물(있다면 다른 물까지도)을 쏙 빼는 장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대중소설 속의 죽음에서는 최소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만큼의 철학적 성찰도 발견하기 어렵다. 죽음마저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한 헐거운 기획에 종속해 있을 뿐이다.
이쯤에서 권위 있는 학자들의 말을 빌려 얘기를 정리해 보자. 먼저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문제제기로 앤서니 기든스는 이런 말을 했다. “로맨틱한 사랑도, 또는 그러한 사랑과 결혼 결합도 인간 삶의 주어진 측면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단지 더 넓은 사회적 영향력에 의해 모양지어지는 것이다.”
순정한 사랑이란 거짓신화다.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 역시 사회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사랑의 정체다. 다음으로는 평론가 이남호의 말. “대중소설은 일상적 삶의 고통을 감상으로 포장하고, 삶과 세상의 모순을 외면하게 하며, 뻔한 진실을 감상적으로 포장해 낯익은 표현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는 게 그의 견해다.
불륜소설이 본격문학 대접을 받고 애정소설이 대중소설 취급을 받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함축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삶의 진면목을 보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본격문학으로 분류하는 소설들이 과연 그런지에 대한 답은 문학평론가들에게 맡기겠다.
마지막으로 쓴소리 한마디. 최근 드림웍스가 만든 애니메이션 ‘슈렉’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다. 디즈니의 가치관을 통렬하게 패러디한 이 애니메이션을 우리 대중소설 창작자나 출판인들이 관심있게 보았으면 한다. 외국의 대중문화는 이미 기존의 통념적 서사구조를 깨고 진보적인 사고를 체제화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부자아빠’가 찬양 받는 시대에 작가정신과 출판인의 양심을 버리면서까지 돈 버는 데 혈안이 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돈을 벌려면 좀 제대로 벌자. 최소한 ‘슈렉’ 정도는 되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지상을 장식하는 대중소설 광고를 보면 ‘참 많이 발전했구나’라는 생각부터 든다. 상품의 내용이나 질과는 상관없이 장식·포장하는 기술은 다른 업종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 거기에다 이제는 독자를 압도하는 문구도 서슴지 않는다. ‘순수·대중 문학 논쟁의 한가운데 선 작품’(이용범의 ‘열한번째 사과나무’)이라는 말을 듣고 나면 마치 대중소설이 오늘의 한국문학을 평정한 인상이다.
여기서 의도적으로 대중소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대중소설의 융단폭격을 지켜보며 의분을 느낀다. 독서대중들이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고 비판적으로 책을 읽는다면 이같은 거품은 상당히 약화하리라 믿기에 그렇다. 물론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면 세칭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반론을 제기할 법하다. 설혹 대중소설에 천편일률적인 도식성과 오락성, 그리고 현실도피주의라는 치명적 한계가 있더라도 거기에는 전망 없는 세계에 대한 심미적 저항이 담겨 있다며 목청을 높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대중소설과 본격문학에는 경계가 없는 것일까. 이제 본격문학은 문학사라는 박물관에 진열할 구시대적 유물이 되고 만 것인가. 나는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불륜소설과 애정소설의 차이에 있다고 믿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소설문단의 지형도를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90년대 들어 불륜소설이 왕성하게 창작되었고, 이들 작품이 본격문학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불륜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대부분 여성인 데 비해, 지고지순한 사랑의 세계를 그린 작가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그리고 이 애정소설 대부분을 대중소설로 분류한다.
이같은 대립구조는 무척 흥미롭다. 대부분은 불륜을 다룬 소설이 통속적일 가능성이 더 높다. 불륜은, 거칠게 말하면 가정을 버리고 다른 이성의 품에서 놀아나는 것을 말한다(고상하게 말하면 당대의 지배적인 도덕적 가치관과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불륜소설에는 당연히 질퍽한 성적 유희를 그렸을 거라는 게 일반적 예상이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90년대 한국소설의 풍향계에 너무 무지한 독자다.
우리 문단에 불륜소설의 흐름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여성작가로 서하진과 전경린이 있다(등단 초기와 달리 전경린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들은 주로 중산층 여성들의 일탈적 행위를 치밀하게 묘사하면서 작가적 명성을 쌓았다. 이들이 말하는 불륜은 ‘틈새’에서 시작한다. 틈새가 무엇인지에 대해 문학평론가 황종연은 “사랑의 코드와 결혼의 코드 사이의 대립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90년대 불륜소설은 ‘젖소부인’의 후예들이 아니다. 이들의 불륜은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한다. 매우 속물적 목적에서 맺은 인연이 파탄에 이르고, 이 위기상황을 넘기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불륜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들 작가들이 만든(불륜을 저지르는) 여성들은 탈옥수다. 가정이라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가부장적 질서라는, 감옥에서 탈출해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탈옥수들이 가는 길에는 두 갈래가 있다. 그 하나는 불륜이 과연 진정한 해결책이냐는 물음이다. 사랑하지 않고 사랑 받지 못해 새로운 사랑을 꿈꿨으나, 그 결과는 참담함뿐이다. 여성의 불륜은 결국 또 다른 남성의 사랑을 갈구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존적이다. 양성평등이 싹틀 여지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밀고 나왔어도 가부장적 질서가 쌓아놓은 높은 벽은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깨달음에 이르는 소설은 대체로 내향적이고 반성적이다. 서하진이 바로 이 어름에 있다. 다른 한 갈래는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매우 선동적인 경향이다. 종착지가 결국 비극이더라도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라면 현실에 과감히 맞서자는 것이다. 90년대 문학이 만든 새로운 유형의 영웅이 될 이 여성들은 정열의 화신들이다. 이 자리에 전경린이 있다.
이들 소설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삶의 진면목이다. 겉으로는 매우 안정적이고 행복해 보이는 우리의 결혼생활이 썩어 문드러진 진실을 만난다. 사실 그 모습은 낯설고 흉측하고 끔찍하다. 우리가 애써 회피하고 싶은 그 무엇이 이들 소설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두 작가는 황종연의 적절한 지적대로 이졸데의 손녀들이다.
여성작가들이 불륜을 그릴 때 대중소설계를 장악한 남성작가들은 순정의 세계를 작품화했다. 하병무(‘들국화’ ‘남자의 향기’), 김하인(‘국화꽃 향기’ ‘아침인사’ ‘허브를 사랑하나요’), 김민기(‘눈물꽃’ ‘가슴에 새긴 너’) 등이 대표선수들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애정소설이나 순정소설 분야는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며 서점가를 장악했다.
이 소설들의 공통된 특징은 ‘멜로의 법칙’을 철저히 지킨다는 점이다. 그 법칙은 문학평론가 고미숙이 말한 대로 사랑의 순정성, 슬픔의 감상적 과장, 오래 되고 익숙한 덕목들로의 귀환 등이다.
그런데 우리 대중소설은 유달리 통속성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한 예로 지난해 하반기 독서시장을 강타한 ‘국화꽃 향기’는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청춘남녀가 한눈에 반한다는 것은 대중소설의 일반적 얼개니 그냥 넘어가더라도 여자 주인공이 오랫동안 머리를 감지 않아 나는 냄새에서 남자 주인공이 꽃향기를 맡는다는 대목에서는 웃다가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제 눈에 안경이고, 그게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속물적인 단면이라고 이해하려 해도 좀처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대중소설에서 우연성을 강조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찍이 김동인은 이광수를 비판하면서 이 점을 부각한 적이 있다.
또 이런 유의 작품은 한 사람의 일방적 헌신을 돋을새김한다. 그것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헌신이든,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헌신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일방적 희생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 인간적 갈등은 전혀 없거나 최소화해 있다. 그러나 잘 따져봐라, 어찌 사랑과 헌신의 과정에 갈등이 없겠는가. 헌신과 희생이 돋보이는 장치는 죽음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상대방이 죽거나 상대방은 살고 자기가 죽는다. 읽는 이들의 콧물 눈물(있다면 다른 물까지도)을 쏙 빼는 장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대중소설 속의 죽음에서는 최소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만큼의 철학적 성찰도 발견하기 어렵다. 죽음마저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한 헐거운 기획에 종속해 있을 뿐이다.
이쯤에서 권위 있는 학자들의 말을 빌려 얘기를 정리해 보자. 먼저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문제제기로 앤서니 기든스는 이런 말을 했다. “로맨틱한 사랑도, 또는 그러한 사랑과 결혼 결합도 인간 삶의 주어진 측면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단지 더 넓은 사회적 영향력에 의해 모양지어지는 것이다.”
순정한 사랑이란 거짓신화다.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 역시 사회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사랑의 정체다. 다음으로는 평론가 이남호의 말. “대중소설은 일상적 삶의 고통을 감상으로 포장하고, 삶과 세상의 모순을 외면하게 하며, 뻔한 진실을 감상적으로 포장해 낯익은 표현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는 게 그의 견해다.
불륜소설이 본격문학 대접을 받고 애정소설이 대중소설 취급을 받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함축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삶의 진면목을 보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본격문학으로 분류하는 소설들이 과연 그런지에 대한 답은 문학평론가들에게 맡기겠다.
마지막으로 쓴소리 한마디. 최근 드림웍스가 만든 애니메이션 ‘슈렉’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다. 디즈니의 가치관을 통렬하게 패러디한 이 애니메이션을 우리 대중소설 창작자나 출판인들이 관심있게 보았으면 한다. 외국의 대중문화는 이미 기존의 통념적 서사구조를 깨고 진보적인 사고를 체제화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부자아빠’가 찬양 받는 시대에 작가정신과 출판인의 양심을 버리면서까지 돈 버는 데 혈안이 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돈을 벌려면 좀 제대로 벌자. 최소한 ‘슈렉’ 정도는 되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